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오늘은 병중에도 일을 해야 했던 광해군 이야기입니다.
1621년 광해 13년 음력 2월 9일 광해군의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제대로 누워서 쉴 수 없었습니다.
중국 명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나라는 청나라와 전쟁 위기때문에 수차례 조선에 지원병력을 요청해오던 때였습니다.
광해는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정무를 보았는데, 신하들이 급하지도 않은 사소한 일까지 계속 들고 오자 과로까지 겹치면서 건강이 더 악화됐던 것 같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은 "나의 병 증세가 가볍지 않지만 사신이 나온다는 소식이 이미 당도했기 때문에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정사를 보았는데, 급하지 않은 일까지 마구잡이로 들고 오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에 관한 일과 중국 사신에 관한 일, 그리고 변방의 보고와 군사와 관련된 일들만 우선적으로 살펴서 들이라"고 따로 지시를 내렸습니다.
■ 세종 5년 (1423) : 내시부에 노비 200 구를 주다
⇒ 내시들을 뒷바라지 하라고 노비 200명을 배정해주었다
■ 광해 13년 (1621) : 병으로 중국과 군사에 대한 것만 보고하도록 지시
⇒ 왕이 병이 나서 중국과 관련된 일과 군사관련 업무만 보고하라고 했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큰 피해를 당하지 않고 잘 버티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 숙종 2년 (1676) : 윤휴가 기자의 묘를 만들 것을 청했으나 왕이 어려워 함
⇒ 윤휴가 기자묘를 세우자고 했으나 왕이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거절했다
■ 정조 10년 (1786) : 별시의 초시를 보아 1천 명을 뽑다
⇒ 별시 초시를 두 군데서 봐서 문과 합격자 1천 명을 뽑았는데 조선 초에 비하면 많이 늘어난 것이다
■ 정조 14년 (1790) : 수원 동헌을 장남헌이라 하고 왕이 편액을 직접 쓰다
⇒ 수원의 동헌을 ‘장남헌’, 내사를 ‘복내당’, 활을 쏘는 사정은 ‘득중정’이라 이름 짓고 정조가 직접 현판을 썼다. 얼마나 수원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도움말 : 김덕수 (통일농수산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