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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행 교수의 발자취와 그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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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울대에서도 정치경제학 강의할 사람 사라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윤성호 기자 / 자료 사진)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 교수 별세. 향년 73세. 고인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경제학자로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이론인 <자본론>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바 있다.

김 교수의 별세 소식을 전해들은 학계 인사들은 국내에서 고인이 독보적인 위상을 지켰던 정치경제학 강의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인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인을 애도하는 글을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 올렸다.

“새벽 김수행 교수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다시 잠들지 못했다. 자본주의 모순이 확대, 심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교수님의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리고 김 교수님 퇴임후 맑스주의 경제학 교수 자리를 없애버린 서울대 경제학과의 조치를 다시 생각한다. 김 교수님 마지막 박사지도학생이 근래 목포대에 자리잡았는데, 이후 대가 끊기고 말았다. 맑스주의 경제학의 문제의식이 더 필요한 시대임에도...”(조 국 서울대 법대 교수)

“이른 아침에 충격적인 부음을 듣다. 작년 천안 입장의 김수행 선생님 집에서 대취했던 기억이 어제 같고, 또 한번 가자고 했었는데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선배나 선생의 지도없이 영어 원서 자본론을 숨어서 읽던 우리 세대에게 외국에서 자본론을 제대로 공부하고 돌아온 김수행, 정운영 두 분의 등장은 엄청난 버팀목이었다.이제 서울대에서도 정치경제학 강의를 할 사람이 사라졌고, 성공회대 학생들도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좋은 선생님 한 분을 잃었다. 더 역할을 해야할 분들, 좋은 분들은 왜 이리 서둘러 가는가?”(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마르크스는 뒤르켐, 베버와 함께 사회학의 기초를 세웠다. 마르크스의 핵심은 정치경제학이다. 나는 김수행교수의 책들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김수행교수가 돌아가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소외와 착취가 없는 천국에서 부디 편히 쉬시길...”(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수행 선생 별세. 내 인생의 한 부분이 이렇게 마감하나 싶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우석훈 '내가 꿈꾸는나라' 공동대표)

고 김수행 교수의 학문 인생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고인은 1991년 펴낸 <정치경제학 에세이> 출간사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직접 밝힌 바 있다. 그 내용을 다시 간추려 본다.

"1942년 일본 규우슈우의 후꾸오까에서 태어났고 해방과 더불어 대구로 왔다. 대구에서 초·중·대구상고를 마치고 1961년 4월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965년 3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입학하여 1967년 2월 <금융자본의 성립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7-68년 조교생활을 하였는데, 1968년 8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보름 동안 남산의 정보부(지금의 안기부)에 붙잡혀 있은 적이 있다. 죄목은 통일혁명당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S씨로부터 레닌의 저작과 북한의 대중소설을 받아 '탐독'하고 '포섭'되었다는 것이었다. 보름 뒤에 남산에서 풀려나와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중 교수들의 소개로 1969년 3월 한국외환은행 조사부에 특채되었다. 1972년-75년까지 한국외환은행 런던지점에서 근무하였다.영국을 보면서 처음 느긴 것은 자본주의 사회도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여러대학에 입학원서를 냈지만 모두가 거절하였다. 다행히 런던대학교의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에서 연구생으로 받아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3년간의 해외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사표를 제출한 뒤 다시 런던으로 떠났다. 그 때 부인과 아들 셋, 모두 5명의 가족이 움직인 것이다. 만 33세의 가장이 재산도 없이 더운 가슴 하나로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인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아내와의 깊은 토로과 합의의 과정이 있었다. 어쨌든 아내는 1982년 3월 내가 학위를 받을 때까지 런던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집을 꾸려나갔다.

런던대학교 안의 버크베크칼리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제 경제학의 전체 모습이 보다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있게 선택할 수 있었다. 박사논문은 마르크스의 공황론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과제를 선택할 때 큰 고민을 했다. 1977년 10월이니까 마르크스 경제하글 연구했다면 한국에 와서는 살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과제를 선택하면 허송세월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982년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귀국 후 한신대학교에서 강연하던 김수행 교수는 학내 분규로 인해 정운영 교수 등과 같이 해임되었고, 민주화가 되면서 그 열기에 힘입어 1989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되었다. 서울대에서 유일한 정치경제학, 마르크스경제학 교수였던 그가 2008년 2월 퇴임하자 학교 당국은 마르크스경제학자를 뽑지 않았다.김 교수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사회과학대학원 등을 통해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알기 쉬운 경제학' 강의를 해왔다.

고인은 생전에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자본론> 완역을 꼽았다. 그는 "다행히 1987년 6월 항쟁과 그 이후의 노동자 대투쟁 이래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확대되고, 내가 1989년 2월 서울대에 자리잡은 뒤, <자본론> 세 권 전체를 우리말로 번역하게 된 것을 나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2002,<'자본론'의 현대적 해석> 머리말). 그 이유는 "이 책이 낡아빠진 옛날 책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걸작이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불황·실업·빈곤·노자 대립이 가장 분명한 형태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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