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0년 11월 3일 (수)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권오성 목사님
명진 스님 권오성 목사
▶정관용>네. 개신교와 불교, 불교와 개신교, 우리나라 양대 종교 사이의 진지한 대화의 시간 출발해 보겠습니다. 오늘 모신 두 분 먼저 소개해 드리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를 맡고 계신 권오성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
▷권오성>네. 안녕하세요.
▶정관용>네. 봉은사의 명진 스님, 어서 오십시오.
▷명진>네. 안녕하십니까.
▶정관용>두 분 인사 좀 나누시고.
▷권오성>반갑습니다.
▶정관용>자주 뵈셨죠, 두 분?
▷명진>네.
▶정관용>어디서 주로 자주 뵈셨어요?
▷명진>평양 갈 때도 한 번 같이 모시고 간 거 같고요.
▷권오성>네. 6.15 때.
▷명진>네. 그리고 지난번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 때도 기독교 대표로는 권 목사님께서 애도를 해주셨고 불교 쪽에서는 제가 축원을 했습니다.
▶정관용>네. 방송국에서 이렇게 함께 대화의 시간을 가지신 건 처음이시죠?
▷권오성>그렇죠. 네. 방송국에서는. 저를 아직 불교방송에서 불러 주신 적이 없어가지고 기독교방송에서 이렇게 한 번 모시게 됐습니다.
▶정관용>명진 스님 불교방송에서 다음에 한 번 이런 자리를...
▷명진>제가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정관용>명진 스님은 요새 거의 탤런트 급이 되셨어요.
▷명진>좋은 이미지로 탤런트 급이 돼야 되는데 맨날 싸우는 모습으로만 보여 진 거 같아서 참 거취가 힘듭니다.
▶정관용>봉은사의 직영 논란은 끝났습니까, 어떻게 됩니까?
▷명진>11월 13일에 제 임기가 끝납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인사문제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저희 총무원의 원장스님인 자승 스님한테 전부 위임하는 것으로 하고 일단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관용>중간에 임기 도중에 체제를 바꿔가지고 한마디로 말하면 명진 스님을 어떻게 몰아내 보려고 했던 거 아니었습니까?
▷명진>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고요. 직영을 해서 정말 종단을 잘 만들어보려고 그랬던 원장스님의 아주 간절한 생각이 저한테는 못 미치고 제가 오해를 해서 그런 분규 같은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내부적으로 보면 그렇고 그 과정에 ‘정치권에서 외압이 있었다, 없었다’, 이야기도 많고 또 최근에 이상훈 전 국방장관이 봉은사를 “좌파의 무슨 근원지” 이렇게 해서... 그건 고소해 놓은 상태시죠?
▷명진>네. 고소, 고발을 해놨죠.
명진, 부정직함과 종교편향성 때문에 후보시절부터 이명박 대통령 반대했었다▶정관용>계속 뭔가 이렇게 갈등이 있어요, 그죠? 봉은사 터가 참 좋은 터인데 왜 그렇게 갈등이 막...
▷명진>제 팔자가 좀 센 거 같습니다. 그리고 외압문제는 저는 MB정부 출범 때부터 정직한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정말 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신뢰받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그 나라가 올바른 길로 간다는 판단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이 갖고 있는 부도덕성 때문에 대통령이 되면 곤란하다는 입장을 몇 차례 공개적인 자리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외압으로 이렇게 가는 과정에 작용을 하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유추하게 됩니다.
▶정관용>종교인들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이나 특히 특정 정치인, 대통령에 대해서 긍정, 부정의 명시적 표현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명진>저도 역시 뭐 어떤 당을, 어떤 인물을 이렇게 폄하하거나 칭찬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제 도덕성의 문제,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부정, 부패, 비리, 소위 예기하면 위장전입, 탈세, 논문 표절, 병역기피 내지는 부동산투기, 이런 것들을 빈번하게 저지른 전과가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맞는 건가. 참 굉장히...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나아가서는 종교적으로 굉장히 편향적인 언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서울시를 봉헌하겠다든가. 청계천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든가. 공존의 원칙이 지켜져야 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지도자가 자기 종교 색깔을 그렇게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저로서는 올바른 지도, 끌고 나갈 수 없다고 봤습니다.
▶정관용>네. 그래서 명시적으로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그런 표현을 하셨고 ‘그런 것들이 바탕에 있지 않나’라고 보신다.
▷명진>그렇죠.
▶정관용>권오성 목사님, 지금 명진 스님께 제가 드린 질문의 답변을 들으시고 혹시 코멘트하실 게 있으세요?
▷권오성>예. 특별한 코멘트보다는 과연 종교와 정치, 종교와 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돼야 되느냐는 것은 늘 숙제인 거 같고요. 헌법상으로는 분명히 둘을 분리시켜 놓고 서로 독립시켜 놓고 침해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도 저희가 약간 얘기할 것이 있는 부분은 그럴 경우에 종교는 개인적, 사적 영역에 그치고 마는 거냐 하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죠. 권력을 지향하거나 혹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는 것은 늘 문제가 되는 거고요. 그러나 종교가 가지는, 기독교 같은 경우는 예언자적인 역할, 그 말은 과연 우리 시대의 정치나 정치권력이 기독교적인 우리 고백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거냐에 대한 판단을 하고 발언을 해야 된다고 하는 원칙은 다른 종교도 그런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조심스럽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구체적인 인물에 대해서 찬반논란을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 건 사실이고요.
