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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대기업 빵집 철수? '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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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프랜차이즈 업체, 골목상권 장악
"나도 언제 접어야 할지 몰라"…한숨짓는 동네빵집 사장들"

 

지난 27일 오후 5시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골목길에 위치한 M제과점. 아이 얼굴만한 단팥빵과 촌스러운 장식의 버터크림 케이크가 눈길을 끈다.

조용한 가게를 지키며 TV를 보고 있던 가게 주인 정 모(64.여)씨에게 요즘 장사는 어떠냐고 묻자 씁쓸한 한숨이 돌아온다. "그냥 근근이 버텨나가는 수준이죠 뭐."

작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위치해 있어 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를 법도 하지만 가게 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정 씨 가게 주변에는 경찰서와 구청 등 관공서와 회사들이 위치하고 있고 지하철역도 가까워 유동인구가 많다.

하지만 목 좋은 도로변을 차지한 던킨도너츠와 파리바게트, 미스터도넛 등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들과 달리 정 씨 가게에는 파리만 날렸다.

정 씨는 고민을 하다 빵집을 접을 생각도 했다. 그녀는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주변에 많이 생겨 불안해서 가게를 내놓기도 했지만 안 나가더라"며 "물가는 오르는데 그나마 단골들을 놓칠까봐 빵값도 올리지 못하니 죽을 맛"이라고 털어놨다.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된 골목상권…생존경쟁 상상 이상

프랜차이즈 업체가 골목 상권을 틀어쥐는 동안 동네빵집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동네빵집 사장들이 전하는 '생존경쟁'은 가히 전쟁터 수준이었다.

구로구에서 R빵집을 운영하는 이강희(40) 사장은 한달 전 4억 5천만원을 대출받아 리모델링 공사를 끝냈다. 작업실이었던 아래층을 카페로 꾸며 요즘 유행하는 케이크 카페 형식으로 재오픈했다.

가게가 말끔해지자 손님이 늘어났다. 그러나 앞으로 최소한 5년 정도는 장사가 잘 돼야만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어 한편으로는 막막하다.

이씨는 "빵맛에는 자신이 있지만 가게 인테리어나 통신사 할인 등 대형업체들의 혜택에는 못 당하겠더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또 자신의 가게 앞에 프랜차이즈점을 내겠다며 대기업으로부터 빵집을 그만두고 프랜차이즈점을 하라는 은근한 '압박'도 받아봤다고 고백했다.

외관이나 여러가지 이벤트로 승부해야 하는 요즘이 지난 11년동안 우직하게 빵만 만들어왔던 이 씨에게는 시련의 시간이다. 영등포구에서 12년동안 Y빵집을 운영해 온 유성용 사장도 "2003년과 작년, 2번 리모델링을 해야 했다"면서 "변화를 줘야 손님을 끌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Y빵집의 경우 기대했던 지난 크리스마스 대목에 울상만 지어야 했다. 평소 12월에만 약 400개 이상의 케이크를 팔았는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주말까지 겹쳐 매출이 40% 이상 확 떨어졌다.

유씨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면 모자나 인형같은 사은품을 끼워 주는 프랜차이즈 업체와 우리가 상대가 되겠나"라며 경쟁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 분통을 터뜨렸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빵만드는 기술을 이용해 번 돈으로 자식들을 열심히 공부시켰다는 그는 "지금은 그럭저럭 장사가 되긴 하지만, 언젠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항상 갖고 있다"고 불안감을 드러냈다.

 

◈동네빵집 일할 사람 없어 곤란…시장으로 쫓겨난 예전 사장님들과 가격경쟁도

당장 매출이 떨어지는 것도 걱정이지만 '제과장인'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장들은 동네빵집의 인력난에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공장화되어 쉽게 빵을 만드는 프랜차이즈 업체가 일하기 편하다 보니 자연스레 제과 기술인들은 프랜차이즈 업체만 선호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씨는 "동네빵집에서 기술인으로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는데 힘들고 고생스럽기만 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이 힘들면 금방 나갈까봐 엄격한 서비스 교육은 꿈도 꿀 수 없다.

거리로 내몰리는 동네빵집 사장님들이 늘어나다 보니 없는 사람들끼리의 경쟁이 더 심해지는 웃지못할 상황도 생겼다. 갈 곳을 잃은 동네 빵집 사장님들이 '빵 3개 1,000원'을 내걸고 재래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동네 빵집보다도 낮은 가격으로 승부하다보니 결국 타격은 다시 동네빵집으로 돌아가게 돼 '생존을 위한 혈투'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푸근한 인상의 주인 아주머니가 끼워주던 '소보루빵 덤'의 추억은 조금이라도 더 남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경쟁 속에 사라져버렸다.

◈대기업, 지금은 빠진다지만…와닿지 않는 결정일 뿐

이러한 대형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골목길 점령 사례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비난에 직면한 일부 대기업들이 빵 사업 등 소상공 업종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호텔신라는 커피, 베이커리 전문점 '아티제'를 철수하겠다고 밝히는 등 일견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고 이에 다른 프랜차이즈 기업들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동네빵집 주인들에게 그런 선언은 와닿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R빵집 이 씨는 "재벌들이 안한다고 그런 빵집들이 없어지겠나"며 쓴웃음을 지었다. 10~20억원이 넘는 거금이 들어가는 빵집을 일반인이 할 수 있을리 없으니 결국 대기업이 언제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씨는 "대기업이 공중분해되지 않는 이상, 결국 똑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며 쓴 웃음만을 지었다.

Y빵집 사장 유씨도 "결국 조금 저러다 말 쇼처럼 보이기도 한다"며 프랜차이즈 업체들의 행보에 휘둘리는 신세에 대해 탄식했다.

사인펜으로 삐뚤빼뚤 쓴 빵 이름표, 그리고 조금씩 모양은 다르지만 정감있는 케이크와 파이들. 사장들의 한숨 속에 동네빵집 그 자체뿐 아니라 동네빵집이 갖고 있던 정(情)과 추억도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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