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이 서울 이화동에 있는 영화사 ㈜케이퍼필름 사무실 내에 비치된 암살의 소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인터뷰를 모두 마친 뒤 최동훈(44) 감독에게 가볍게 물었다. '영화를 사랑하느냐'고. 최근 서울 이화동에 있는 영화사 ㈜케이퍼필름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신이 난 아이처럼 영화 이야기를 하던 그에게 꼭 던지고 싶은 물음이었다.
머뭇거림 없이 돌아온 최 감독의 답은 '그렇다'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저희 집에서 꽤 먼 거리에 극장이 있었는데, 하루 날 잡아 나가면 영화 네 편을 한 번에 보고는 했죠. 대학 재수기간에도 멈출 수 없었어요. (웃음) 영화가 시작될 때 가장 행복했고, 끝날 때 가장 슬펐어요. 항상 영화 속 이야기가 더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죠."
'지금 영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달라진 점이 없는냐'고 재차 물었다. "어릴 때 영화에 대해 가졌던 마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요.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보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거든요."
1930년대 치열했던 항일 무장투쟁사를 영화 '암살'(제작 케이퍼필름)로 흥미롭게 녹여낼 수 있던 데는, 최 감독의 이러한 경험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비판적인 역사의식이 더해지면서, 암살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동시대성까지 품게 된 모습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1930년대를 다룬 책들을 읽다보면, 그 시대가 항상 괄호처럼 빈 공간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영화 '암살' 스틸(사진=케이퍼필름 제공)
"만약 1930년대를 다루게 된다면 반드시 항일 무장투쟁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을 빼놓고는 1930년대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봤거든요. 당대의 모던한 문화를 소개하는 책도 많이 접했지만,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았죠. 굉장히 힘든 시기였음에도 행복을 갈구했던 사람들이 빚어내는 희비극을 영화 안에 담아내고자 했던 이유죠."
▶ 영화 암살의 캐릭터들에서는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등 당대를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에서 봐 왔던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의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 김산의 '아리랑'은 읽었지만, 아쉽게도 조정래 선생의 작품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소설보다는 그 시대를 자세히 기록한 자료에서 정확한 팩트만 찾아내 접목시키려 애썼다. 김구 선생의 저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해방 뒤 일제시대 악질적인 친일파를 조사하기 위해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를 다룬 자료를 비롯해 당대의 문화를 다룬 책을 주로 읽은 이유다.
자료를 읽으면서 인력거꾼의 파업 등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봤다. 한 편의 영화에 모든 이야기를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가장 큰 과제는 이야기를 좁히고 집약시키는 과정이었다. 각기 다른 입장에 처한 안옥윤(전지현), 염석진(이정재),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을 동시에 출발시켰을 때 그들의 갈등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주목했다.
영화 '암살' 스틸(사진=케이퍼필름 제공)
▶ 극중 염석진의 "인간은 다 죽잖아", 안옥윤의 "알려야지, 우린 끝까지 싸우고 있었다고", 영감(오달수)의 "우리 잊으면 안 돼" 등의 대사는 각 캐릭터의 행위에 또 다른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대사 하나 하나에 신경쓴 모습이다.= 대사는 의외로 많이 안 쓰려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를 상상하면서 대사로는 전달되지 않는 어떤 것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사 분량이 많지 않다보니 한 마디 한 마디가 인상적으로 느껴진 것은 아닐까.
▶ 카메라는 극중 암살 작전에 투입되기 전 단원들이 사진 찍는 모습을 정성들여 담아내고 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독립군을 영화로 기록하려는 의지로 다가오던데.= 그 시절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출정하기 전처럼 중요한 순간에만 사진으로 담은 것이다. 그러한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안의 인물들이 말을 거는 것 같다. 자연스레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상상하게 된다고 할까.
