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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경인년 새해가 밝았지만, 금융 위기 여파와 경기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어두운 터널 속을 걷고 있는 이들이 많다. CBS에서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갔다가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들을 만나 '희망'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20일은 20여 년 동안의 거리생활을 청산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노숙인들을 도우며 이제는 '거리의 천사'로 거듭난 한 자활 근로자의 사연을 소개한다. [편집자주]매일 오후 6시,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대에 사상철(39) 씨는 집을 나선다. 노숙인들이 모여 있는 서울역에 가기 위해서다.
사 씨는 서울역 앞 '다시서기 진료소'에서 3년째 일하는 자활 근로자이다. 야간에 여직원들만 있는 진료소에서 간혹 일어날지도 모를 노숙인들의 횡포를 사전에 막는 것이 주된 임무다.
진료소에서 행색이 초라하고 거동이 불편한 노숙인들의 몸을 직접 씻겨주기도 한다. 지난해 10월에는 욕창으로 아예 길바닥에 나앉은 50대 노숙인을 자신의 집에 들이기도 했다.
밤 10시가 되면 사 씨의 발걸음은 서울역 앞 '상담보호센터'로 향한다. 이곳에서 사 씨는 혹한에 떠는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씩을 대접한다. 깊은 밤 한파를 누그러뜨릴 유일한 수단이기에 얼어붙었던 노숙인들의 마음도 동시에 녹아내리는 시간이다.
자정이 넘도록 사 씨는 서울역 지하도 등지를 순찰하며 동사 위험에 처한 노숙인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새벽 1~2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보람이 앞선다.
"추운 겨울, 거리에서 신문지 한 장으로 버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거리에 계신 분들을 더 돕고 싶다"는 사 씨는 거리에서 다시 마주친 노숙인이 정돈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특히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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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때부터 거리생활…'가슴아픈 기억'사 씨가 어려운 처지의 노숙인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8년. 그 전까지는 사 씨도 세상을 등진 채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인'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사 씨는 양아버지의 술버릇에 못 이겨 9살 때 무작정 상경 길에 올랐다. 단돈 몇 만원을 손에 쥐고 도착한 곳은 서울역이었다. 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사 씨는 잦은 폭력 사건에 휘말려 보육시설을 떠돌다 14살 때 마침내 구두 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공장장과 다툰 친구를 따라 회사를 나온 뒤로는 목포로 가 어부가 됐다.
'떠돌이' 청년에게 신분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십 수 년 간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다보니 호적에는 실종된 사람으로 기록돼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을 다시 찾고 결혼에 성공해 4년 간 과일가게를 운영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했지만 도박 빚 때문에 아내와 갈라선 뒤로 다시 거리로 나섰다. 행선지는 당연히 서울역이었다.
"그냥 서울역이 편했어요. 나처럼 갇혀서 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많으니까…"
여름에는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쪽잠을 자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려고 박스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거리가 익숙해질수록 희망은 사라졌다.
◈인문학 강의 듣고 "살아보자" 다짐, 이제는 '거리의 천사'로지난 2008년 사 씨는 노숙인다시서기센터의 권유로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했지만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사 씨는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고 한다.
우선 사 씨는 자활 근로를 신청해 월세방을 마련했다. 이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노숙인들을 돕기 시작했다.
사정이 딱한 노숙인 3명을 월세방에 들여 같이 생활하는 것도 모자라 매일 아침 거동이 불편한 노숙인에게 목욕을 시켜주고 진료소까지 데려다주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이처럼 180도 달라진 사 씨의 모습을 두고 '거리의 천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김민수(29)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사회복지사는 "사 씨가 매일 진료소와 센터에 나와 일을 도와주는 것이 작지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어려운 형편에 다른 노숙인들까지 돌보는 사 씨는 '거리의 천사'나 마찬가지"라고 평했다.
이런 사 씨에게 올해 들어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바로 과일 장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
과일가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은 밑천으로나마 과일 장사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 사 씨의 작은 바람이다.
사 씨는 "자활근로로 한 달에 39만 원을 버는데, 올해부터는 조금씩 돈을 모아 장사 밑천을 마련할 것"이라며 환하게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