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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시인 김시종, 역사에 찢겨진 삶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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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자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나에게 8·15란 4·3이란 무엇이었나>

 

<조선과 일본에="" 살다="">는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이 아흔 가까운 자신의 생을 처음으로 풀어낸 자서전이다. 식민지 ‘황국소년’으로 맞이했던 8·15해방, 남북분단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투신한 남로당 활동, 제주도 4·3사건의 전개와 참혹했던 학살의 광풍, 그 끝에 감행해야 했던 일본 밀항,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

현대사의 쓰라림이 여전히 생생한 한평생을 신중하고도 힘 있는 고유의 문체로 술회했다. ‘결별해야 했을 일본어로 말하고 써야 하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상황과 평생 대면하고 맞서온 시인의 이 회상기는 2015년 탁월한 산문작품에 수여되는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상을 수상했다.

일본과 조선, 남한과 북조선, 공산당·조총련, 그리고 온전히 정치적 인간이 되지 못한 또 한 명의 자신… 몇 겹으로 갈기갈기 찢긴 ‘재일’이라는 실존을 골신(骨身)의 일본어로 자아내 우뚝 세운 휴머니즘의 궤적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전 아사히신문사 주필)

김시종은 이번 회상기에서 자신의 생애가 통과해온 수많은 사건과 상황들, 유년 시절 연을 좇아 달리던 즐거운 기억에서부터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강렬한 장면들을 신중하게, 때로는 일렁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힘 있는 글로 써냈다.

김시종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태어나, 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소년 시절 대부분을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에서 보냈다. 해방 전까지 그는 그야말로 황민화 교육이 길러낸 제국의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일본 동요와 군가에 흠뻑 빠졌으며,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지 않는 부모를 답답해했고, 전차병 학교에 지원하여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했다. 한글은 한 글자도 쓸 줄 모르고 ‘식민지 지배’ 같은 말은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외골수 ‘황국소년’이었다. 그러던 1945년, 열일곱의 그는 자기 나라라는 의식조차 없었던 조선으로 ‘떠밀려오듯’ 해방을 맞이한다.

"두려움과 바닥 모를 후회를 가슴 밑바닥에 쑤셔넣은 채 기억을 가라앉히듯 나는 일본어로 표현활동을 해나갔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언어는 의식의 밑천입니다. 내 의식의 밑바탕을 만들어낸 언어가 내게는 식민지를 강제했던 종주국의 언어였습니다. 그럼에도 내게 식민지는 가혹한 물리적 압박과 수탈이 아닌 너무도 다정한 일본의 노래, 소학교 창가와 동요, 서정가라고 불리는 그리운 노래로 다가왔습니다. 그만큼 온전히 식민지가 된 시대였습니다."-본문 중에서

김시종에게 일본어란 자신의 감성과 사고체계를 길러낸 정다운 모국어와도 같은 언어였던 동시에 ‘국어’로서 강제되었던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조국의 현실과 사회의식에 눈을 떠 민족의 말과 글, 문학을 왕성하게 배워나갔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학생운동과 남로당 활동에 투신하는 등 커다란 사상적 전환을 겪는다. 그러나 그런 그가 ‘해방’되어 떨어져나왔던 일본에서 결국은 생의 대부분을 살아가며 일본어로 말과 글을 써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재일시인 김시종이 끊임없이 의식하고 대결해야 하는 쓰라린 조건이자 아이러니였다.

"해방으로부터 7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라는 자문은 지속됩니다. 1945년 8월 15일을 기해 그때까지의 내 일본어는 어둠 속에 갇힌 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어둠의 말을 겉으로 꺼내가며 인생 대부분을 일본에서 지내고 있으니 이것은 자신과의 지독한 숨바꼭질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본문 중에서

일본어로 시를 쓰는 자신에게 해방이란, 소년기를 뒤틀어가며 익힌 일본어의 정감과 운율을 스스로가 끊어내는 일이라 김시종은 말한다. 유려함을 베어내고 ‘어색하게’ 직조한 자신의 일본어로써 일본어에 보복하는 과정, 그 어눌한 일본어로 생각과 말을 자아내야 했던 과정이 이 회상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였다는 것이다.

이번 한국어판은 그러한 맥락과 의도까지 포함한 김시종의 일본어를 다시 한국어로 제대로 옮겨내기 위해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의 대응을 각별히 고민하고 여러 세대 한국어 화자의 검토를 거치는 등 신중을 기하여 최선의 번역본이 되도록 힘을 기울였다.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는 무엇보다도 그간 저자가 오랫동안 속으로만 삼켜온 제주 4·3에 대한 기록이다. 육십여 년이 넘게 그 어디에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되새길 수밖에 없었던 참혹한 일들까지, 민주화의 영향으로 정리된 기록들을 참고함으로써 정확하게 되살려 비로소 글로 옮겨냈다. 그만큼 이 책에는 당시에 관한 놀랄 만큼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김시종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4·3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조차 숨김없이 털어놓지 못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남로당 당원으로서 참가했다는 이야기가 엄연한 ‘인민봉기’였던 4·3사건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이를 ‘공산폭동’이라 강변한 미군정과 군사정권의 논리에 동원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불법입국했다는 자백인 셈이 되는 증언을 함으로써 남한 군사정권으로 강제송환당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1954년에 이르러서야 청년기의 분기점을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난 세월 깊은 두려움과 후회를 안고, 그 부채를 갚기 위한 여러 활동에 힘써온 그는 자신을 “4·3사건의 빚을 앞으로도 계속 짊어지고 살아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목숨을 걸고 사지에서 탈출한 김시종은 밀항 끝에 오사카의 재일 집단거주지 이카이노에 깃들여 살게 된다. 불안과 가난이 뒤얽힌 디아스포라의 공간 속에서 차츰 삶의 자리를 잡아나가게 된 그는 한국전쟁이 치러지던 1950년 무렵에는 고향에서 도망친 사람으로서 빚을 갚고 힘을 보태고자 일본공산당에 가입하고 스이타 사건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사회, 문학 활동을 이어나갔다.

일본으로 탈출하던 당시 김시종은 본래 ‘북조선’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김일성 우상화와 조총련의 북한 편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57년 조총련으로부터 조직적 비난을 받고 1959년에는 일본공산당에서도 이탈하면서 그는 결국 ‘귀국선’을 타지 못한 채 일본에서 살아왔다. 그는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기에 ‘재일조선인’으로 남았고, 재일외국인 최초의 공립학교 교사가 되어 조선어를 가르치고 시작(詩作)과 강연 활동 등을 계속해왔다.

고향을 떠나온 지 49년 만인 1998년, 김시종은 비로소 제주를 다시 방문했고, 1년에 한두 번 성묘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국적을 취득했다. 과연 이제 김시종은 대한민국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은 역의 각도에서도 던져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김시종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단지 김시종에게 한국적을 부여해 한국인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김시종의 4·3을 복권하고 김시종의 재일을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김시종이라는 존재와 사고가 어떻게 한국사회 일부가 되느냐의 문제다. 8·15는, 4·3은 김시종에게 무엇이었나.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이것이 ‘조선’과 ‘일본’, 그 어느 쪽에도 안착하지 못했으며, 안착하지 않겠다는 뜻을 품은 이 책의 제목이 묻는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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