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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환자들과 악수하던 육영수 여사 못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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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2-2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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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한국의 찰리 채플린' 재담 명인 김뻑국

‘민속계의 어릿광대’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리며 7,80년대 많은 인기를 얻었던 재담 명인 김뻑국 씨. 혹시, 이 분의 얼굴은 기억을 못하시더라도 ‘김뻑국’이란 독특한 이름은 아마 다 기억하실 겁니다.

1960년대 초, 김뻑국 씨가 방송 출연을 막 시작했을 때, 뻐꾸기 소리 흉내를 아주 잘 냈다는군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뻐꾹, 뻐꾹’…. 김뻑국으로 부른 게,본명인 김진환보다 더 유명한 그의 이름이 됐습니다.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난 김뻑국 씨는 일본 원자폭탄 투하의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머슴살이와 왕따라는 악몽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다,17살에 삶의 희망이 된 ‘소리’를 만나게 되는데요.

47년 예술인생…. 재담 명인 김뻑국 씨를 2월 21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뻐꾸기 명인 ‘김뻑국’ 예인인생 47년

 

▶ 굉장히 동안이신데 건강은 어떠세요?

건강했었는데 8년 전에 중풍에 걸려서 쓰러진 적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세상을 두 번 사는 거예요. 고대병원에서 27일을 있었는데 산소 호흡기를 14일 동안 끼고 있었어요. 3일 있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다음 날 살아나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있어요.

▶ 요즘 방송출연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뒤로 물러앉고 젊은 사람들이 해야죠. 대신 공연이 많이 있어요. 복지회관에서 1년에 60회 이상 하니까요. 제자들이 착하니까 따라다니면서 하는 거지, 혼자서 1시간 20분을 하려면 지금은 힘들거든요. 제자들이 곁에서 도와주고 그 덕분에 건강해요.

▶ 언제 들어도 선생님의 이름은 친숙하고 독특해요. ‘김뻑국’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셨어요?

1950년대 KBS에 강정수 선생님이라고 계셨어요. 강정수씨가 경기민요로 유명하신 이창배 선생님 학원에 자주 오셨어요. 거기서 만났는데 방송국에서 먹을 길이 탄생했다고, 내 심부름만 잘해주면 밥 먹여주마, 이러는 거예요. 그때는 차가 있었겠어요, 뭐가 있었겠어요? 짐 가져오라고 하면 얼른 뛰어가고 새소리, 파도소리 같은 거 연구해 보라고 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연구만 잘 하면 먹고 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새소리 연구하면서 목소리 효과음을 담당했는데 나중에 KBS에 흑백 TV가 처음 생길 때 용케 그쪽에 픽업이 되어서 삼국통일 같은 연속극에 탤런트로 1년 8개월 동안 활동했어요. 새소리 효과음을 낼 때는 종달새는 풀피리로 하고 뻐꾸기는 손으로 했어요. 제자들과 같이 강원도 산에서 뻐꾸기 소리를 내면 뻐꾸기가 제 머리 위를 날아다녀요. 뻐꾸기가 새벽에 울 때, 한 낮에 울 때 우는 소리가 다 달라서 이걸 연구하며 살아서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 왕따 설움에 기차타고 무작정 상경

▶ 고향이 어디세요?

1937년 일본의 큐슈지방에서 태어났어요. 저희 아버지가 공부를 좀 하시는 분이셨어요. 10살 때 한국에 가자고 하셔서 왔는데 학교에 가니까 일본말밖에 모른다고 애들이 쫓아다니고 때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14살 때 나는 다시 일본으로 간다고 기차타고 도망을 갔는데 종일 가서 내린 역이 서울역이에요.

거기서 동대문까지 전차가 있었는데 돈 안 내고 몰래 타고 동대문까지 와서 우두커니 있었더니 잘 생긴 양반이 와서 “배고프지?” 하는 거예요. 이분이 국악인 이충선 선생님이었는데 엄마아빠도 없다고 말 못하는 벙어리 흉내를 냈더니 나를 따라오래요. 간 곳이 뚝섬이었는데 근처에 있는 해장국집에 가서 해장국을 사주더라고요. 그때는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그걸 먹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 해장국집에서 물 길어주고 심부름해주면서 1년 8개월을 있었어요. 그러다가 6.25사변이 났죠. 당시에 한강에 모래가 엄청 쌓여있었어요. 깊은 곳은 깊지만 얕은 곳은 모래가 많아서 거길 건너 인천으로 갔는데 전화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 가족한테 연락도 못하고 혼자 피난을 갔었어요.

▶ 6.25 때 머슴으로 사시기도 하셨다고요?

