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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없는 곳이 없었다"…조선인 '전범'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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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8-0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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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일본군 배속 송복섭씨 인터뷰 공개…재판서 극적 무죄 석방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군무원으로 일하다 일본 패망 후 전범재판에까지 섰던 한국인의 생전 증언 영상이 공개됐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 22주년인 4일을 앞두고 싱가포르에서 B·C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던 송복섭(1916년생·작고)씨의 1990년대 초 인터뷰 영상 일부를 3일 공개했다.

송씨는 1992년 언론에 자신이 있던 부대에서 운영된 조선인 위안부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영상에서 목격한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을 증언했으며,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가 자신이 돌봐줬던 영국군 포로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일화 등을 소개했다.

유족회에 따르면 송씨는 1940년대 초 강제징용을 피하려 일본군 군무원으로 입대해 인도네시아에서 포로감시원과 보급병 등으로 일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수마트라섬 팔렘방 지역에 꾸려진 자치조직인 '조선인회'의 감찰 역할을 맡았다가 1946년 2월 연합군에 체포됐고 같은 해 7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 명월관…조선인 위안부의 흔적들

송씨는 1992년 한 지역 일간지에 자신이 일제 패망 후 수마트라에 만들어진 조선인 자치조직 '조선인회' 간부로 있을 때 인원을 파악하려고 적어뒀던 61명의 여성 명부를 공개하면서 이들이 모두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송씨는 영상에서 "당시 팔렘방에 있던 일본군 위안부들은 '제1명월관'과 '제2명월관' 두 곳에 나뉘어 있었고, 수마트라든 싱가포르든 인근에 조선인 위안부가 없는 곳이 없었다"고 했다.

그곳에 간 군인들이 치른 요금은 50전이었고, 문 앞에도 '한발(一發)에 50전'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고 전했다.

명월관 운영자는 한국인 형제로, 일본군에 협조해 위안부를 관리하며 비호받는 '끄나풀'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들 형제는 일본 패망 후 조선인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명월관 위안부 수를 묻는 말에 송씨는 "전쟁이 끝나고서는 위안부들이 조선인회에 들어와 그들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전에는 일본인들이 관리하던 곳에 있었으니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위안부들이 종전 후 어떻게 됐는지도 알수 없었다. 송씨가 자치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연합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 "전쟁 중 맺은 우정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은 목숨"

조선인 군무원 중에는 B·C급 전범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연합군 전범재판에 넘겨진 경우가 많았다. 송씨도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가 자신이 감시했던 영국군 포로 '리즈 중령'의 도움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른 병사들이 영국군 포로에게 음식을 비싼 값에 파는 것을 막는 등 인도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했고, 특히 리즈 중령에게는 담배와 커피를 몰래 주면서 친분을 쌓은 덕분이었다고 설명했다.

담배는 하급품이 보급되면 일본군 병사들이 내다버리곤 했는데 그때 주워다가 일본군 표시가 적힌 필터를 없애고 잎만 추려냈다. 커피는 열매를 따다가 말리고서 돈가스 기계로 갈아 만들었다고 했다.

송씨는 "재판받다 무의식중에 리즈 중령 얘기를 하면서 '리즈 중령을 불러서 물어봐 달라. 그분이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죽어도 원망하지 않고 죽겠다'고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리즈 중령이 아프리카에서 날아와 증언을 해줘 자신과 다른 군무원 한 명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리즈 중령은 종전 후 수용소에서 나가면서 송씨에게 자신과 동행할 것을 제의했지만 송씨가 "조국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하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재판을 받은 한국인 중 무죄로 풀려난 사람은 두 명뿐이라는 것이 송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송씨는 영국 법정의 무죄 판결 이후에도 계속해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법정에 다시 서야 했으며, 그동안은 계속해서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유치장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당시 내 목숨은 사람 목숨이 아니었다"며 "나는 생명이 왔다갔다 (하기를) 다른 사람보다 더했으니 (일본이) 나한테는 보상을 몇십 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송씨는 결국 1947년 5월이 돼서야 일본 사세보(佐世保)로 옮겨왔으며, 그곳에서 부산을 거쳐 고향인 전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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