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수사였다. 불법사찰의 몸통과 증거인멸의 윗선을 밝히지 못한 2010년 1차 수사의 원흉은 고스란히 2차 수사로 이어졌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박윤해 부장검사)이 13일 내놓은 재수사 결과는 "일부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은 있었지만, 윗선의 개입은 없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물론 박영준(52)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개입, 그리고 이영호(48)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과 최종석(42) 전 청와대 행정관의 연루 혐의를 밝혀낸 것은 재수사의 분명한 성과이다.
문제는 사실상 '유일한' 성과라는 데 있다. 검찰은 전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이번 수사에서도 불법사찰의 몸통과 증거인멸의 윗선을 규명하지 못했다. 검사 14명을 포함해 모두 46명이 동원된 수사치고는 결과물이 초라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 1차 수사 한계는 이번에도 수사팀 발목 잡아
기본적인 한계는 뚜렷했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신설된 것은 지난 2008년 7월, 지금부터 4년 전이다.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에 대한 불법사찰 의혹이 불거지자 지원관실 직원들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물리적으로 파기하는 등 증거를 인멸한 것은 2년 전의 일이다.
통신사들은 가입자의 통화내역을 1년 치만 보관하도록 돼 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규정이지만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려던 검찰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 같은 한계가 검찰을 위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검찰이 이번에 새롭게 밝힌 관련자들의 혐의는 모두 1차 수사 이전에 발생한 일들이다. 바꿔 말하면 당시에도 수사 의지가 있었다면 충분히 규명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한계를 자초한 것은 바로 검찰이다.
◈ 수사 대상자들은 기상천외한 방어논리 펼쳐
이번 재수사에서 '윗선' 규명 성과가 미흡했던 데는 수사를 받는 당사자들의 기상천외한 방어논리나 묵비권 행사도 한몫을 했다.
이영호 전 비서관은 지난 3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자료 삭제에 관한 모든 문제의 몸통은 바로 나"라며 '자칭 몸통' 주장을 폈다. 이는 윗선으로 수사가 뻗어나가는 걸 차단하려는 의도로 인식됐다.
당시 이 전 비서관은 "자료 삭제를 지시했지만 증거인멸은 아니다",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2000만원을 줬지만 입막음용으로 준 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잘못은 했지만 처벌될 사안은 못된다'는 논리도 폈다. 이는 최근 검찰의 "청와대의 땅 매입대금 분담방식에 문제가 있어보이지만, 형사처벌 대상까지는 아니다"라는 '내곡동 사저부지' 의혹 수사 결과와 흡사하다.
박영준 전 차관은 지난 4월 총선을 전후해 자신에 대한 '대포폰 통화' 의혹이 증폭되자 "나는 하루에 100~200통씩 통화하는 사람이다. 누구와 통화하든 한두 번 통화한 게 문제가 되느냐"고 언론을 통해 밝힌 바 있다. 그는 "대포폰 통화는 2년 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는 기본 입장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밖에 이 전 비서관은 물론, 진경락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 등 핵심 피의자들이 청와대의 입막음 시도를 비롯한 각종 의혹에 대해 철저히 입을 다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2년 전 이미 한차례 수사를 당한 이들이 말맞추기를 비롯한 증거인멸에 나섰다면 검찰이 돌파구를 찾는 것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장진수 전 주무관에게 5000만원의 '관봉 다발'을 전달한 류충렬 전 국무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의 경우는 지난 4월 13일 2차 소환조사에서 “문제의 돈은 돌아가신 장인이 마련해준 것”이라는 진술로 검찰의 허를 찔렀다. 사망자를 소환조사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진상규명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 재수사팀은 한계에 더해 수사의지도 박약 이처럼 겹겹이 쌓인 한계에 더해 검찰은 스스로 박약한 수사의지를 내비쳤다. '관봉 5000만원'의 장본인으로 의심받는 장석명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검찰 출신 '민정 멤버' 김진모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단 몇 시간만 소환조사를 받고 혐의를 벗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개입 여부를 밝힐 핵심인물인 권재진 법무부장관은 아예 수사대상에서 제외됐다. 검찰은 정정길ㆍ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을 서면 조사하면서도 권 장관에게는 서면 질의서조차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도 받지 않은 권 장관은 스스로 “아는 내용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답변서를 검찰에 보냈다.
방송인 김미화씨나 조계종 고위 인사에 대해 드러난 '사찰 정황'과 관련한 조사도 수사종결을 앞둔 최근에야 전화나 이메일로 간단히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