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보름달(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 서정주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 오고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 한가위의 오늘 밤 - 박목월
달을 보며 생각한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한가위의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들.
한라산 기슭에도
태백산 골짜기 두메 산골에도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어린이 어린이들.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달빛에 빛나는 하얀 이마
달빛에 빛나는 까만 눈동자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를 생각할까.
모르는 그 누구도
달을 보면서
오늘 밤 달을 보는 내게로
따뜻한 마음의 손을 내밀까.
그야 모르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모든 어린이들이
어쩐지 정답게 느껴진다.
언제 만날지
어떻게 사귀게 될지
그야 모르지만 오늘 밤
달을 보는 나는 따뜻한 마음의 손을
서로 잡고 있는 것 같다.
송편 빚는 고사리 손(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 여우난 곬족 - 백석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동이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 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을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까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을 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룻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불혹의 추석 - 천상병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 추석 무렵 -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