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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나는 그때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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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95] 한평생 6.25전쟁의 상처를 안고 산 소설가 박완서의 토로

 

작가 박완서가 가장 좋아했던 사진. 작고 후 영정사진으로 쓰였다.

"그래, 우리 집안은 빨갱이다. 우리 둘째 작은 아버지도 빨갱이로 몰려 사형까지 당했다. 국민들을 인민군 치하에다 팽개쳐두고 즈네들만 도망갔다 와가지고 인민군 밥해준 것도 죄라고 사형시키는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죽여라, 죽여. 작은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소주를 과 먹였으니 죽어 싸지. 재강 얻어먹고 취해서 죽은 딸년의 술 냄새가 땅속에서 아직 가시지도 않았을라. 우리는 이렇게 지지리도 못난 족속이다. 이래 죽이고 저래 죽이고 여기서 빼가고 저기서 빼가고, 양쪽에서 쓸 만한 인재는 체질하고 키질해서 죽이지 않으면 데려가고, 지금 서울엔 쭉정이밖에 더 남았냐? 그래도 뭐가 부족해서 또 체질이냐? 그까짓 쭉정이들 한꺼번에 불 싸질러버리고 말지."

1951년 봄 서울 성북경찰서 정문 앞.

만 20살의 처녀 박완서는 경찰서로 끌고 가려는 형사들에게 입에 거품을 물고 퍼부어댔다. 기가 찬 형사들은 그녀를 풀어주고 만다. 집으로 돌아가는 박완서의 흐릿한 눈 앞에 지난 1년 가까이 겪었던 고초가 떠올랐다.

 

1950년 6월 28일 38선을 돌파해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북한 인민군.

1950년 6월 25일, 서울대 신입생 박완서는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만 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호언장담하던 때였다.

포 소리가 미아리 고개 너머에서 들리는데도 서울을 사수할 테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이 27일 밤까지도 들렸다. 그러나 그 시간에 대통령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고관대작들은 서울을 탈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강다리가 성급하게 폭파되면서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3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수복하자 시민들을 버리고 떠난 이승만 정부는 사과는 커녕 엉뚱하게 서슬 푸른 '부역자 처벌'에 나섰다. 서울에 남았던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수는 일기에서 "악질들은 제 한 깐이 있으니까 미리 다 도망가버리고 '나는 악질로 굴지 않았으니 나쯤이야'하고 마음 놓고 있던 사람들만 잡혀가서 경을 쳤다"고 썼다. 이미 좌익 우두머리들은 대부분 인민군을 따라 서울을 빠져나갔는데도 전국적으로 55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박완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졸지에 일어난 난리라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다 피난시키고 나서 정부가 후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빈말대신 한마디의 참말을 남기고 떠날 수는 없었을까? 사태가 급박하여 정부만 후퇴하는 게 불가피하나 곧 전력을 가다듬어 반격해 올 테니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앞으로 닥쳐올 고난을 인내하고 기다려 달라는 비장한 참말을 한마디만 남기고 떠났던들 국민들의 석달 동안의 고난은 훨씬 덜 절망스러울 수도 있으련만. 그렇게 국민을 기만하고 도망갔다 돌아온 주제에 국민에 대한 사죄와 위무 대신 승자의 오만과 무자비한 복수가 횡행한 게 9.28 수복 후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지고 생생하게 억울하다."

◇ 북에서 때리고, 남에서 때리고… 철저한 파괴

동네 사람이 고발하는 바람에 박완서 일가는 가택수색을 당했다.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박완서는 끊임없이 끌려 다녀야 했다. 별의별 청년단체들이 그녀를 보자고 했다. 숙부와 숙모는 따로따로 연행돼 성신여중 뒷산에서 즉결처분을 당했다. 식구가 끌려간 후 소식이 없자 행여나 해서 그 산으로 올라가 시체더미를 뒤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박완서는 기가 막혔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놓고 떠난 사람들이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이승만 정부가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전국에서 '빨갱이 사냥'이 벌어져 무자비한 즉결처분이 자행된다.

