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미국 영화배우 크리스 록은 "아카데미 시상식은 마치 수백만 백인들의 행진 같다"며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세계최대의 영화공작소''할리우드의 흑인배우로서 애환을 담은 한마디였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오는 2월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는 할리우드 최대의 축제의 한가운데 우뚝 섰다. 제 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단독 진행을 맡은 것.
그러나 록을 들뜨게 하는 것이 비단 사회자 발탁 때문만은 아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부문에 5명의 흑인 배우가 후보로 지명됐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는 백인들의 행진"언급한 흑인 배우 올해 사회자 맡아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에는 5명의 흑인 배우가 후보로 올랐다. AP통신의 영화 전문 기자는 이를 "77년이나 된 아카데미 시상식의 역사 전체를 두고 볼 때 괄목할 만한 변화"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올해 후보로 지명된 흑인 배우들은 단지 후보에 이름을 올린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상이 유력시 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 가운데도 가장 유력한 수상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배우는 영화 ''레이''에서 ''레이 찰스''를 연기한 제이미 폭스.
전설적인 소울 앤 블루스 가수 레이 찰스를 완벽에 가깝게 재연해 냈다는 평을 받은 그는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경합을 벌일 예정이다.
특히 폭스는 영화 ''콜래트럴''로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올해 아카데미 주요 부문 흑인 배우 5명 후보 올라
영화 ''호텔 르완다''의 두 흑인배우 역시 나란히 후보에 올랐다. ''오션스 트웰브''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준 돈 치들은 지난 1994년 르완다 사태당시 1,268명의 난민을 구한 실존인물 폴 루세사바지나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소피 오코네도 역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른 유일한 흑인 여배우다.
주요 부문에 후보로 오른 명배우라고밖에 칭할 수 없는 모건 프리먼,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남우조연에 오른 그는 이번이 벌써 4번째 도전이라니 그의 오랜 팬이라면 이번 수상을 기대할만도 하다.
이처럼 5명의 흑인 배우가 한꺼번에 후보자로 지명된 사실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목할 만한 일이라는 것은 그동안 아카데미가 흑인배우들에게 얼마만큼이나 보수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77년 아카데미 역사, 3.2 퍼센트 흑인배우만이 후보로 올라
실제로 아카데미 77년 역사 중에 단 3.2퍼센트의 흑인 배우들만이 후보에 올랐으며 이것은 3년 전 2.8 퍼센트에서 그마나 오른 수치다. 이는 미국 인구의 13퍼센트가 흑인임을 감안할 때 이는 턱없이 낮은 수치다.
크리스 록의 말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이 백인배우들만의 잔치였던 것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생긴 이후 처음 40년 동안은 그야말로 백인들만의 무대였다. 1970년대 이전 시상식에서는 단 8명의 흑인 배우가 후보에 올랐고 수상자는 두 명뿐이었다.
아카데미 초기 40년은 백인들만의 무대
1970년대 이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흑인으로서 트로피를 거머쥔 배우는 1964년 ''들에 핀 백합(Lilies Of The Field)''의 시드니 포이티어와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해더 맥다니엘 뿐이다.
1970년대 이후로 들어와 상황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올해 5명의 흑인배우 후보들을 포함 해 총 38명이 후보에 올랐고 그 중 6명이 그 누구보다 뜨거운 눈물로 수상소감을 밝힌 것.
상황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나아지고 있다. 덴젤 워싱턴, 할 베리, 퀸 라티파, 에디 머피, 윌 스미스등 이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스타 흑인배우들이 할리우드를 종횡무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워싱턴, 할리 베리 주연상 수상 이후 변화 시작해이렇게 흑인배우들이 미국 영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지난 2002년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을 모두 흑인배우들이 수상한 이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트레이닝 데이''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덴젤 워싱턴과 ''몬스터 볼''로 아카데미 74년 만에 최초로 흑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할리 베리가 바로 그 주인공.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덴젤 워싱턴은 수상소감에서 "내가 어렸을 때, 장래희망을 유명한 배우라고 말하면 백인 친구들이 나를 비웃곤 했다"며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어려움을 술회했다.
윌 스미스,"아카데미 후보만 올라도 다양한 배역 보장 돼"2002년 시상식에서는 권투계의 전설 무하마드 알리의 인생을 그린 영화 ''알리''의 주연배우 윌 스미스까지 남우주연 후보에 올라 아카데미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진정한 축제로 기억되고 있다.
윌 스미스는 이후 인터뷰에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며 "후보로 지명 된 후 이제 내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훨씬 다양해 진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올해 유력한 남우주연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제이미 폭스는 이 같은 변화를 이끌어 낸 워싱턴과 베리를 두고 "그들은 흑인배우를 대표하는 홍보대사와 마찬가지"라며 그들이 일궈낸 성과가 얼마만큼 큰 것인지를 역설했다.
똑같은 수상자는 변화없는 시상식 만들어 낼 뿐
영화 ''호텔 르완다''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오코네도는 "올해 후보자 선정 과정에서 또 다른 흑인 배우인 케리 워싱턴과 영화 ''레이''의 레지나 킹 역시 잠재적인 후보자들이었다"며 "이러한 변화는 할리우드에 다양성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반가운 신호"라고 평가했다.
"오스카 후보로 지명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는 그는 "지금 할리우드는 다양한 배우들뿐만 아니라 저예산 영화 등 장르 면에 있어서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이를 반겼다.
오코네도는 또한 "항상 똑같은 오래된 공식에 똑같은 배우들은 똑같은 시상식을 만들어낼 뿐이다 올해를 기점으로 분명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 세계 모든 영화팬들은 지난 2002년 할리 베리가 무대에서 흘린 감격의 눈물을 잊지 못할 것이다.
베리는 눈물범벅이 된 채 "74년의 역사가 지금 나에게 온 것 같다"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먼저 세상을 떠난 흑인 여배우들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모든 유색인종의 여배우들과 영광을 나누고 싶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5명의 흑인 배우를 주요 부문의 후보로 지명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그 동안 객석에 앉아 오스카 트로피를 꿈꾸던 배우들의 감동적인 수상소감을 기대 해봐도 좋을 것 같다.
노컷뉴스 전수미기자 nocutworld@c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