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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야. 지금 호텔에 어떤 남자랑 같이 왔어. 나 좀 도와줘!"
도와달라는 동생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오자 주부 정지선(33,가명)씨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난 14일 일요일 새벽 5시 20분 밀린 집안일을 끝내고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든 정 씨는 동생의 다급한 전화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나 지영(가명)인데 나이트에 왔다가 남자를 만났어. 근데 돈을 많이 써서 얘들이랑 호텔로 오게 됐어. 내가 지금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니까 이 번호로 그 남자랑 통화 좀 해줘."
속삭이듯 다급한 말들을 쏟아내는 탓에 동생의 목소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동생의 이름을 정확히 대며 계속 도움을 요청했다.
동생이 시키는대로 '010-1234-XXXX'이라고 찍힌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지영이 누나한테서 누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랑 제 친구랑 호텔에 왔는데 지영이 누나가 저희한테 돈을 좀 빚져서요. 그런데 누나 선수생활 하셨다면서요?"
순간 정 씨는 등골이 오싹했다. 상대방은 자신이 무슨일을 했는지까지 훤히 알고 있었던 것.
자신을 "호주에 사는 25살 아이스하키 선수"라고 소개한 남성은 그 때부터 정 씨에게 이상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키와 몸무게, 결혼 여부를 묻더니 "가슴이 크냐, 엉덩이가 예쁘냐" 등 노골적인 질문을 퍼부었다.
<자료 영상>자료> [YouTube 영상보기] [무료 구독하기] [nocutV 바로가기] [Podcast 다운로드]동생이 걱정돼 반항조차 할 수 없던 정 씨는 다른 휴대전화로 동생과 통화가 연결돼 다행히 통화 도중 전화를 끊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두려움과 수치심에 몸서리치고 있다.
"가족들의 이름과 신상까지 다 알고 접근해 꼼짝 할 수 없었어요. 돈 요구는 없었지만 개인신상까지 털린 상황에서 2차 범죄가 발생할까봐 가장 걱정되요."
개인 정보를 빼내 돈을 가로채는 보이스 피싱이 음란 전화로 둔갑하고 있다. 누출된 개인 정보를 악용해 음란 전화를 걸거나 국제전화 요금 폭탄을 부과하는 등 일명 '음란 보이스 피싱'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음란 보이스 피싱은 주로 여성들을 상대로 음란한 얘기를 하거나 성적인 개인정보를 캐내는 형태다. 은밀한 사생활까지 접근하는 이들 보이스 피싱은 다양한 시나리오(?)로 피해 여성들이 의심을 피해간다.
대학생 A 씨의 경우 병원 의료진을 가장한 음란 보이스 피싱에 당했다.
"종합병원의 의료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은 "아버지가 검사를 받으러 오셨는데 자녀분도 유전될 수 있다"며 "화장실에서 간단한 검사를 할 수 있다면서 나에게 이상한 걸 요구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부모님께 물어본 뒤 사실이 아니란 걸 알게 된 A 씨는 "전화를 건 사람이 가족 병력이나 정보를 꿰뚫고 있어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며 몸서리쳤다.
실제로 지난달엔 "엄마의 신음 소리로 아들의 성기능 장애를 고칠 수 있다"고 속여 주부(59)를 모텔로 불러 내 성폭행한 이모(45)씨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 씨는 아들 흉내를 낸 뒤 곧바로 의사인 척 연기하며 피해자를 속였으며 치료비 25만 원까지 받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 "음란 전화 받으셨죠? 1번 누르세요" 요금 폭탄 사례도음란 전화를 빌미로 요금 폭탄을 씌우는 경우도 있다. 음란 전화를 건 남성을 추적한다며 국제전화를 걸도록 유도하는 것.
실제로 회사원 B 씨는 변태 남성의 음란전화 뒤 관할 경찰서라며 "혹시 음란 전화를 받지 않았냐"는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경찰관이라고 소개한 상대방은 "변태 상습범을 꼭 검거해야 한다"며 "다음에 또 전화가 오면 1번을 누르고 7분 이상 끌면 녹취 파일이 경찰서로 자동 저장돼 추적해서 잡을 수 있다"고 방법을 상세히 알려줬다.
그러나 이는 국제전화 요금을 부과하기 위한 보이스피싱이었던 것. B 씨는 다음달 수십만원이 청구된 요금서를 받아들고서야 보이스 피싱에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요금 폭탄에 은밀한 질문공세까지 피해 여성들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크지만 정작 신고를 하는 데는 주저하고 있다.
자신의 정보는 물론, 가족의 신상 정보까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해코지를 당할까 봐 적극적으로 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음란 보이스 피싱을 당한 김모(32)씨는 "우리 신상정보를 다 알고 있는데 신고하면 보복할까봐 너무 걱정된다"며 "피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싫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경찰은 이같은 음란 보이스 피싱에 대해 "유출된 개인정보를 음란전화에 이용하고 금전까지 요구하는 신종 수법인 것 같다"고 주의를 요구했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에선 단축 번호를 누르면 녹취록이 경찰로 전송되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공공기관을 사칭해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경우, 일단 전화를 끊고 실제로 해당 수사관과 통화해야 한다"며 "음란 전화의 경우 정보통신망법으로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신고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