▶정관용>거기에 대해서는 이제 종교인 개인의 특성이나 이런 게 발휘가 될 수 있는....
▷권오성>충분히 뭐 그런 것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고 안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기독교 표현대로 하면 예언자적인 역할로서의 종교의, 사회의 통합기능과 방향을 제시한다든지. 이런 건 언제든지 살아있어야 된다 하는 거죠.
▶정관용>시기에 따라서 시대의 상황에 따라서.
▷권오성>1970년대, 80년대의 민주화시기, 독재정권 시기의 교회의 발언, 예를 들어 종교의 발언, 그것은 그 나름대로 자기가 내야 되는 목소리를 우리 사회 속에서 낸 것이다. 분단시대에 통일을 위한 종교인들의 자기 자리가 의미하는 것, 그 사이를 끌어가는데 있어 의미하는 바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정관용>그런 의미에서 70~80년대의 상황과 다른 오늘의 상황에서는 종교인 개인이 정치적인 발언을 어디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종교계 내에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거 같아요. 불교계 내에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고 기독교계 내에서도 불만이 있을 수도 있고, 정치인들도 그것의 허용수준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대한 논란도 분명히 있는 거 같고. 그러한 바탕과 배경 위에서 명진 스님은 어쨌든 원하셨든, 원하지 않으셨든 여러 차례 지금 논란의 대상이 되셨는데 특히나 또 오늘 두 분을 모시게 된 게 이른바 ‘땅 밟기’ 동영상 논란, 파문, 이런 것이 하필 봉은사였단 말이에요. 봉은사에 꼭 국한된 건 아닙니다만 동영상 보셨어요?
▷명진>네. 봤습니다.
▶정관용>어떻든가요? 딱 보시니까.
명진, ‘땅 밟기’ 동영상 보고 ‘너무 안됐다’는 생각 들었다▷명진>너무 안 됐죠.
▶정관용>안 됐다.
▷명진>젊은.. 참 성도들이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성도들이 저 지경까지 돼야지 되는가. 무슨 마음을 먹고 저럴까. 저 사람들은 누가 저렇게 교육을 시켰을까. 이런 걸 바라보면서 참 마음이 안 됐다. 그러나 꾸짖어야 된다는 그런 판단을 하게 되었죠.
▶정관용>권 목사님도 보셨어요?
▷권오성>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정관용>얘기만 듣고 보도만?
▷권오성>보도내용을 통해서 접했던 거죠.
권오성, ‘땅 밟기’ 라는 용어는 처음 접했다. 목사로서 반성과 자책 느껴. ▶정관용>딱 접하고 첫 느낌이 어떠셨어요?
▷권오성>그 ‘땅 밟기’ 라는 용어를 저는 처음 들었습니다, 용어로 딱 단어화된 것은. 여호수아서라고 하는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땅에 처음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갈 때 아주 강력한 성이 하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라는 성이. 지금도 여리고 성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습니다, 여릿고 라고 하는. 들어갈 때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아라. 6일 동안 이렇게 돌고 7번째 되는 날은 사제가 앞에 서고 7번 돌고서는 나팔을 한번 크게 불면 그 성이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그 성이 무너졌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하는 얘기가 아마 ‘땅 밟기’의 근거라고 저는 봅니다. ‘땅 밟기’ 라는 게 그런 것일 테니까요. 사실은 거기서 강조점은, 가나안땅이라고 하는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서 기독교에서는 이상향 같은 것인데, 무기나 전투력 가지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능력 가운데 이루어지는 거라고 하는 그런 믿음에 관한 것이고 기독교 예식에 들어있다든지, 교리 속에 들어가 있다든지,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어떤 체계 속에 역사적인 사실로 이것이 남아있다는 건 아닌 거죠. 어떻게 보면 ‘어. 그런 걸 또 예식화해서 하나?’ 제가 목사로 평생을 살았습니다만 새로운 거다. 새로운 뭐라고 그럴까요, 이벤트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런 느낌을 저는 딱 받았고요. 그 다음에 과연 성서적인가. 저희들은 늘 성서가 기준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의문을 가졌고. 마지막으로 다종교, 그야말로 다문화사회 속에서 이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데 대한 목사로서의 반성이랄까, 자책이랄까, 죄송함도 함께 느꼈던 거죠. 제가 이 정도가 처음 기사를 봤을 때 느꼈던 거죠.
▶정관용>그리고 명진 스님한테 사과를 했습니다만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다.” 또 이런 말씀 하셨어요?
▷명진>최 목사님이 다음에 어제인가, 다시 또 저희 인터넷에 또 메시지를 올렸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고 그랬는데 학생들을 데리고 우리 절에 사과하러 오기 전에 했던 멘트가, 이제 저로서는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멘트가 나왔었어요. 그래서...
명진, 사과의 진정성에 의문이 들었다▶정관용>어떤 멘트였었죠?
▷명진>“학생들을 꾸짖을 생각이 없다.” 라고 말씀하신 거죠. 그런데 이제 (문제를 지적하니까) “사과하고 가고 난 뒤에는 헤어졌기 때문에 전혀 학생들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좀 “잘못 인식한 거다.”, 이런 말씀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분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는 것은 대다수의 기독교 신앙인들이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왜 들켰느냐.” “으르렁거리는 사자 앞에 뭐 하려고 가서 이렇게 기독교 망신을 줬느냐.” 사실 자체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들킨 것만 부끄러워하는 그런 여론들이 대다수였다는 거죠.
