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두고 볼 만한 좋은 그림책이 많다. 하지만 '그림책은 어린이용'이라는 선입견이 많고, 대중에게 그림책을 알릴 수 있는 자리가 적어 좋은 그림책이 그대로 묻힌다. CBS노컷뉴스는 창작 그림책 작가를 릴레이 인터뷰한다. [편집자 주]기사 게재 순서 |
① '진짜 코 파는 이야기' 이갑규 ② '엄마는 회사에서 내 생각해?' 김영진 ③ '괜찮아, 선생님이 기다릴게' 김영란" ④ '망태 할아버지가 온다' 박연철 |
그림책 '진짜 코 파는 이야기'로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어린이ㆍ청소년 부문을 수상한 이갑규 작가
자칭 '생계형 일러스트레이터'인 이갑규(42) 작가는 첫 창작 그림책 '진짜 코 파는 이야기'(책읽는 곰)로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어린이ㆍ청소년 부문에서 수상했다. 한 편의 영화같은 책의 구성과 "어깨에 힘 주지 않고, 계몽성 없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점"이 심사위원단으로부터 높게 평가받았다.
이 그림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코 파는 이야기다. 책 속 등장인물은 몰래, 보란 듯이, 때론 어쩔 수 없이 코를 판다. 몰래 코 파다가 들켜서 창피할 때도 있고, 너무 심하게 파서 아플 때도 있지만 뜻밖의 '월척'(?)을 건졌을 때의 짜릿함은 표현 불가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코 파기에 대한 은밀한 욕구를 해소시켜 주는 점이 아닐까.
15년간 전집과 그림책에 그림을 그려온 이 작가는 "어떻게 하다 보니 코딱지를 첫 창작 그림책의 소재로 삼게 됐다"면서 "휴지를 돌돌 말아 코를 간지럽히는 장난을 자주 쳤던 어린 시절과 아내에게 '그거 어디에 버릴 건데?'라는 잔소리를 듣는 지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것 같다"고 웃었다.
이 작가는 "꼭 어떤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져줘야만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억지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보다는 내용 중 자연스럽게 녹여서 독자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재해석할 여지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봄,여름,가을에는 나무로 우거진 산이지만, 낙엽 떨어진 겨울에는 쓸쓸한 산동네가 되는 김포 감정동의 작업실에서 이 작가를 만나 '진짜 코 파는 이야기'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고민스러웠던 점은?
그림책 '진짜 코 파는 이야기' 중 한 장면
방구, 코딱지, 똥 등 원초적인 소재를 다룬 그림책은 이전에도 많았고, 있어 보이는 소재도 아니라서 할까 말까 망설였어요. 코 파는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이 많았죠. 가벼운 소재를 유치하지 않게 표현하되 '코 파지 마라'고 교육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싫었거든요. '아이들이 코 파는 행위를 따라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은 계속 했고요. 결국 등장인물들이 일관되게 코를 파지만 뒷표지의 엔딩 크레딧에 '어린이는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넣었죠. 그런데 책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순간적으로 흉내낼지는 몰라도 막 파지는 않거든요.
▲ 완성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출판사(책읽는곰)와 계약하고 단행본으로 출간하기까지 1년 반 정도 걸렸어요. 실제 작업한 기간(스케치+채색)은 2~3달 정도 되고요. 제가 생계형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보니 창작만 하는 게 아니라 전집이나 그림책에 그림 그리는 일을 주로 하면서 짬짬이 진행하는 거죠. 출판사에 초안을 보내도 바로 피드백이 오는 게 아니라 검토하는데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리고요. 다른 작업 하면서도 미완성인 초안을 계속 머릿속에 띄어놓고 있어요. 그래야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이거다' 싶은 게 있으면 바로 적용할 수 있거든요. 그때 쾌감은 말도 못하죠. 언제 어디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림책 한 권 펴내는데 1~2년은 쉽게 가요.
▲장면 하나하나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본 작업보다 처음 콘셉트의 방향을 잡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척척 그려낼 것 같지만, 딱 맞는 이미지를 찾아내려면 드로잉 작업을 반복해야 해요. 일단 콘셉트를 정한 후에는 1~2시간 만에 한 컷을 완성하기도 했고, 하루에 세 컷까지 그렸어요. 채색은 판화, 아크릴, 유화로도 해보다가 최종적으로 수채화에 연필을 조금 섞었죠. 마감시간이 정해진 전집과 달리 창작은 변수가 많아서 작업기간을 특정하기 어려워요. 어떤 면에서는 마감이 있는 게 편할 수 있지만 창작작업이 훨씬 재밌어요. 늦바람이 무섭다고, 예전에는 일하기 싫어서 잤는데 요즘은 잠들면 구상을 못할까봐 깜짝 놀라서 깨요. 하하
▲책에서 마음에 드는 장면은?
