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결과가 알려지면서 '식민사관' 논쟁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동북아 역사분쟁에 대응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된 사업의 결과물에 고대사 분야에서 중국·일본 주장과 같은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도종환 의원은 24일 동북아재단이 2019년 발간을 목표로 그리고 있는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서기 120~300년 시기 고구려 국경선 위치 '비정'(比定·비교해서 정함)이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든 중국역사지도집의 위치 비정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요하 지역부터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중국 한나라 땅으로 편입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요하 양쪽 지역을 한나라 땅으로 편입시킨 것에 대해 도 의원은 낙랑군·대방군 등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지도는 한사군 위치를 지금의 평양 등 한반도 북부로 표시했다.
중국이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한사군 한반도설'과 같은 주장이다
일제강점기 이래 크게 변하지 않은 국내 식민사학계의 통설이다.
문제는 한사군 한반도설이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한사군 한반도설을 근거로 만리장성이 평양 부근까지 들어왔었다고 주장한다.
패수(浿水·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이뤘던 강)를 지금의 평안북도에 있는 청천강으로 보는 것도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조선 영역은 두 강의 남쪽지역으로 쪼그라든다.
민족사학계에서는 사료와 고고학 발굴 유물 등을 근거로 한사군과 패수 위치를 지금의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 보고 있다.
인하대 복기대 교수는 "1차 사료만 제대로 검증한다면 한사군 한반도설이 나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동북공정을 그대로 추종한 지도"라며 "이렇게 설명한 1차 사료는 없다"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사군 관련 내용을 동북아역사재단이 참고한 연구 자료 67건 가운데 35건의 작성자가 고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라는 것이다.
일제가 만든 황국사관의 전파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이 전 교수는 한사군 한반도설을 주장한 학자로, 광복 이후 한국 주류 사학계를 지배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빚자 동북아역사재단은 25일 각 언론사에 해명자료를 보냈다.
재단은 "서강대학교 지도편찬팀(책임연구원 윤병남 교수)이 수행 중인 용역사업 '동북아역사지도'의 초안은 2015년도 11월말에 재단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며, "현재 서강대 지도편찬팀에서 제작 중인 '동북아역사지도'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그 속에 명기된 지명 등도 확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발을 뺐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이같은 기이한 행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재단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 10억 원을 보내고 이른바 '고대한국(Early korea) 프로젝트'라는 것을 시행했다.
한국고대사를 6권의 영문 서적으로 간행하는 것인데, "서구학계에 한국학계의 한국고대사의 연구성과를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일환으로 2013년 12월에 발간한 《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과 2010년에 발간한 《The Samhan period in Korean History(한국역사 속의 삼한시기)》는 조선총독부나 아베 내각, 또는 중국 군무원 산하 기관에서 간행했다고 하면 걸맞을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일반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식이라면 한국고대사의 첫 장면은 당연히 '고조선'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은 고조선은 지워버리고 중국 한(漢)나라의 식민지라는 한사군으로 대체했다.
더 큰 문제는 한사군의 위치를 시종일관 북한 영역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기전 108년에 세워진 한사군의 위치를 찾으려면 한사군 설치 당시 생존했던 사마천의《사기》나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를 비롯해서 《후한서(後漢書)》· 《삼국지》· 《진서(晋書)》처럼 한사군에 대해 쓰고 있는 고대 사서들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중국 고대 역사서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일관되게 지금의 북경 부근 하북성 일대로 표기하고 있다.
한반도 내로 표기한 중국 사료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도 동북아역사재단이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간행한 이 책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있다.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유사시 중국이 북한 강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후 북한은 원래 중국의 역사 강역이었다고 주장해도 반박할 논리가 없게 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 책에서 낙랑(樂浪)을 우리식 발음대로 낙랑(LakLang)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러랑(Lelang)이라고 표기한 것을 비롯해서 모든 지명을 중국 발음으로 표기했다.
북한 지역은 중국의 역사 강역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총독부 산하 식민사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른 부분까지 그대로 서술했다.
진번군에 대해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북부설(평안북도)'과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남부설(황해도)'을 그대로 옮겼다.
자신들이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이라는 생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