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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 누구의 피든 붉고 뜨겁고 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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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욱의 기자수첩]

 

고품격 뉴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CBS <박재홍의 뉴스쇼=""> '변상욱 기자수첩'에서는 사회 현상들의 이면과 서로 얽힌 매듭을 변상욱 대기자가 풀어낸다. [편집자 주]

최근 ‘한국인 남성이 필리핀 여성과 인연을 맺고 자녀가 태어났다면 그 가족이 필리핀에 살고 있다 해도 한국인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라’고 가정법원이 판결했다. 그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매달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명령이다. 친생자임이 분명하고 아이의 성장과 복지를 위해 아버지로서 돌보는 것이 바람직하니 친생자로 알고 돌보라는 취지다.

◇ 코피노, 필코, 한필, 라이따이한…

이 남성은 업무상 필리핀에 출장을 다니다가 노래방 도우미 여성과 인연을 맺었다. 이렇게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녀를 ‘코피노’(코리안+필리피노)라고 불러왔다. 반대로 한국인 여성과 필리핀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필코’라고 불렀다.

남성의 국적을 앞에 놓는 가부장적 용어인 셈인데 특이한 건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나 나름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유복하게 살고 있으면 코피노와 구분해 ‘한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 혼혈 구분에 계층이 적용된 언어이다. 요즘은 코피노라 통칭하는 추세지만 코피노는 한국인 남성이 버린 아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쓰지 말자는 문제 제기가 있어, 현지에서는 코피노 대신 코필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코필 가족의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2만 명에서 3만 명 사이일 것으로 추산될 뿐이다. 코필 가족이 빠르게 늘어나는 이유는 필리핀과의 교류가 많고 물가가 저렴한데다 카지노도 흥행해 한국인 체류가 많아진 때문이다. 또 필리핀은 가톨릭 국가라 낙태가 엄격히 통제되는 편이어서 아기의 출생률이 높기도 하다.

베트남 역시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들의 자녀들과 그 후예들인 ‘라이따이한’들이 살고 있다. 라이따이한은 1세·2세가 5만 명, 이들의 자녀인 라이따이한 3세가 7만 명이라고 추산된다. 가정법원의 판결대로 이제 시대가 바뀌어 법적 책임도 글로벌해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자기의 친자를 나라 밖에 두고 책임 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가 아닌 것이다.

여러 인종이 섞인 대표적인 국가인 미국의 경우 ‘퓨 리서치센터’가 지난주에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18살 이상 즉 성인의 약 7%가 다민족 배경을 갖고 있다 한다. 우리와 차이가 있다면 다민족 배경을 가진 사람 중 60%는 순혈 혼혈 개념을 따지지 않고 그냥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따지고 보면 오리지널 미국인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등의 백인들이 섞이고 아메리카 원주민이 섞인 혈통인데 무슨 오리지널이 있겠는가? 더 솔직히 이야기해 백인이면 미국 혈통이고 백인 아니면 혼혈이라는 인종차별의 잔재일 수도 있다. 역사적 흐름 속에 존재하는 문화 유산일 뿐 피의 순수성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도 다문화 혹은 다민족 배경의 아이들이 늘고 있다. 2014년 전체 초·중·고교 학생 중 다문화 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07%로 2011년 0.55%와 비교하면 3년 만에 2배가 되었다. 여기에 중도 입국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거나 미취학한 아동 숫자를 더한다면 실제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다만 다문화 혼인 건수도 줄고 이혼 건수도 줄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문화 국제결혼의 이런 저런 문제들이 걸러지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CBS노컷뉴스 변상욱 대기자

 


◇ 누구의 피든 붉고 뜨겁고 순수하다

우리 사회의 다문화 가족 문제를 풀어가기 전 ‘순수혈통-순혈’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섞인 혈통-혼혈’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그런 것이 구분되어 실체로 존재할까? 이것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집단과 집단의 관계에 의한 것이지 세상에 뚜렷이 존재하는 실체적 진실이 아니다. 최초의 혈통이나 인종문제는 백인 대 흑인 구도로 시작되었다. 왜 그럴까? 백인의 식민지가 아프리카였으니 흑백으로 나뉜 것이다. 그러다 백인들의 식민지가 아시아로도 뻗어나가면서 백인 대 흑인이 아니라 흑인과 황인을 통칭한 백인 대 유색인종으로 전개된다.

또 독일 나치는 인종 구별의 방향을 안으로 돌려 권력 지배와 제국주의에 방해가 되는 인종을 골라 적으로 삼기까지 했다. 독일의 게르만 혈통? 독일이라는 나라가 생겨난 지는 150년 밖에 되지 않았다. 게르만 족에 켈트족, 라틴족, 슬라브족이 섞여 지금의 독일 게르만족이 된 것인데 순수 혈통이란 말이 안 된다. 프랑스 역시 켈트족에 라틴족이 얽히고 거기에 골족, 게르만족, 노르만족, 브리튼족 혈통이 섞여 만들어졌으니 순수 혈통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은 신라, 고구려, 백제, 발해, 가야, 몽고, 만주를 어떻게 가닥을 잡아 순수 혈통을 정할 수 있을까? 이는 국가 권력과 영토의 문제라고 봐야지 순수한 피의 분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혼혈이란 말은 사라져야 한다.

민족의 순수한 혈통 어쩌구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치적 배경을 살펴볼 일이다. 국가가 그렇게 나선다면 이는 통치 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사람들은 민족의 순수혈통이라는 말에 끌린다. 자신이 우월한 인종으로 올라서고 열등한 상대가 있어 낮추다보면 자신의 개인적 좌절감을 해소하거나 집단적 우위에서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종은 국경처럼 그저 잠시 그어진 경계일 뿐이다. 경계를 차별과 차이로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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