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의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쉼보르스카가 펴낸 마직 두 권의 시집 <여기>(2009)와 <충분하다>(2009)의 수록작 전체를 번역해 묶은 것이다.
쉼보르스카는 86세 고령에 열두번째 시집 <여기>를 출간한 직후, 마치 농담처럼 다음 시집 제목은 "충분하다"로 정했다고 선언했다. 시인은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예측하기 힘든 자연의 섭리가 자신을 덮쳐와 "충분하다"고 속삭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시인은 오랜 사색과 고민 끝에 무르익은 열아홉 편의 시들을 선보였다. 여기 시편들에서는 시간의 유한성을 상대로 무모한 도전을 지속하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인간의 피할 수 숙명을 환기시켰다.
쉼보르스카는 기억과 망각으로 변주되는 삶의 속성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시인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기억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과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속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오로지 기억을 위해, 기억만 품고서 살기를 바란다.
어둡고, 밀폐된 공간이라면 더욱 이상적이다.
하지만 내 계획 속에는 여전히 오늘의 태양이,
이 순간의 구름들이, 현재의 길들이 자리 잡고 있다.
때로는 기억이 들러붙어 있는 것에 진저리거 난다.
나는 결별을 제안한다. 지금부터 영원히.
그러면 기억은 애처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건 바로 나의 마지막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기억과 공존하기엔 힘겨운 삶 」부분(28-29쪽)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보고 있는 태양과 구름도 기억의 밀폐된 저장고에 갇히는 순간, 더 이상 그 때의 태양이나 구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반추한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불완전한 기억을 부여잡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시집<충분하다>에는 여섯 편의 미완성 시들이 '마지막 시들'로 묶여 책의 말미에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쉼보르스카의 육필 원고를 촬영한 사진도 함께 실려 있어 시인이 삭제 또는 첨삭하거나 수정한 대목들, 혹은 몇 가지 버전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대목들을 그래도 볼 수 있도록 했다.
옮긴이 최성은 교수(한국외국어대 폴란드어과)는 유고 시집<충분하다>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결론적으 이 시집에는 삶과 죽음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시인의 여유로운 시선이 담겨 있다. 또한 페이소스와 유머, 엄숙함과 익살스러움 사이에서 적절하게 완급을 조절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몰입하기'와 '거리두기' 사이를 넘나드는 정교한 퍼즐 게임에 동참하게 만든다. 특히 곳곳에서 맞딱뜨리게 되는 풍자적·해학적인 요소들은 고령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시인 스스로가 끝까지 창작의 과정을 진심으로 즐겼으며, 이 시집을 감상하는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50여쪽에 달라는 옮긴이 해설은 쉼보르스카의 시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다. 이 해설을 통해 독자는 쉼보르스카의 사상 형성 과정, 대중에 노출을 꺼리며 작가로서 충실한 태도, 타계 후 동료 문인들의 추도사 등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껴볼 수 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8쪽/ 13,000원 충분하다>충분하다>여기>여기>충분하다>여기>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