▶정관용>들킨 것이 아니라 동영상을 만들어서 널리 퍼뜨렸던 거 아닌가요?
▷명진>그렇죠. 그런데 왜 동영상을 만들어서 퍼뜨려가지고 보게 만들었느냐. 사실은 그 말이 맞는 것이 저희 봉은사에, 그렇지 않아도 일요일에도 저희 법당 앞이나 이런 데서 전단지를 돌립니다. 교회 나오라고.
▶정관용>절 마당 안에 들어와서.
▷명진 스님>그렇죠.
▶정관용>매주?
▷명진>매주는 아니고 그런 경우가 여러 차례 있는데 내보내기도 했고 또 그뿐만 아니고 ‘땅 밟기’를 여러 번 와서 하고 갔어요.
명진, 봉은사 마당 안에서도 교회 전단지를 돌린다. 이번 사건은 돌출사건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흐름 속에서 나온 문제라고 생각.▶정관용>동영상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명진>처음이고요. 그래서 그 ‘땅 밟기’ 하고 간 소감을 자기들이 인터넷에 올린 것을 저희들이 다 복사를 해가지고 가지고 있고 하는 것은 “거대한 용이 있어서 ‘땅 밟기’ 한 다음에 집에 왔더니 토하고 머리 아프더라.” 이런 내용으로 글을 올린 것도 있고. 해서 이게 단순하게 이번에 찬양인도자학교의 ‘땅 밟기’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기독교의 흐름 속에서 이 문제가 나왔다고 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좀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정관용>권 목사님, 한 말씀 하셔야 될 거 같아요. 한국 기독교의 흐름 속에서 보신다는 대요?
권오성, 한국기독교 안에 근본주의적인 흐름이 강화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다수는 아니다▷권오성>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죠. 퍼센티지로 보면 이게 몇 퍼센트 쯤 되는가 하는 눈으로 보면 저는 대다수라든지, 전반적인 흐름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처럼 기독교가 과거에 비해서 근본주의화 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 과거에 비해서 더 전투적이 되고 있다든지. 혹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랑, 화해 혹은 희생, 비움, 나눔, 섬김의 용어들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해나가는 기독교가 사실은 우리 기독교의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영적전쟁 혹은 개종, 싸움, 그래서 뭘 해야 된다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 중에 대다수의 기독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은 저는 내부에서 볼 때는 조금 아닐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조금 느낌은 다를 것 같아요. 한쪽으로는 긍정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수 라든지, 이런 면에서는 분명히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죠.
▶정관용>근본주의화 되고 전투화 된다는 분석을 하셨는데 그것이 긍정적라고 볼 순 없죠?
▷권오성>그렇죠.
▶정관용>왜 그렇다고 보세요?
▷권오성>우선은 기독교는 우리 역사 속에 뿌리 내린지 한 120년 정도 역사밖에 안 됩니다. 카톨릭까지 하면 220년이고. 불교는 한 1,600년, 1,700년 정도 돼서 이제 정통 종교화 됐고 우리 생활 속에 묻어있는 부분이 있고요. 기독교는 서구적 교회라든지, 미국교회라든지, 여러 가지 많은 영향들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서구적, 미국교회의 복음주의권이나 그런 전투적 근본주의 문화가 그냥 들어온 것이 하나 있다고 보고요. 또 하나는 종교의 열심주의라고 하는 것이 어느 종단이고 종파든 있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눈에 확 띄고 사건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극단적으로 가는 열심주의라는 것이, 예를 들면 해외 나가서 기독교 안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많은 사건들을 우리가 접했죠. 그런 경우들도 기독교 교회의 큰 주류라기보다는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한 쪽에 와 있는 것인데, 문제가 됐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고 할 순 없는 거죠. 지금 기독교 이전 것도. 그러나 그것을 중심에 놓기는 조금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명진, 한국기독교가 불교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으면 불교는 발도 못 붙였을 것
타종교에 대한 공격성이 기독교 전체의 흐름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 ▶정관용>명진 스님께서도 아까 흐름 속에서 본다는 게 없었던 일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셨지 그게 기독교의 주류라고 말씀하신 건 아니셨죠?
▷명진>저는 지금 그 문제를 목사님하고 좀 달리 보는데요. 한국 불교가 1,600년, 1,700년이 됐고 기독교가 이제 우리나라에 십자가가 들어온 것은 소서행장이 임진왜란 때 깃발 들고 들어 온 게 처음이었지만 실제로는 한 120년 정도 되는데 만약에 입장을 바꿔놓고 한국 기독교가 1,700년 된 기독교고 불교가 120년 전에 들어왔다면 불교는 발도 못 붙이고 쫓겨났을 거라는 거죠. 그런 배타성, 독선적인 그런 것, 오직 예수라는 이런 이름 속에 행해져 오면서 120년 된 기독교가 지금 불교를 핍박하는 형상이 돼 버렸습니다, 이제. 그러다보니까 저희 당하는 입장에서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기독교의 노골적인 공격성 같은 것들을 피부로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에.
▶정관용>기독교 주류 전체가 그렇다고 인식하세요?
