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 등을 읽다가 '마름'이라 불리는 등장인물을 접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마름은 넒은 토지를 지닌 지주를 대신해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이를 일컫는다.
중간 관리자인 마름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자기를 그 자리에 있게 한 지주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반면, 자신이 관리하는 소작농들을 대할 때는 지주보다 더욱 악랄하게 억압한다는 점이다. 권력자에게 기대어 권력의 일부를 얻은 마름들은 스스로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체제의 충실한 수호자가 되는 법이다.
마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체제는 옳다"는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그 확신은 지속된 외압으로 인한 자기 검열을 통해 굳어졌을 것이다. 그동안 지주들을 대해 온 경험을 통해 그들이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을 철저하게 파악한 뒤 그에 맞춰 행동했을 터였다. 더 나아가 지주들이 골치 아파할 일들이 생겼을 경우 자기 선에서 그것을 해결하려 애썼 왔을 것이다.
1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미라클 여행기'와 관련해 최근 며칠 사이 불거진 논란을 보면서 마름이라는 존재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문이, 지난해 말 다큐멘터리 독립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5만 관객을 모으는 동안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들로부터 상영관을 배정받지 못해 외압 의혹에 휩싸였던 '다이빙벨' 논란과도 겹친 것은 왜일까.
개봉 이튿날인 16일 서울 신사동에 있는 CGV 압구정점에서 관람한 미라클 여행기는 '나'에서 벗어나 '우리'를 보게 된 청춘의 여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영화였다.
세상살이에 대한 의욕을 잃어가던 한 젊은이가 제주 강정마을을 여행하면서 얻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다시 삶의 용기를 얻는 과정은 우리네 젊은 세대의 감성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이날 이 영화를 연출한 허철 감독은 CBS노컷뉴스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2013년 전국에서 강정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분들이 몇 개월 동안 기부받은 책을 마을에 기부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책을 모아서 전달하는 이들의 마음, 그리고 책을 받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마음은 어떨까라는 궁금증에서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고 기획 의도를 전했다.
그렇게 2013년 10월 17일 책을 전달하러 가는 이들이 모인 인천항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허 감독은 "저 역시 제주 강정마을을 처음 가보는 상황이었고, 극중 여행자인 최미라 씨가 여행하면서 얻은 감정의 변화를 그대로 느꼈다"며 "저희가 겪은 감동을 오롯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끝까지 여행자의 시선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전했다.
영화 '미라클 여행기'의 한 장면. (사진=미라클필름 제공)
하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매체들은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 듯하다. 영화를 봤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협한 프레임 안에서 메시지를 재단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리라.
허 감독에 따르면 네이버는 이 영화의 예고편에서 청해진이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세월호를 다시 이슈화할 염려가 있으니 빼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내 왔다. 예고편에서 그 부분이 모자이크로 처리된 이유다.
허 감독은 "우리 영화가 선전·선동 영화가 아닌 만큼 세월호 참사와 관련되신 분들에게 아픔을 드릴까 염려돼 편집 과정에서 이미 그러한 부분들을 뺐었다"며 "실제 영화를 본 관객들도 주인공이 탄 배가 세월호라는 것을 인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안타까운 게 우리 영화는 미래 세대에 대한 희망을 성찰해 보자는 이야기인데, 세월호 참사와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등 정치적 키워드만 부각되면서 정작 영화의 메시지는 죽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현재 서울시내 멀티플렉스 극장 가운데 미라클 여행기가 걸린 곳은 롯데시네마 서울대입구점과 CGV 압구정점 단 두 곳이다. 메가박스는 단 한 곳도 걸지 않았다. 이들 대형 극장들은 개봉 전 일정 금액을 주고 상영관을 빌려 진행되는 이 영화의 언론시사까지 거부해 논란을 빚었었다.
15일 개봉 이래 상영관이 늘어날 조짐은 전혀 없어 보인다. 오히려 CGV는 제주점의 경우 주말 동안 관객이 없으면 다음주 화요일 내릴 예정이며, 서울 압구정점에 관객이 들어야 그나마 대학로점으로까지 확대할 계획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 감독은 "서로 편가르지 말고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가 정작 현실에서는 특정 프레임 안에 갇혀 버린 격이어서 기분이 묘하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1700만 원 가까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보태 주신 분들께도 죄송한 마음이 크다"며 "더 무서운 것은 주변에서 '요즘 다 그렇다'며 너무 자연스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데,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는 듯한 현실이 창작자 입장에서 몹시 안타깝다"고 했다.
아직도 진행형인 세월호 참사와 강정마을 사태는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모순의 축소판으로 불린다. 자본·안보 만능 논리에 의해 정작 소중하게 지켜가야 할 공동체는 순식간에 파괴됐고, 그 구성원들이 편을 갈라 반목을 거듭하면서 사회의 고통과 분노는 갈수록 쌓이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결코 감춘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문제를 공유하고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뻗어갈 길을 찾아야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닐까. 만약 이 시대에 현대판 마름들이 존재한다면, 멀리 봤을 때 스스로에게도 결국 어느 쪽이 유리할지 저울질해 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