6.25 때 피난 가서 16살에 용인군 남사면에서 남의 집을 살았어요. 그때 부잣집에는 상일꾼, 중일꾼, 하일꾼이 있었는데 저는 심부름꾼인 하일꾼이었죠. 1년에 옷 한 벌 해주고 쌀 반가마니 받고 살았는데 거기서 아무리 있어봐야 서울만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남의 집을 살다가 도망을 갔죠.

▶ 부모님과 언제 다시 만나신 거예요?

객지에 나와서 10년 후에 연락이 되었어요. 하지만 시골에 가봐야 별일 없으니까 이거나 열심히 해야겠다 싶었던 거죠.

▶ 소리를 배우게 된 계기는 어떤 거였나요?

지금은 탑골공원인데 옛날에는 파고다 공원이라고 했었어요. 거기서 이북에서 나온 최경명 선생이라고 장님타령, 배뱅이를 잘하던 양반이 있었어요. 이 양반하고 같이 있으면 점심 때우고 저녁에 자장면이랑 떡도 사주니까 따라다녔는데 최경명 선생 흉내만 내면 먹고 살겠다 싶어서 배우다가 인천으로 왔는데 나를 떼어놓고 가더라고요.그래서 인천의 조백운 선생한테 배우는데 제 동기가 명창 전숙희 씨인데 이 양반하고 같이 하다가 배뱅이굿의 이은관 씨가 와서 하는 걸 보고 저 양반 따라가야겠다 싶어서 나왔죠.

◇ 신명놀이 한 판에 받은 백지수표

▶ 당시에 이은관 선생님은 스타셨잖아요?

어쨌든 잘 생긴 양반이 “왔구나~~~~”를 길게 뽑으면 박수 3번 이상을 받았어요. 정말 잘하기도 했고, 역시 국보에요. 이분을 따라다니던 어느 날, 초대를 받았다고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갔더니 종로의 한 유명한 요정집이에요. 국회의원이나 재벌들만 가는 곳인데 그때 누가 초청을 했는가 하면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이후락 씨였어요.

이은관 선생님이 자네 한복 있느냐고, 없다고 했더니 빌려주겠다고 해서 두루마기를 빌려 입었는데 커서 소매는 접고 깃은 배꼽까지 내려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다들 노래하면서 노는데 이후락 씨가 너는 뭐하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너도 왔으면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는 거죠. 기회는 이때가 싶어서 노래를 했어요.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나~~” 바로 그거라고 무릎을 탁 치더니 한 번 더하라고 해서 한 번 더 노래를 불렀어요.

옆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예뻐서 오라고 한 게 아니니 노래나 하라고 해서 “봄이 왔네 봄이 왔네, 이 강산 삼천리 통일이 왔네~~”를 했더니 무릎을 치더니 이런 놈 세 놈만 있으면 남북통일을 시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책을 가져오게 해서 전부 다 출연료를 쓰라는 거예요. 거기에 서수남, 하청일 씨는 6천원 적고 3천원 적는 사람도 있고, 그게 백지수표인줄 나는 몰랐어요.

옆에 있는 유명한 양반이 1백만 원 쓰는 걸 보고 그렇게 쓰는 줄 알고 나도 1백만 원을 적었어요. 그랬더니 이후락 씨가 보고 껄껄 웃고 다른 사람은 나가면 돈 주라고 하고, 나하고 유명한 양반 것은 싸인을 하더라고요. 종이조각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가는데 경호원이 뒤에다 대고 그거 조심하라고, 돈이라고 알려줘요. 이거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옛날 남대문 앞에 시경이 있었는데 거기 가서 찾으래요. 안 믿었지만 나중에 가져갔더니 은행장을 비롯해서 전부 일어서서 마중을 해요.

이후락 씨를 잘 아느냐고 물어보기에 조금 안다고 했죠. 그랬더니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다 찾을 거냐고, 그래서 10만원만 찾고 나머지는 예금을 했어요. 10만원을 받자마자 당시에 제일모직에서 나온 노블 텍스라는 양복이 있었어요. 그걸 3600원에 한 벌 맞추고 남대문에 들어가서 해군단화 반짝반짝 윤나는 거 하나 사고 와이셔츠 하나 사서 입고 학원에 갔더니 이은관 씨가 난리가 났어요. 네가 무슨 스타냐고.그때 이은관 씨에게 3만원을 주고 얼마 받았느냐고 물어보기에 10만원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죠.

그러고 나서 또 초청이 왔어요. 나병환자들을 위한 자리였는데 육영수 여사님이 그러잖아도 초청된 이은관 씨는 우는 배뱅이인데다가 슬픈 자리니까 분위기를 띄워줄 사람을 찾은 거예요. 그래서 새벽 4시 반에 나를 데리러 왔어요. 소록도까지 11시 반인가에 도착을 했어요. 갔더니 김상국, 한명숙씨가 이미 와 있어요.