▷명진>저는 일단 기독교 교리 자체, ‘나 외의 신은 믿지 마라’ 이런 것들, 또 여리고 성 아까 말씀하셨습니다만 자기들과 상관없는 이방인들, 이교도들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린이, 노인네 할 것 없이 다 전멸을 합니다. 그게 ‘땅 밟기’의 잔인성이거든요. 봉은사로 와서 ‘땅 밟기’를 했다는 얘기는 봉은사에 살고 있는 사람들 보고 다 죽으라는 얘기도 포함돼 있다고 보는 거죠. 자기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이교도라든가, 자기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저주에 가까울 정도의 그러한 행위들이 지금 한국기독교 전체 흐름 속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느냐. 왜냐하면 그런 일들이 저희 바로 앞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주 노골적으로 “강남에 있는 공산당 집합소가 봉은사다. 떡이나 얻어먹는 20만 신도가 있는 데다.” 아주 무식하고 천박하게 설교하는 동영상을 제가 봤습니다. 그럼 그런 대형교회들, 방송에 나와서 각론하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의 의식이 전부 그런데 그걸, 일부 정말 괜찮은 목사님이 많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체 흐름이 그렇게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정관용>권 목사님?
▷권오성>흐름에 관해서 지금 말씀처럼 한국교회가 굉장히 복잡다난하지요. 카톨릭교회 같은 경우는 위계가 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거기서도 조금 삐져나오는 게 있습니다만, 나름대로 한 흐름을 가지고 있고. 불교도 여러 종단이 있지만 조계종을 중심으로 해서 기본 흐름이 있지만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다양성을 기초로 해서 성립된 것이고. 또 그것이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같은 신앙적인 고백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다양하게. 교파만 해도 목사인 저도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혹은 다 외우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교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실 거고요. 거기에다가 특별히 개별교회에 대해서 어떤 지금 말씀처럼 어떤 설교 내용이나 이런 것들이 다양성을 넘어선 형태로 누구도 통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옳은 게 아니겠습니다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이것으로 가야 된다고 말하기 어려운 다양성들이. 저희들은 그걸 다양성 속의 교회로 오면 다양성 속의 일치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다양성이 우리 경제가 커가면서 대형교회가 되면서 대형교회가 가지는 사회적 보수성과 엉켜가지고 지금 말씀처럼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은 있지만 거듭 거기에 대한 다른 생각은 기독교를 지켜온 2,000년 역사의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서 그래도 기독교가 어느 사회, 노예제 사회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공산주의 사회까지 어느 사회가 있다 할지라도 그 사회 속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은 복음의 핵심이 있는데 그것은 배타적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억누르거나 이걸 통해서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아니다. 섬기고 낮은 자리에서 일하고. 한국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한국 기독교의 주류에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관계없이 그것은, 저는 그런 점에서는 조금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정관용>여기서 한 가지 더 상당히 민감한 주제이지만 역시 권 목사님께 말씀을 청해 듣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좀 아까 명진 스님께서 “교리에서부터”라고 표현하시면서 ‘나 이외의 신을 믿지 말라’ 라고 하는 표현은 곧 우상숭배 논의와 연결될 수 있는 주장이란 말이에요. 또 그것 때문에 불교계 쪽에서 굉장히 여러 차례 문제도 생기고 심지어 단군상 문제까지도 나오고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우리 현실에서. 바로 그런 부분을 그러면 권 목사님께서. 기독교 내부적으로 교리라고 하는 것을 따르다 보면 우상숭배 논리로 가게 되고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가는 게 아니냐, 지금 이제 명진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그런 의심을 지금 보이신 거란 말이에요. 말씀 주시면...
권오성, 어느 종교든 진리의 배타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요체는 진리의 배타성을 자기실천적으로 살아내는 것. ▷권오성 목사님>기독교를 포함해서 어떤 종교건 자기 종교가 가진 진리의 배타성이 있다고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기독교에서 지금 말씀하신 부분은 구원론에 관한 문제이죠. 우리가 지금 이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거고요. 불교는 전 모르겠습니다만 해탈이라는 것도 같이 이렇게 짝이 지어질지 모르겠어요. 번뇌하는 가운데 이걸 어떻게 벗어날 것이냐. 그런데 기독교의 신앙적 고백과 그것은 하나님이 개입된 상태, 절대타자가 개입된 상태에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고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고백을 하는 전제에서 기독교는 성립이 돼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면서 출발을 할 수는 없다. 물론 불교는 자기 내재적인 거기에서부터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겠죠. 우리는 그것이 아니죠. 그래서 이 기독교의 진리는 종교적 대화가 있다 할지라도 저는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신앙고백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대화도 사실은 같은 것을 추구하고 서로 협력하는 부분이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그걸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한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고 같이 살아갈 수 있고 협력할 수 있겠냐는 그 다음 방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지금 말씀처럼 우리가 가지는, 각자의 종교가 가지는, 기독교나 불교나 혹은 자기가 가진 진리의 배타성을 가지면서도 어떻게 공존하고 상생하고 화합하고 같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우리가 인정해야 되는 거죠.
▶정관용>그런 어떤 진리의 배타성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자기 신앙을 갖고 자기의 어떤 구원을 위해서 자기 실천으로서는 가능하지만 그걸 타인의 것을 우상이다 하는 식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행위, 그 점은 어떻게 보시나요?
▷권오성>그러니까 지금 말씀 중에서 우리가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인 거 같아요. 배타성을 어떻게 표현할 거냐. 그것이 과연 지금 아까 제가 전투적인 언어라든지, 전투적인 무슨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우상이라든지,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아니면 내가 가진 진리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그러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두 개의 길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거기에서 우리가 종교인으로서 선택한 혹은 기독교인으로서 선택하는 것은 후자의 길이다. 그것 때문에 사랑이 나오고 그것 때문에 감사가 나오고, 그것 때문에 같이 사는 공존이 나오고 상대방을 또 인정하고 힘을 합쳐나가고 구원은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도 같이 가는 것이거든요.
