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제국을 모독하다니, 사명대사 비석 없애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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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11] 정반대의 인생을 산 친일승려 변설호와 항일승려 한용운

변설호가 주도해서 네 조각을 낸 사명대사 석장비. 다시 접합해 복원했다. (사진=정운현 제공)

 

1943년 합천경찰서에 해인사 주지 변설호가 나타났다. 그는 서장 다케우라에게 은밀히 제보했다.

"해인사 인근에 있는 홍제암의 묘비에 대일본제국을 모독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곧바로 깨뜨려 없애야 합니다."

"무슨 내용인가?"

"1604년에 사명대사가 일본을 방문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가토가 '조선에 귀중한 보물이 있느냐?'고 묻자, 사명대사가 '지금 조선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바로 당신 목이요'라고 대답했다는 불온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비석을 그냥 둘 수 없지요."

화가 난 다케우라는 부하들에게 당장 부셔버리라고 지시했다. 변설호는 경찰과 석수를 데리고 홍제암으로 가서 사명대사의 석장비를 네 동강을 냈다. 그리고는 한 조각은 해인사 안에 있는 경찰주재소 정문 디딤돌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해인사 구광루와 명월당 앞에 잘했다는 듯이 방치했다. 지금 해인사에 있는 석장비는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복원한 것이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복원을 했다고 해도 접합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지금도 해인사를 갈 때 일주문 왼쪽 길을 따라 홍제교를 건너 가면 오른쪽 숲 사이로 나타나는 부도밭에서 사명대사 석장비를 만날 수 있다. 이 석장비는 2000년 9월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면 일본경찰을 앞세워 귀중한 문화재를 파손한 '친일승려' 변설호는 누구인가?

일제의 국방자재로 헌납하기 위해 모은 전국 사찰의 범종들. 죄다 용광로로 들어가 무기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변설호는 금강산 유점사에 있다가 1935년 9월 유점사 경성포교소로 부임하면서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터지자 용산 주둔 조선군사령부에 가서 전사한 일본군의 위령제를 지내주는가 하면 일본군 출정 부대를 전송하기도 했다. 이듬해 2월에는 경성포교소에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냈다. 또 신도들로부터 국방헌금 50원을 걷어 부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친일행각의 공로를 인정받아 3월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해인사 주지로 선출되었다. 그는 정식 발령을 받기도 전에 해인사 본사와 말사의 승려들을 협박해 막대한 국방헌금과 물품을 일본군에게 바쳤다. 해인사 주지로 온 변설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항일 승려를 밀고한 일이다.

◇고경 등 항일승려들을 일경에게 밀고하다

1941년 음력 11월 회갑일에 해인사 마당에서 촬영한 승려 고경의 사진

 

"그대가 이고경인가?"

1942년 11월 합천경찰서로 연행된 승려 고경은 일경의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흔히 '해인사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8대 주지를 지낸 승려 고경과 12명의 학승이 투옥되었다. 죄목은 승려 고경과 법보학원 원장 승려 임환경이 학승들에게 불교 경전 외에 조선 역사를 가르쳐 항일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다. 이들을 밀고한 인물이 바로 해인사 주지로 있던 변설호였다.

당시 체포된 승려 민동선은 "일본경찰은 스님들에게 '한 번 질문하고 열 번 구타하는 것'은 물론 물고문과 불고문까지 자행했다"고 증언했다.

일경들의 모진 고문 끝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승려 고경은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합천 창성여관으로 옮겨진 후 세상을 떠났다. 입적하기 전 고경은 "민족을 위해 역사의 진실을 교육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러면 일본이 패망한 후 이 악질 친일승려 변설호는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해방 이듬해 일제 때의 반민족 행위로 승권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고 절에서 쫒겨났다. 또 1949년에는 반민특위 경남지부에 체포돼 한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는 희한하게 대한불교 총화종이라는 곳의 초대 종정을 지내다 1년만에 사망했다.

더 희한한 일은 석장비를 부수라고 지시한 서장 다케우라가 그날 순찰을 다니다 자동차 전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전설 그대로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변설호와 달리 일제시대에 항일의지를 죽는 날까지 꺽지 않은 승려가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이다.

◇변설호와 대척점에 선 항일투사 만해 한용운

1929년 12월 광주학생의거에 따른 민중대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때의 만해. 당시 50살이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연행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을 들이지 말 것
3.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만해의 주장은 이렇다.

"내 나라를 내가 찾자는 것인데 누구에게 변론을 받으며, 온 나라가 감옥인데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호의호식하자고 독립운동하는 것이 아니잖는가, 일제 법률에 따른 것이 되는 보석을 신청해서도 안된다."