그림책 '진짜 코 파는 이야기' 중 한 장면
그동안 그림책에 그림만 그려와서 서사에 자신있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서사 보다는 한 컷 한 컷 보여주는데 중점을 뒀지만 책 전체를 한 편의 영화처럼 구성한 게 마음에 들어요. 서사는 한 마디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건데, 이 책은 앞면지의 배우 오디션으로 시작해서 뒷표지의 엔딩 크레딧으로 끝나거든요. '영화를 찍는다'는 콘셉트를 넣음으로써 부족하나마 책에 서사가 생겼죠. 표지는 유명 영화사의 로고를 본떠 만들었고요. 그리고 책 중간과 뒷면지의 출연자 대기실 풍경에 딸과 아내의 모습이 나와요. 엔딩크레딧에 이름도 넣었고요. 첫 창작 그림책이라 기념하고 싶었거든요. 지인들은 책 속 아내 모습을 보고 많이 웃어요. 실물과 똑같다고. 하하
▲출판사와 협업 시 에피소드는?출판사와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초안의 완성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재미를 느꼈죠. 출판사가 수정,보완할 부분을 얘기해주면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계속 고민하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이 훨씬 탄탄해졌어요. 그래서 최대한 완성된 원고를 보여주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완전 초안을 보낸 다음 이런저런 피드백을 많이 받으려 해요. 창작 그림책 작가로는 신인이니까 다양한 출판사와 작업할 생각이에요.
▲책에 대한 주변 반응은?4~9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책인데, 아이와 어른 모두 재밌어했어요. 교육적인 내용이 아니다 보니 반응에 비해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요. 아내에게 물었어요. '교육적인 그림책과 원초적인 소재를 다룬 그림책 중 하나를 고른다면?' 그랬더니 전자를 고르더라고요. 음, 좋은 그림책은 계속 꺼내보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좋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것처럼요. '우리 아이가 이 책만 찾아요' 그런 얘기 들을 때 가장 뿌듯해요.
▲딸의 얘기를 많이 참고할 것 같은데
저도 그런 기대를 많이 했는데, 별로 얻은 건 없어요. 딸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면 귀찮아하고, 자기 그리지 말라고 해요. 친구들이 '코 판다고 놀린다'고. 예전에도 오줌싸개로 그렸는데 '못 생기게 그렸다'고 싫어하더라고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질문했을 때 대답이 서사적인 면에서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아이의 존재가 동기부여가 되는 관찰대상은 되는 것 같아요.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올라가는데, 점점 크니까 동화 쪽으로 옮겨야 하나 걱정이에요. 하하
▲글 쓰고 그림도 그리는데 어떻게 작업하나?
그림책 '진짜 코 파는 이야기' 중 한 장면
글,그림을 같이 작업하니까 서사적인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소설을 많이 읽으려고 해요. '글쓰는 사람에 비하면 독서량이 턱없이 적고, 그림 실력도 부족한데 이도저도 아니면 어쩌지' 라고 생각한 적 있는데, 부족한 글과 그림이 결합하면 생각보다 시너지가 커요. 그리고 글쓰는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그림으로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죠.
▲다른 작가의 그림책도 많이 읽나?자꾸 보다 보면 일정한 틀에 갇히는 느낌이라 요즘에는 잘 안 봐요. 오히려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보죠. 영화는 하루에 한 편은 보려 하는데, '봐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인지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소설은 오쿠다 히데오 책처럼 가볍고 경쾌한 일본소설 위주로 읽어요. 얼마 전에도 한 소설에 나온 그림자 이야기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어서 짜릿함을 느꼈죠. 소설을 읽다보면 낚시하듯 좋은 생각이 딱 걸려들 때가 있어요. 그 재미에 책을 자꾸 읽는 것 같아요.
▲다음 작품은?먹이사슬, 이웃, 달리기, 자화상 등을 소재로 한 창작 그림책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욕심 같아선 올해 최소 한 권은 완성하고 싶은데 정확히 언제 출간할지는 저도 정확히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