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과 빈민 운동, 평화통일 운동에 힘썼던 고 오재식 박사의 장례예배가 7일 오전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드려졌다.
조사를 맡은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광선 목사는 "평생을 약자의 편에 서서 싸웠던 고인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 진정한 운동가였다"며 "남은 자들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정의와 평화를 위해 달려가자"고 강조했다.
장례예배에는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과 박경서 박사, 전국YMCA 연맹 안재웅 이사장, 김상근 목사 등 교계와 각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삶을 기렸다. 고인의 유해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많은 일 했지만 드러내지 않은 리더
그렇다면 故 오재식 박사는 누구일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민주화와 통일, 사회운동의 모든 현장에서 존경을 받아온 리더였다. 고인의 삶은 어떠했는지, 그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우선, 오재식 박사는 탁월한 조직운동가였다.
억압 받고 소외된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동원하고 조직하는 주민운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것뿐 아니라 평생 현장에서 활동한 운동가였다.
그러다보니 늘 도시 빈민과 농민, 산업 노동자들과 현장에서 함께 뛰었고, 전태일이 사망했을 때는 그의 죽음에 냉소적이었던 교회의 시선에 분노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970년 기독교사상 12월 호에 '어떤 예수의 죽음'이란 제목의 글을 싫어 당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난하면 그런대로 기도하고, 괴로우면 그런대로 감사하며 은혜롭게 살 것인데, (중략) 왜 선동하고, 허가 없이 모이고, 불온한 것을 가르치고 하여 목숨을 단축시켰느냐. 교회는 비굴한 미소로 연명하여 상처없이 죽은 무리를 성도로 추서하는 장소렸다. 교회는 흠 없는 성도들의 사교장이요.."
고 오재식 박사는 에큐메니칼 조직 결성에도 힘써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WCC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CCA,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에서 두루 활동하며, 국내외 도시산업선교와 민주화 운동에 힘썼다.
고 오재식 박사는 평화통일 운동에도 힘썼다. 남북 교회 대표와 WCC 관계자들이 최초로 만난 글리온회의를 성사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 했고, 88선언 이라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 나오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는 기독 구호 단체 월드비전에서 북한국장과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에 국수공장을 건립하고 씨감자농장을 운영하는 등의 인도적 대북지원활동으로 연결된다.
1960년대는 기독청년들의 사회운동을, 1970년대에는 유신독재 아래 민주화 운동을,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평화통일 운동에 힘써온 오재식 박사.
많은 일을 했지만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삶은 여러 개의 감투를 쓰고도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