▶정관용>알겠습니다. 명진 스님, 어떻게 들으셨어요?
명진, 기독교가 지닐 수 있는 독단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명진>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의견을 달리하는데요. 기독교가 그 동안에 갖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물론 천주교, 카톨릭까지 포함해서 중세 카톨릭의 만행이라든가, 마녀사냥이라든가, 또 이단으로 몰아가지고 살육 같은 것도 있어 왔고 19세기에 남미라든가, 미국에 들어가면서 원주민들한테 했던 행위들이라든가. 이런 것들로 봐가지고서는 기독교가 정말 독선에 빠져서 자기중심적 사유를 하고 있다. 저는 누가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어떻게 얘기하시겠습니까?” 물으면 기독교는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의 죄의 씻음을 믿음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하셨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고 불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이렇게 얘기한다면 하나님은 또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을 만든 그 어떤 영적인 존재인 그 사람은 또 누가 만들었을까, 이런 끝 없는 물음의 종교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다. 그래서 무조건 믿기 때문에 때로는 그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 되어서 이단을 처단하거나 하는데 굉장히 공격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칼빈 같은 경우에는 성시화운동 하면서 이렇게 아주 잔인한 고문을 통해서 사람 죽이는 그런 장면 같은 것도 많이 나오거든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나는 지금 이단이 아닌가에 대한 성찰,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기독교 형태가 정말 옳은 것인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믿을만한 하나님인가에 대한 물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나는 기독교가 이런 독단에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고 봅니다.
▶정관용>오늘 두 분 모시고 아주 특별한 대화로 꾸며보겠다 했는데 일단 2부의 분위기는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는 토론의 형태로 가고 있습니다. 3부에서 어떻게 대화의 형태로 바뀔 수 있을지 잠깐 쉬었다가요. 뉴스 들으시고 35분에 다시 옵니다.
▶정관용>아주 특별한 대화, 그런데 2부 마무리 지으면서 제가 “지금 스튜디오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날카로운 토론의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요약하자면 권오성 목사께서는 최근의 일련의 이런 움직임들, 모습들을 ‘다양성 속의 일부다. 주류는 그렇지 않다’ 라고 표현하셨고 명진 스님께서는 ‘그게 아니다. 큰 흐름과 주류가 그런 것 같다.’ 라고 하셨고 그게 교리로까지 가서 “기독교의 어떤 배타적 교리, 그 자체가 그런 것 아니냐” 라는 명진 스님의 주장에 대해서 권 목사님께서 “그 교리의 배타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실천적으로 실현하느냐 아니면 타 종교에 대한 폭력적 개입과 같은 형태로 실천하느냐. 여기서 기독교가 말하는 메시지는 자기실천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셨고 거기에 대해서 명진 스님께서는 여러 역사의 사례를 드시면서 “과연 그러냐.” 라는 문제제기를 하셨단 말이죠. 물론 명진 스님께서 역사를 보시고 한국의 흐름을 보시면서 그런 말씀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만 기독교가 지향하는 바가 그런 것이라는 권 목사님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명진, ‘우상’을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재해석하지 않는 한 배타성 탈피하기 어려울 것▷명진>저는 기독교가 가장 배타적인 이유가 우상숭배에 있다고 보거든요.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봅니다. 부처상을 모셔놓고 절을 하고 하는 것을 이제 우상숭배로 보는데 저는 형식의 틀 속에서의 우상숭배라면 그건 십자가도 마찬가지고 또 성당에 그려져 있는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우상숭배라는 것이 그러한 형식에 대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탐욕과 욕망들, 어리석은 생각들, 결국 그런 어리석은 것으로부터 오는 상, 만들어지는 그런 모습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가르침으로 기독교가 재해석을 해야 되지. 밖에 모셔져 있는 어떤 상을 향해서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비판하다 보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나 다른 이런 입장을 가진 쪽을 수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의 우상을 무너뜨리라는 얘기지. 다른 종교의 상을 무너뜨리고 목을 자르라는 얘기는 전혀 아니거든요. 성경의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관용>성경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조금 아까 권오성 목사께서 주장하신, 말씀하신 바는 즉, 구원받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이 절대자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함께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 진리의 배타성은 기독교의 특징이다. 그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나의 신앙이고 나의 실천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고 그것을 타 종교에 대한 폭력적 개입이나 배타성으로 가서는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같이 일맥상통하는 거 아닌가요, 거기까지는?
▷명진>그런데 지금 한국 기독교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편협한 그런 관계 같은 것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가. 불교가 저희 스님들이나 불교신자들이 교회에 가서 무너지라거나 예배를 보거나 교회 앞에 가서 우리 절에 오라거나 이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정관용>간간이 있기는 있죠, 그래도?
▷명진>그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보고.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느꼈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 중노릇 할 때도 절에 와서 바로 절 마당에 와서 박수치고 찬송가 부르고 그럽니다. 일부러 더 그러는 거 같습니다. 그것이 나는 바로 지금 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일부의 흐름이라고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전체적으로 기독교 쪽의 배타성, 불교 그러면 우상숭배로 보는 건데 사실은 불교만큼....
▶정관용>자기실천으로서의 그런 교리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소수인인 거 같다. 이렇게 보세요?