육영수 여사가 일일이 나병환자들과 악수를 하더라고요. 국모가 악수를 하니까 우리들도 따라 했죠. 어쨌든 거기서 엉터리지만 놀았어요. 그래도 나병환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오는데 육영수 여사가 차에 타래요. 런닝에서 냄새나지 양말에서 냄새나지 못 탄다고 했어요.

그래도 괜찮다고 해서 타고 오는데 소원이 뭐냐고 들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노인잔치를 많이 해달라고 했더니 바로 그거다, 그러세요. 당시에 남산에 무지개극장이라고 있었는데 나중에 어린이회관으로 바뀌었죠. 거기서 서울 시내 동만 따져도 430개거든요. 그러면 그날 생일인 사람을 초청해도 400명은 되는 거예요.

▶ 당시에 100만원이면 정말로 큰 돈이었는데 나머지 돈은 어떻게 하셨어요?

정릉에 있는 집 한 채 값이 당시에 120만원이면 살 수 있었거든요. 나머지 돈으로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말하자면 노천극장이라고 야외에서 천막치고 공연하고 돈 받고...25년 동안 이은관, 장소팔, 고춘자, 안비취 같은 명인명창을 모시고 공연을 다녔어요.

◇ 노인잔치 5천 명씩 몰려 ‘가장 행복한 순간’

 

▶ 육영수 여사는 아무나 못 만났잖아요?

어쨌든 훌륭한 분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씩 노인잔치를 열게 했고 서민을 사랑했던 분이에요. 김뻑국 예술단 단장을 맡으면서 가장 행복했던 게 지금도 사무실에 포스터가 있기는 하지만 서영춘, 김희갑 씨 같은 사람은 내 말 듣나요? 그런데 그 양반 말 한마디에 공연을 했어요. 그리고 야당 국회의원 대표까지 하셨던 박순천 여사가 사직공원에 2달 동안 공연허가를 내줬어요. 그때 매일 4천~5천명이 왔어요.

옛날에 장소팔 씨 단체를 따라 시골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는 여인숙에 들어가면 연탄불을 안 켜놓아요. 꺼놓았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갈아 넣는 거죠. 그 냉골에서 저쪽 방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와요. 장소팔 씨가 저보고 불쌍하다고, 운동화를 하나 사주자고 그래요. 그런데 곁에 있던 사람이 노예는 배가 고파야 노예가 돼지, 배가 부르면 노예가 안 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나중에 서울에 올라와서 이창배 선생님한테 물어보니까 노예처럼 불쌍하게 본 거라고 하시더라고요.그때 생각했던 게 내가 저 양반들 전부 불러서 단체를 한 번 하면 원이 없겠다 싶어서 민속예술단 전국노인잔치를 30년 간 한 거예요.

▶ 명함에 ‘재담연구회 김뻑국 민속예술단 단장’이라고 적혀 있어요.

서울의 복지회관에 60회 이상 공연을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은 어떤 분들이 계세요?

서영춘, 김희갑, 남보원 씨는 후배이고 장소팔, 고춘자씨는 선생님이고 김윤심 선생님은 장소팔 선생님보다 윗대이자 신불출 씨와 같이 만담하던 분이에요.

▶ 여러 선생님 밑에서 다양한 걸 배우셨어요.

재담, 노래, 장구 등을 배우고 무대에 나가서 섞어서 한 거죠. 다들 좋아했으니까요.

▶ 김뻑국 선생님하면 재담이 떠오르는데 재담은 어디에서 배우신 거예요?

김윤심 선생님이 하는 걸 그대로 재연한 거예요. 그 양반이 하면 객석에서 좋아했거든요. 학교 운동장이든 어디든 30분도 좋고 1시간도 혼자서 했어요. 너는 이거 배우면 산다고 해서 어머니, 어머니 그러고 따라다니면서 듣고 배운 거예요.

▶ 만담보존회도 만드셨는데 제자들이 많이 있나요?

장소팔 씨 대로 끊어졌다고 봐야죠. 지금은 개그맨들이 아주 잘 하잖아요.

◇ 민속계의 어릿광대도 ‘조강지처가 최고’

▶ 예전에 ‘김뻑국 예술단이 왔다!’고 하면 인기는 어땠어요?

아주 좋았죠. 그러니까 표 팔아서 30명이나 되는 식구들을 먹여 살렸죠. 한 달에 23일을 공연했으니까 많이 한 거예요. 옛날에 공연 다니면서 한 가지 신세진 일이 있는데 여름철에 개천의 공연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돈이 없었어요. 대전에 중앙교회라고 있는데 쌀을 한 되 먹고는 갚아드린다고 하고서 못 갚은 적이 있어요. 그 다음해에 가보니까 이미 돌아가셨더라고요.