▶ 독립군 한 명 한 명이 세상을 등질 때마다 추모하듯이 그 쓰러진 모습을 카메라로 2, 3초가량 가만히 비춘 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영화 암살은 어떻게 보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으면 했다. 예전 같았으면 빠르게 편집하고 끝냈을 작업이었는데, 그 모습을 오래 보여 주는 것이 이 영화에 맞는 화법이라고 봤다. 관객들은 개성의 집합체다. 특정한 것을 강요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팩트로서 1930년대의 풍경과 사람들의 갈등을 보여 줌으로써 해석을 열어 두려 애썼다. 같은 장면을 봐도 각자 다른 것을 느끼게 되는 게 한 편의 영화이지 않을까.
영화 '암살' 스틸(사진=케이퍼필름 제공)
▶ 안옥윤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까닭에 관객 입장에서는 감정적 동요가 배가되는 분위기다.= 보통 투쟁의 역사는 남성적 영역으로 여기게 된다. 우리 영화에 남자들만 나오면 거창한 액션을 선보이면서 후다닥 작전을 완수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거친 곳에 한 여성이 던져졌다. 암살 작전에 투입된 그녀는 절실하게 한 발 한 발 힘겨운 걸음을 내딛으며 목표에 다가간다. 그것이 우리 영화에 맞는 설정이라고 봤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한 발의 총성이 들리면 숨을 헐떡이며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 액션을 찍고 싶었다.
▶ 극 말미 안옥윤이 암살 작전을 수행하기 전 웨딩드레스를 보고 울컥하는 장면은 묘한 여운을 남기더라.= 영화 암살을 클래식하게 찍고 싶었지만, 올드해지는 것은 경계했다. '모던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이 뭘까'를 고민한 결과물이 개인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시대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려 했던 이유다. 안옥윤의 앞에는 주어진 운명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애쓰고 애쓰다가 결국 흐느끼게 된다. 안옥윤은 힘겹게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커피를 즐기고 싶어하는, 스스로 행복해지려 애쓴 강인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 눈물이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촉매가 됐다고 본다.
▶ 소위 반전 카드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설정들을 극 초반에 과감하게 공개해 버린다. 암살이 지닌 드라마의 힘을 믿은 건가.
= 제가 반전을 잘 못한다. (웃음) 언제나 그래 왔다. 캐릭터 사이 관계 등을 관객들에게는 미리 알려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러한 요소가 영화적인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강화해 주는 것 같다. 폭로가 감추는 것보다 긴장감을 높여 주는 셈이다.
영화 '암살' 스틸(사진=케이퍼필름 제공)
▶ 영화 속 염석진과 하와이피스톨은 상반되는 길을 걷게 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독립군으로서 안옥윤과 염석진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하와이피스톨은 냉소적인 외부인에서 후반부 극의 중심에 서게 된다. 어찌 보면 염석진이야말로 가장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인 인물이다. 반면 하와이 피스톨은 보다 영화적이고 장르적인 캐릭터인데,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가 극 안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안옥윤, 염석진, 하와이피스톨은 삼두마차다.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삐걱거리게 되는.
▶ 극중 기차역에서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일장기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장면이 나온다. 국가 권력에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더라.= 일제 강점기를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을 고민했다. '지금 여기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면서 실제 그러한 풍경을 봤고, 그 시대를 오롯이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겨 차용했다. 우리 어릴 때도 그런 경험을 했기에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저녁 6시가 되면 군인들은 거수경례를, 일반인들은 가슴에 손을 얹지 않았나.
▶ 해방 뒤 반민특위 활동을 영화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 시대의 문제를 현재로까지 연장시키는 모습인데.
= 알다시피 안타깝게도 반민특위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에 밀려 모든 것이 묻혀 버린 탓이 커 보인다. 딱 그 정도만 그리고 싶었다. 지금 반민특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영화를 통해 한 번쯤 찾아보게 된다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다만 영화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관객들은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천재가 된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가감 없이 그 시대를 보여 주려 애쓸 뿐이다.
최동훈 감독(사진=윤성호 기자)
▶ 한국 현대사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러 커다란 사회적 부조리를 낳은 게 사실이다. 암살에는 이러한 아픔을 영화 속에서라도 치유하고 매듭지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서사가 뭘까를 고민하게 된다. 서사는 거짓이고 허구다. 일제를 매듭짓지 못한 실제 역사는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이때 서사의 몫은 그러한 우리를 보듬어 주고, 알싸한 감정을 남겨 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