▷명진>소수일 수도 있고요. 저는 기독교 그러면 일단은 ‘나 외의 신을 믿지 말라는 하나님’, 오직 예수, 하나님의 교리만 옳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내적인 성찰과 삶을 통해서 남들이 “아, 기독교인들, 그래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훌륭하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서 저절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어야지. 남의 절에 가서 부처님 목을 자른다든가. ‘땅 밟기’를 한다든가. 이런 행위 자체가 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나 그리스도의 간 길하고는, 예수그리스도의 살아온 행적은 전혀 지금 한국 교회하고는 안 맞습니다.
▶정관용>권오성 목사님께서 여러 번 설명하셨음에도 명진 스님께서는 “오늘날 벌어지는 현실을 봐라.” 결국 그 말씀이시거든요.
▷권오성>그러니까 저는 ‘이게 서 있는 자리가 확실히 다르구나’, 이런 생각을 일단 말씀을 드리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만나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나 제가 이렇게 만나는 목사님들의 경우에 거의 대다수가 “진짜 그런 일이 있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인데 그것을 당하는 자리에 있는 분으로 보면 그게 다 일체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있고요. 우리 같은 경우에 예를 들어서 타 종교와의 대화, 이렇게 표현하기보다는 이웃종교와의 대화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종교와 종단을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혹은 공존하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종교로서 인정하고 출발하는 경우와 타 종교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굉장히 차이가 있는데 지금 말씀처럼 일상적으로 당한다고 그럴까, 혹은 내가 안 당하더라도 옛날에 당한 경험들이 다 이게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전에는 저 어릴 때 식당 같은 데에 탁발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어요”, 딱 닫고 소리 지르고 소금뿌리고 이런 경우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안 당한 분들도 아마 그건 당연히 기독교는 다 그런다 생각하실 텐데 안 그런 경우도 많이 있죠. 우리가 선 자리가 다르고 경험이 달라서 이렇구나, 저는 그런 생각은 드네요. 말씀 들으면서.
▶정관용>예. 선 자리 때문이다. 다수의 기독교인들과 목사님들은 그런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어떻게 보세요?
명진,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명진 스님>저는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한 이해를 좀 넓혀가야 된다고 보거든요. 저희들은 그렇습니다. 금부처는 용광로를 못 견디고 진흙부처는 물에 들어가면 녹아버리고 목불은 불에 들어가면 타버리니 어떤 것이 참부처냐. 그리고 어느 스님이 공부를 하다가 경전을 불에 태워버립니다. 이건 화장실에 가서 휴지로 쓸 종이지 내가 볼 게 아니구나. 이런 대목도 저희들 조사 어록에 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성스러움에 대한 아니면 거룩한 진리에 대한 도그마에 안 빠지게 하기 위한 아주 파격적인 행위로 보거든요. 그것들이 우상을 타파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도 부정하면서 새로운 진리를 향해 찾아나가는 그런 구도자나 아니면 그런 수행자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조금만 이해를 하거나 공부를 하면 우상숭배라는 말은 절대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전혀 불교에 대한 공부를 안 한다는 얘기입니다. 1,700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게 뭘 가르치고 있는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저는 성경, 구약, 신약, 다 읽었고 또 19살 때까지는 교회를 다녔고. 저희 계모님은 미국에 계십니다, 어머님이. 지금 권사로 계십니다. 영락교회를 유치부부터 다녔어요, 제가. 그래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정관용>권오성 목사님은 불교에 대해서 좀 아시는 것 같으세요, 어떠세요?
▷명진>아시니까 저하고 그렇게 얘기를 하시겠죠.
▶정관용>그러니까 훨씬 많은 분들이 사실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명진 스님 보시기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명진>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차제에 얘기 나온 김에 권오성 목사님 보시는 불교는 어떤 건지. 명진 스님이 보시는 기독교는 어떤 건지. 한 번 얘기해 보시면 어떨까요?
▷권오성>불교를 잘 모르고요. 느낌에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제가 목사고 뭐 협의회 같은 데 있으니까 교회를 방문하면 목사님 만날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경우는 대개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 외에는 업무라고 그럴까요. 일상 일 때문에 만나는 경우도 많은데요. 절에 가는 기회도 종종 있습니다. 최근에 간 절이 해인사, 지난 주에는 갑사를 다녀왔는데요. 무슨 업무를 보러 간 것도 아니고요. 좀 쉰다든지, 가족이 이렇게 간다고 그럴 때 절에 간다는 게, 가서 둘러보고 이렇게 산 속에 대개 다 있기 때문에요. 갈 때 느낌이 또 있습니다. 교회 갈 때 느낌, 도심에 있는 교회 갈 때 느낌과 다르죠.
▶정관용>확실히 다르죠.
▷권오성 목사님>다른 게 있죠.
권오성, 교리는 우리를 나누고 실천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불교-기독교 간의 대화와 함께 하는 실천이 필요.▶정관용>1,700년의 역사라고 하는 게... 경치 제일 좋은 데는 꼭 절이 있어요.