국회의원과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를 지낸 정희경씨의 기억도 비슷하다.

"서울 수복 이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심사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임무는 지난 석달동안 부역한 아이들을 심사하고 빨갱이를 색출하는 일이었다. 인민재판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무척 우울해졌다. 인민재판에 즉결처분에 반동분자 색출이니 뭐니 하며 겁을 주는 빨갱이가 지겨워서 서울 수복이 그리도 반갑고 기뻤는데, 우리가 우리 동료를 심사하게 된다니 이 무슨 슬프고 소모적인 갈등이란 말인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대한의 잔 다르크'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정정화도 부역자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과거 임시정부 시절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북에 갔다가 전쟁 때 내려온 것을 만난 죄였다. 독립운동 시절 갇힌 적이 있던 종로경찰서에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또 다시 갇혔다. 거기서 일제시대 그녀를 폭행했던 그 형사들에게 또 시달렸다. 그래도 변호사를 구할 수 있었던 정정화는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녀는 출옥 후 쓴 한시 <옥중 소감="">에서 이렇게 참담한 심경을 밝혔다.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 / 오늘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

◇ 1.4 후퇴… 또다시 서울에 갇힌 박완서 일가

 

1.4 후퇴 당시 화차 안에 좌석이 없자 화차 위에도 피난민이 가득했다.

1950년 겨울이 다가오자 또다시 전황이 바뀌었다. 중공군이 기습적으로 유엔군을 격파하면서 다시 서울을 내주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피난을 독려했다. 그런 지시가 없더라도 서울 시민들은 일찌감치 피난을 서둘렀다. 서울에 남은 '잔류파'가 피난을 갔던 '도강파'에게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한번 이승만한테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

대대적인 피난행렬이 남쪽으로 떠나자 서울은 유령도시가 되었다. 얼마 안되는 노인과 어린이를 빼고는 죄다 서울을 떠났다. 의기양양하게 서울로 들어온 중공군 수뇌부는 텅 빈 서울거리를 보더니 인민군에게 화를 냈다.

"너희들이 지난 여름 서울에서 인민들을 어떻게 다루었길래 다들 떠난 건가?"

 

박완서 가족이 적 치하의 고통스런 삶을 견디어냈던 현저동 판자촌 주택가.

그런 서울에 남은 한 줌도 안되는 시민들 중에 박완서 가족이 있었다. 오발사고로 총상을 입은 오빠 때문이었다. 결국 서대문 형무소가 내려다 보이는 현저동 집에서 고통스런 적 치하 생활을 보내야 했다. 남은 가족은 늙은 어머니와 죽어가는 오빠, 올케와 어린 조카들이었다.

가장 큰 고통은 '배고픔'이었다. 시누이와 올케는 춥고 먹을 것 하나 없는 텅 빈 서울살이를 견디기 위해 도둑질에 나선다. 아무 집이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양식을 찾아내거나 이불까지 가지갈 정도였다. 식량이 떨어져 다들 배가 고파 기진맥진해 있는데 인민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북조선에서 최고의 가무단인 방소 예술단이 영용한 인민군대와 서울 시민을 위안하는 공연이 열린다니 동 단위로 시민들을 빠짐없이 참가시켜라."