그는 이를 철저하게 실천했다. 서대운 형무소에 수감된 민족대표 가운데 일부 인사들이 내란죄가 적용돼 사형이 선고될 것이라는 풍문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들을 지켜본 만해는 감방의 똥통을 집어던지며 호통을 쳤다.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민족대표의 모습이냐?"

감옥에서 풀려난 후 만해가 길을 걸어가는데 육당 최남선이 뒤쫒아와서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만해는 단호한 어조로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했소"라고 일갈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은 변절해서 일제와 타협노선에 나섰다. 1925년에는 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그것도 모자라 중추원 참의까지 오르는 1급 친일파로 돌아선 것이다. 이런 최남선을 만해는 '이미 죽은 자'로 치부한 것이다.

33인중 하나인 최린과 얽힌 일화가 있다. 만해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최린은 변절해서 중추원 참의를 거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 임전보국단 단장에 취임한 똑같은 1급 친일주구였다.

최린은 한가닥 양심이 남아 있었던지 어느날 만해가 사는 심우장을 찾았다. 만해가 부재중이라 만해의 어린 딸 영숙의 손에 당시로서는 거액인 1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고는 가버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만해는 부인과 딸을 꾸짖고는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문틈으로 돈을 던지고 돌아왔다.

◇조선총독부 꼴 보기 싫어 집의 방향을 틀어버리다

50대 중반에 재혼한 만해는 허름한 단칸방에 신방을 차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거처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집을 지을 때 우리 전통에 따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집터를 잡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만해는 설계자와 인부들을 불러 호통을 쳤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조선총독부 건물)이 바라보일 테니 차라리 볕이 덜 들고 여름에는 덥더라도 북향하는 집을 지어라."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는 심우장이 동북향으로 지어진 사연이다. 이 집에서 만해는 존경하던 독립투사 김동삼의 장례를 치렀다. 만주에서 체포된 김동삼이 옥사했는데도 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만해는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가 시신을 업고 심우장까지 걸어와서 5일장을 지냈다. 그 소식을 듣고 수백 명이 찾아와 조문을 했다. 그러나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만해가 66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만해의 딸 한영숙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통탄할 일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일본경찰들이 장례식에 참례할 손님이 오시는데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오실 손님도 다 못 오시고 장례도 숨어서 치르는 식으로 지내야 했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이가 갈립니다."

◇만해의 숨겨든 아들, 전쟁 중에 북한으로 향하다

1920년대 초에 찍은 만해의 아들 한보국과 그의 친구들. 둘째줄 왼쪽 끝에 나무에 기대 앉아 있는 소년이 한보국이다. (사진=법보신문 제공)

 

만해 한용운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실패로 끝난 홍성의 첫 결혼에서 아내 전정숙에게서 태어난 한보국(1904~1974)이다. 만해는 1930년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 아들이 서울로 찾아와 상봉하기는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같이 살지 못하고 고향 홍성으로 돌려보냈다고 털어놓았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보국은 엿장수나 거지노릇을 하며 어렵게 살다가 아버지가 주선한 홍성지역 신간회 일을 하면서 민족의식이 싹텄다. 뒤늦게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보국은 독서회를 주도하고 고려공산청년회 노동부 책임을 맡다가 1931년 7월 일경에 체포돼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민족주의 계열인 부친과는 달리 좌익에 가담했지만 아버지가 간 길을 똑같이 밟은 셈이다.

해방 후 홍성군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다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을 따라 북한으로 넘어갔다. 홍성지역 인사들은 그를 두고 "호인이었다", "전쟁 때 사람을 다치지 않게 했다", "좌우연합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 김일성 주석이 만해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김 주석은 회고록에서 "한용운은 조선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였다"고 칭송했다.

뒤늦게 만해의 아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 김주석은 평양시내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고, 1964년에는 환갑상을 차려주었다. 슬하에 딸만 다섯을 둔 보국은 "통일이 되면 아버지 대신 너희들이 할아버지 무덤에 가서 성묘를 해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6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일성의 유시를 알게 된 남북한의 불교계는 만해 사상 연구와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만해 한용운="" 평전="">을 저술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만해의 일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왜적의 총독정치 시대에 많은 지사가 변절하고, 많은 문인이 타협하고, 많은 승려가 훼불을 일삼을 때 만해는 제자리를 지키면서 민족사적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시대가 요구하면 붓을 버리고 창을 든다'는 말처럼, 그는 버릴 것을 버리고 지킬 것을 지키면서 외로둔 지사로, 소외된 승려로, 궁핍한 시인으로 종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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