▷권오성>그리고 우리 심성 속에 있는, 이게 사찰에 대한 뭐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불교 자체에 대한 교리라든가 이런 건 저는 기독교 집안으로 목사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크게 접할 일은 없었지만 종교간 대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같은 경우에는 전에는 ‘교회일치위원회’가 있었는데 4년 전부터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나 기독교 내에서도 다른 종교와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7대 종단이 하는 종교인평화회의에서 활동을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2년 전인가요, 불교와 관계해서 정부와 굉장히 불편할 때가 있었죠. 한 단어로 뭐라고 얘기를 하죠? 종교편향이 있을 때 지관스님을 찾아갔고 또 가서 만나서 우리 종교일치대화위원장과 함께 만나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지만 정부와 불교와의 관계지,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는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고. 그때 우리가 제안한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 우리가 공식적 대화라고 하는 것이 지금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1 대 1 대화, 종교인평화회의처럼 이렇게 전체 종단이 모이는 거 말고.
▶정관용>7대 종단 전체가 모이지 1 대 1은 없다.
▷권오성>1 대 1 대화는 아마 한국기독교교수협의회와 한국교수불자협의회 사이에 있는 학문적 대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 자체로 학문으로서의 의미가 있지 어떻게 보면 책임 있는 입장을 가지고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실생활 속에서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떨 때는 교리 문제를 놓고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겠다. 제가 그때 그런 제안도 했었고요. 불교에 대해서 어떠한 인상을 갖고 있냐, 그런 질문에서 나왔습니다만 사실은 잘 모르지만 기본적인 교리와 믿음의 체계는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정도는 그냥 이해하는 수준이지요. 중요한 것은 저희가 그런 얘기가 있었는데 ‘교리는 우리를 나누고 실천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불교와의 경험 속에서는요, 지금까지는 교리나 이런 걸 가지고 논란을 벌이기보다는 실천현장에서 많이 만나죠. 남북문제, 통일문제 어떻게 할 거냐. 자연 환경문제, 4대강 얘기도 나옵니다만 저희가 예언자적인 활동, 정치적 권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할 거냐에 대해서는 그런 실천현장에서는 많이 만나고 그런 속에서는 ‘같이 가는 거구나.’ 또 어떤 면은 그 안에서 보수적인 면도 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그런 경험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 거죠.
▶정관용>실천해보면 비슷하더라. 비슷한 게 많더라.
▷권오성>실천의 과제에서는 같은 경우들이 많죠.
▶정관용>명진 스님?
명진, 사회적 실천에서는 불교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기독교가 이룩했다▷명진>실천의 부분에 대해서는 비슷하다고 얘기할 수 없고요. 그 동안의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와서 빈민구제라든가, 또 약자의 편에 서가지고 권력과 싸우는데 가장 앞장섰었고 또 복지 부분, 소외된 계층에 대해서 또 아니면 사회로부터의 버림받은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라든가, 지원이라든가, 이런 부분으로는 저희 불교가 거의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을 불교가 배우고 받아들이고 따라 하고 ‘참 한국 기독교를 선생으로 모시고 그런 공부를 우리가 해야지 된다’, 이런 입장으로 저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또 많은 희생이 따랐었고. 그 동안에 70년대, 80년대 독재권력 앞에 서 있었을 때는 목사님들 아니었다면 지금의 어떤 민주화의 이런 세상이 왔을까 할 정도로 많은 희생을 통해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한테 참 희망을 심어줬기 때문에 그런 자세들, 그런 태도들이 결국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예수님 앞으로 오게 만드는 그런 역동성을 가진 일이 아닌가. 다른 종교를 공격하고 다른 종교를 폄훼하고 다른 종교가 하는 일은 막고 하기보다는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남들로부터 존경받고 남들로부터 신뢰받는 그런 행위와 언어와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든다면 같이 공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거죠.
▶정관용>기독교다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딱 구분하시는군요.
▷명진>그렇게 돼야지 되죠.
▶정관용>권 목사님?
▷권오성 목사님>실제로 화계사에 가면 그 근처에 소망교회라는 교회가 있고요, 네거리에. 건너편에 수유성당이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함께 모여가지고 한신대학교 운동장에서 모금을 하고 바자회를 하고 그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종단으로 보던지 교리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명히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실천을 통해서 함께 봉사하는 일들도 저는 굉장히 앞으로 그런 걸 살려나가야 된다고 보고요. 지금 경동교회도 그런 노력들을 하고 있고. 그래서 사실 어떤 경우들에는 종교 간의 전쟁도 있고 테러도 전 세계적으로 있는데 종교 자체가 이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거기에는 사회적인 모순이 종교의 외피를 쓰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경우가 많죠.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라든지.
▶정관용>인종갈등이 또 껴있기도 하고.
▷권오성>교리가 문제되는 경우라기보다는 사실은 다른 사회적 모순이 서로 대표하는 외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들이 많은데, 자기 교리가 지니고 있는 또는 실천에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걸 통해서 한국사회만큼 종교 간에 그래도 평화로운 공존을 하는 경우도 없다고 봅니다. 총을 들고 싸운다든지, 테러나 이런 걸 생각하면 말이죠. 이것도 선 자리가 달라서 이렇게 표현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면 책임 있는 종교적 지도자들 간의 계속적인 대화도 필요하고요. 또 각 지역별로 이렇게 구체적인 협력의 실천 작업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고. 그런 노력들이 좀... 또 학문적으로 논의해서 뭐가 같고 뭐는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인지 그런 것도 정체성을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보고요.