얼마 되지 않은 잔류파가 칠흑 같은 밤에 일렬로 줄을 서 염천교 근방의 지하실에 들어가 공연을 봤다. 무대 전면에는 김일성 장군의 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모택동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최고 수준이라는 공연을 보면서 박완서는 절망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놈의 나라가 정말 무서웠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갔았다. 어쩌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찍한 세상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오빠가 난리 통에 총상을 치료받지 못하고 죽자, 박완서의 어머니와 올케는 산송장처럼 멍해졌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젊은이를 보면 왜 안 죽었냐고 대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목숨을 끊을 만한 적극적인 의욕도 없이 그날그날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웃은 달랐다. 전쟁 중에 식구 한두 사람 잃지 않은 집은 없는지라 모두 모질어졌다. 부부가 양식을 구하러 시골로 나갔다가 도중에 기총소사로 남편을 잃고 혼자 돌아온 아내도 그 양식으로 밥을 해 자식들하고 꾸역꾸역 잘도 먹었다. 두 아들을 의용군으로 몽땅 빼앗긴 부부가 다음날도 먹고 살려고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극성스럽게 참외 장사를 했다. 그러나 박완서의 식구는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견뎌낸 아녀자를 다시 서울을 수복한 경찰이 또다시 부역혐의를 조사하겠다니 박완서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 절규에 기가 질린 성북경찰서 형사들은 그녀를 월급이 없는 '지역 방위대' 사무직원으로 취직 시켜주면서 박완서는 생존의 돌파구를 찾게된다.

1953년 4월 21일 박완서는 미군 PX 직원 시절 알게 된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처자식만 아는 착실한 남자'를 얻었다. 온갖 고생 끝에 좋은 남편 만나 신혼여행 갔다온 박완서가 친정에 들렀을 때의 얘기가 애처롭다.

"사촌동생이 이렇게 고해바쳤다. '언니는 시집가는 것만 좋아서 큰엄마가 얼마나 섭섭해한 줄도 모르지? 어제 시골 손님들까지 다들 내려가시고 나서 큰 엄마가 얼마나 우신 줄 알아? 온종일 통곡을 해서 꼭 초상집 같았어. 그러더니 오늘은 심란해서 집에 붙어있기 싫다면서 올케 언니랑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빨래터에 가셨는데, 거기서 또 정릉 골짜기가 떠나게 우시지나 않을려나 몰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울음이 복받쳤다. 처음에 참아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어서, 할 수 없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실컷 방망이질하고 삶아 빨고 백설처럼 희게 된 홋이불 빨래를 이고 식구들이 돌아왔을 때는 나는 멀쩡해 있었다. 빨래를 너는 엄마의 표정도 흰빛을 받아 개운하고 무심해 있었다."

젊은 날 과부가 되어 어린 남매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신식교육을 시킨 엄마가 귀한 아들을 잃고 전쟁을 치렀으니….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20살 나이에 '빨갱이년' 소리 들으며 온갖 수모를 받으면서 식구들 먹여 살리던 처녀가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을 갔으니….

그녀가 20대 초반 그 젊은 나이에 이미, 이 세계의 저 끝을, 이 세상의 '똥구멍'을 보아버린 것이 너무 억울했던 것이다.

◇ 고통스런 시간의 기록들… 박완서 그녀, 그리고 그날의 기억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시절의 박완서.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에 한국전쟁이 터져 중퇴해야 했던 그는 "전쟁이 없었다면 선생이 됐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전쟁이 끝나고 박완서가 행복한 가정을 이뤄도 전쟁 중에 겪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비밀을 재미있어 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더 잘살 수 있냐에 쏠려 있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내가 내 얘기를 소설로 쓰겠다."

40살에 쓴 데뷔작 <나목>을 시작으로 <지렁이 울음소리="">, <부처님 근처="">, <엄마의 말뚝="">,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수많은 작품들이 활화산처럼 쏟아져 나왔다.

박완서는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있다="">는 저서에서 이렇게 마음 속의 얘기를 꺼냈다.

"사람 나고 이데올로기가 난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 나고 사람 난 세상은 그렇게 끔찍했다. 우리 가족만의 비밀로 꼭꼭 숨겨 둔 오빠의 죽음은 원귀가 된 것처럼 수시로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자꾸만 내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첫 작품이 나오자 그때까지 내 속에 짓눌려 있던 나의 이야기들은 돌파구를 만난 것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대작은 못 되더라도 내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그 피로 뭔가를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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