▶ 객석도 줄어들고 젊은이들의 관심도 별로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지금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민속을 하니까 아주 고맙죠. 학교에서 초청을 많이 받아서 하는데 돈은 얼마 안 되지만 초청해주는 것 자체가 고마운 거죠.

▶ 50여 년 동안 공연을 하셨으니까 돈도 좀 버셨겠어요?

돈은 별로 못 벌었어요. 어디 위문공연 가자고 하면 평생 그것만 좋아했으니까요. 지금 사는 집도 딸이 사줘서 살고 있어요.

▶ ‘민속계의 어릿광대’라는 호칭도 들으시는데요.

옛날에는 그걸 창피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주 고맙게 생각합니다. 지금 나이가 75살인데 오라는 곳도 있고 박수 받는 곳도 있는데 그 이상 욕심내면 안 되겠죠. 하나님이 두 번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거니까 언제 쓰러질지는 몰라도 아주 고맙게 생각해요.

▶ 결혼은 어떻게 하셨어요?

시골에서 중매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이 생활한다고 고생을 많이 시켰어요. 지금도 아파서 골골합니다. 집에 보름 만에도 들어가고 한 달 만에도 들어가고, 그래도 큰소리는 내가 다치고 야단도 쳤어요. 화가 나면 화풀이할 데는 아내밖에 없거든요. 그래도 꼭 하고 싶은 말은 조강지처가 최고라는 거예요.

내가 쓰러져서 병원에 27일 동안 있을 때 밤을 새워주는 사람은 조강지처뿐이에요. 우리 아버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너는 건달로 돈벌지 말고 좋은 일 하면서 살아라. 조강지처가 양말을 꿰매주면 이빨로 실밥을 끊고 둘째 마누라는 가위로 끊고 셋째 마누라는 쓰레기통에 버린다.”고요.

▶ 자녀는 어떻게 되세요?

딸 하나 있는데 농사를 아주 잘 지었어요. 홍대 미대 수석으로 졸업해서 디자인을 전공하는데 상상도 못할 돈을 벌었어요. 부모한테 참 잘하고 집도 사줬어요.

◇ 시대의 명인, 무대에서 죽고 싶어

▶ 어렵고 척박했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셨는데 사람들을 웃긴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 뒤돌아서 눈물도 많이 흘리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웃기는 걸 할까, 하다못해 술타령을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술 이야기를 하면 좋아하거든요. 눈물을 흘린다는 건 다른 게 아니고 지방공연을 다닐 때 30명 식구가 다니려고 하면 애로가 많았어요. 이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잖아요. 안비취, 이은관, 이 양반들이 이해를 많이 해줘서 그날 10만원치 표 팔면 그 돈 갖다놓고 내일 이동비만 빼놓고 스타들은 갖지 말고 일꾼들한테 나눠주자고 했는데 그게 가장 현명하더라고요. 그러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 해요.

▶ 집시생활을 하셨는데 애환이 많으셨겠어요.

제가 단체를 하면서 몇 번을 망했어요. 경주에서 공연을 하는데 전두환 정권 때 아웅산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그때 김희갑, 김정구 씨도 같이 갔는데 이 양반들은 5일 공연하면 5일치를 선불로 다 줘야 해요. 예술제 공연이었는데 취소가 돼 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집 몇 채값이 그냥 날아간 거예요.

그리고 어린이대공원에서 공연을 하는데 시장을 막 부르려고 하는 찰나에 무대가 덜컥 무너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7명이 다쳤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36명이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제일 애먹었던 게 합의서였는데 병원에 합의서를 들고 갔더니 안 된대요. 우리 식구 취직 하나 시켜달라고. 그래서 27명을 취직시켜 준적도 있어요.

▶ 50여 년 동안 재담꾼으로 살아오셨는데 되돌아보니까 어떠세요?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죽는 날까지 무대에서 열심히 하다가 죽는 거, 그리고 일평생 고생한 노인양반들에게 웃음을 주고 젊은이들이 충효를 좀 더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가신 뒤에 후회 말고 살아생전 효도하자는 타이틀이 있었거든요.

▶ 14살 때 서울에 상경하셔서 보셨던 남대문 기억나세요?

옛날에 재보수를 할 때 현장에 있었는데 설병수라는 양반이 했거든요. 얼마 전에 방화로 남대문이 소실되었는데 기가 막힌 거죠. 재현한다고 해도 그게 안 나오거든요. 그래도 모든 국민이 안타까워하고 남대문을 아껴주는 걸 보면 감사한 일이에요.

▶ 45주년 기념 공연을 하실 때 대단하셨다고 들었어요.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옆에서 찬조해주신 분들의 힘이죠. 일본에서도 초청받아서 가서 하고 또 연변대학에도 두어번 초청받아서 가고 정말 좋았어요. 무대에서 죽는 그날까지 열심히 하다 죽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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