▶정관용>어제 날짜인가.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하셨어요. 일부 개신교계의 불교폄하와 훼불 사건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 빈번해지고 있다. 이런 전제에 의해서 여러 가지 종교 평화와 갈등방지를 위한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그런 성명이었는데요. 거기 보면 7대 종단 종교계 지도자들이 종교인 평화선언, 종교인 윤리규범, 이런 걸 마련할 것, 이런 요구도 있고. 정부나 국회를 향해서는 가칭 종교평화 윤리법 같은 걸 제정할 것, 이런 등등의 요구까지 포함이 돼 있거든요. 어떤 배경에서 이런 성명까지 나왔는지. 또 이런 법을 만든다거나 이런 게 사실 그만큼 중요한 건지. 이건 명진 스님, 어떻게 보세요? 불교종단협의회에서 나왔기 때문에....
▷명진>‘땅 밟기’라든가 이런 현상 때문에 갑자기 그런 성명서가 나온 걸로 아는데요. 저는 그런 법이나 제도로써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이게 화해와 용서가 되고 서로 손을 잡아야 된다고 본다면 저는 아까 성경해석 문제를 말씀드렸는데 무소부재 하시다고 했거든요. 무소불위하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제 한번 묻고 싶은 것은 과연 법당에는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안 계신 곳이 없다고 그랬다면 어느 곳이든지 다 하나님이 주류하고 임하신다. 그러면 저희 불교 쪽으로 봤을 때는 두두물물이 다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표현하는 대목들이 많이 나옵니다. 같이 만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린 성경의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지금 너무 문자주의 같은 데 빠져가지고 구약에 나오는 여리고 성을 밟음으로써 하나님의 땅을 만들었다든가. 이걸 고집해 가지고 결국은 뭐 파탄을 만들어간다든가 이런 건데, 우리 권오성 목사님이 길을 열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정관용>거듭 지금 재해석, 재해석 그러시는데 권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일부 재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이런 말씀이시고.
▷권오성>제가 구체적으로 일부라는 표현은 안 썼습니다만 그런 의미로 말씀을 드렸고 같은 질문이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땅, 한반도, 대한민국,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일하셨을까. 1884년에 선교사들 뒤꽁무니를 따라서 들어오신 하나님이실까. 그 전에는 하나님이 역사 안 하셨을까. 그 전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저는 고백을 하죠. 왜냐하면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일하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시고 뭔가 만들어가고 계시는 분이니까. 섭리하시는 분이니까요. 어떤 형태로 섭리했느냐. 선교사 들어온 이후로는 교회를 통해서 저희는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질문들은 저희가 많이 합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라든지 그런 고백들을 하는데. 어떤 형태로건 지금 종교적인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지금 시점에서, 그러나 저희들이 참 조심하는 거는요, ‘그래. 불당에도 하나님이 있다. 어떻게 할 거냐?’, 이게 오히려 교만한 자세라고 하는 거죠. 그런 역사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고백하더라도.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지금 상태에서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다른 것은 무엇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갈등의 치유자가 돼야 되는 것이고 오히려 갈등의 당사자가 되선 안 된다. 이걸 어떻게 우리가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거냐.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저는 있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고등종교라고 할까요. 어떤 종교든지 종교가 나름대로 자기 성립되는 과정 속에서 공격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성립되지는 않았다고 보고요. 그래서 그런 접점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관용>오늘 같이만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사실 공통분모나 접점 찾기는 사실 쉬운 일이거든요. 자꾸 차이를 발견하고 갈등할 지점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또 문제이기도 한 것이죠. 오늘 2부 토론의 막바지까지는 그 교리에 관한 해석 가지고서 서로 긴장감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현실에 벌어지는 모습, 좋은 모습도 있고 나쁜 모습도 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점들을 더 넓혀가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게 대화로 연결돼야 한다. 이렇게만 좀 된다면 사실은 말씀하신 것처럼 종교가 평화와 갈등치유의 수단이 되고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렇게 만들어가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차제에 그냥 한 달에 한 번씩 두 분 계속 만나실래요, 저희 방송에서?
▷명진>저는 아주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권오성 목사님>불러주시는 것에 달린 거죠.
▶정관용>가능한 한 저희가 자주 두 분 모셔서 대화를 이끌어 가보도록 노력을 하겠고요. 한 20초 정도씩 명진 스님께서는 기독교 발전을 축원해 주시고 권 목사님께서는 불교 발전을 좀 축원해 주시고 오늘 끝내야 되겠습니다.
명진,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하길▷명진 스님>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항상 약자와 소외된 사람 편에 서서 젊음을 바치면서 세상을 참 이렇게 뜨셨던 청년 예수의 정신이 한국 땅에서 살아가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그런 거룩한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관용>네. 권 목사님?
권오성, 불교가 지닌 포용성 속에서 서로 협력하길▷권오성>불교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포용하는 것 속에, 교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우리가 이런 포용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서로 지키면서 어떻게 이것이 같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함께 노력해 나가면 우리사회가 굉장히 중요한 종교적인 힘을 통해서 좀 더 발전하고 도약할 수 있는 당사자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정관용>네. 저는 오늘 두 분 말씀 들으면서 저 스스로가 많이 배운 거 같습니다. 대화하고 토론하고 이런 걸 제가 쭉 진행하는 입장이지만 나도 아직도 배울 게 많구나 하는. 두 분 큰 어르신 스승님들께 배웠습니다. 이렇게 서로 배워가는 그런 대화의 자리가 점점 더 많아지길 기대하고요. 좋은 말씀 주신 명진 스님, 권오성 목사님, 두 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명진 스님> 네. 감사합니다.
▷권오성 목사님>감사합니다.
▶정관용>시사자키 오늘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6시에 다시 오죠.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