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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과 받아야 편하게 갈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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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 피규어 프로젝트③] 길원옥 할머니 편

 

역사의 산 증인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어디에 계시더라도 우리가 할머니를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가해자가 진실된 마음으로 사과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할머니의 시간을 붙들어두고 싶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위안부' 할머니의 시간을 붙잡고 싶습니다
② "여러분 보세요. 역사의 산 증인 이용수가 있습니다"
③"일본 사과 받아야 편하게 갈 수 있을텐데…"
④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웃었습니다"
⑤ 할머니, 우리가 함께 기억 할게요


1928년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난 길원옥 할머니는 13세가 되던 1940년 만주 하얼빈으로 끌려갔다. 일 년 만에 몸에 병을 얻은 할머니는 귀국했다. 그러나 한해 뒤인 1942년 다시 중국으로 끌려가 18세가 되던 1945년까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일본 측은 자발적인 지원자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13세 소녀가 그런 일을 자원했을 리는 만무했다. 길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끊임없이 고통당했고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은 채 귀향했다.


"할머니, 지난밤 안녕히 주무셨어요?"

2월 17일, 길원옥 할머니(89)가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에 분주하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화장품을 바르는 모습 뒤로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얼마 전 폐렴으로 입원한 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외부 활동을 피하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자야 할 때 안자고, 안잘 때 자고 그래요."

지난밤 안부를 묻는 질문에 무덤덤하게 대답하신 할머니. 사실 오늘 외출은 할머니께는 일종의 '모험'과도 같다. 머리를 빗고 예쁘게 단장을 시작할 때 쯤 할머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 "어머니 잘 주무셨죠?"

아들의 전화였다. 다정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아들은 추운 오늘같이 추운 날씨에 어머니가 행여 고생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안부를 물었다.

"아침마다 전화하고 직접 오기도 하고 그래요."

아들자랑을 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으신 듯 했다.

"우리 아들 잘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자손을 원하는가 봐요."

◇ "'일본' 하면 이 머리가 불편해요"

외출 준비를 마치고 벽에 기대 앉은 길원옥 할머니. 사실 5분 이상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최근 들어 조금씩 심해지는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소중한 기억을 점점 잃고 있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일본'하면 이 머리가 불편해요. 웬만한 일 가지고 원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돼요? 다 원한을 풀고 사는 건데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벌써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그만큼 당했다는 이야기지…"

벽에 기대 잠시 생각에 잠긴 할머니의 얼굴에는 이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일본'이란 기억 속에서 고통 받고 계신 할머니께 이번 캠페인 자체가 우리만의 욕심이 아니었는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 "사과를 다 받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사는 게 어렵지 않죠. 그런데 저 끔찍스러운 것들이 얼른 사과를 하지 않거든…"

할머니께서는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저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일본의 사과 받는 것 외에는 없어요. 우리가 편하게 가는 것은 저 사람들에게 사과 받는 것 밖에 없어요. 사과를 받는다고 다시 젊어지겠어요? 그래도 그것을 보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거지…"

◇ "남원에 봄 사건 났네"

간단한 이야기를 끝내고 힘들게 차에 오르신 할머니. 그래도 모처럼의 외출이 즐거우신지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번졌다.

"남원에 봄 사건 났네.
전라남도(북도) 남원에 바람났네 춘향이가.
신발 벗어 손에 쥐고 버선발로 걸어오네.
쥐도 새도 모른 듯이 살짝살짝 걸어오네.
오작교로 광한루로 도령 찾아 헤매도네.
남원에 봄 사건 났네. 났네~"

기억이 가물가물한 할머니셨지만 노래 한 곡을 부탁드리자 막힘없이 부르셨다.

"딴 것은 잘 잊어버려도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잊어 버리지 않지"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이내 지치셨는지 할머니께서는 쉼터 소장님 어깨에 기대 새근새근 잠드셨다.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서 생각보다 일찍 촬영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지하주차장에서 내려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서도 할머니께서는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하셨다.

할머니의 건강을 생각해 촬영은 최대한 빨리, 최소한의 작업만으로 이루어졌다.

할머니께서는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셨고 이제 우리가 할머니를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 남았다.

현재까지 생존하고 계신 마흔네 분의 할머니 중 이용수, 길원옥 할머니의 3D모형 제작 촬영을 마쳤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김복동 할머니를 모시고 촬영할 계획이다.

※ 이 기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후원하기 위해 '다음 뉴스 펀딩'에 제공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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