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에티오피아 어느 시장에서 만난 여인의 목걸이에 반해 장신구와 사랑에 푹 빠진 이강원 씨. 그녀는 귀한 장신구를 찾으러 진흙탕 속에 빠지며 길도 없는 오지를 헤맸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전쟁터까지 겁 없이 달려갔습니다.
장신구에 대한, 정말 못 말리는 이강원 씨의 사랑. 그 열정을 담아, 3년 전 그녀는 오랜 꿈이던 세계장신구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세계인들의 영혼이 깃든 아름다운 장신구들이 3천 여 점이나 전시돼 있다는데요. 장신구를 향한 30년 열정, 이강원 세계장신구박물관장을 11월 3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30년 동안 3천 여 점의 장신구 수집
ㄴ
▶ 장신구 박물관장님은 어떤 장신구를 하고 오실까 궁금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장신구를 하신 건가요?
저는 항상 장신구를 할 때 이왕이면 여러 대륙의 것을 합쳐서 하려고 애를 쓰는데요. 오늘은 남미와 유럽의 것을 같이 하고 왔습니다.
▶ 30년 동안 장신구를 수집해 오셨으면, 현재까지 수집하신 것이 얼마나 되나요?
한 3천점 이상 될 겁니다.
▶ 그럼 전부 비싼 보석류의 장신구들인가요?
그런 보석류를 제일 먼저 떠올리실 텐데요. 저희 박물관이나 제가 수집한 것은 어떤 문명 발생지역에서 사용했던 장신구들이 많아요. 그래서 대개 장인들이나 그 곳의 문화를 품고 있는 장신구류라고 할 수 있죠.
▶ 그냥 예뻐서 수집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닌가요?
처음에 에티오피아에서 한 여인이 했던 장신구를 보고 저는 어떤 감전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여인이 결국 제 운명의 꼭지를 돌려놨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어떤 보석이 주는 화려함 보다는 그 재료나 디자인, 장인들의 솜씨, 이런 것들이 주는 조화에서 오는 감동이었던 것 같아요.
◇ 전세계적으로 장신구 박물관은 단 3곳에 불과▶ 에티오피아의 여인이 했던 장신구는 어떤 걸까? 혹시 그것도 소장하고 계신가요?
그것은 제가 사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거기는 안 팔아요. 자기의 집안의 가보이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결혼 목걸이거든요. 그 여인의 결혼 목걸이였는데, 그것은 사지 못하고 결국 나중에 아주 유사한 것은 사서 지금 전시하고 있습니다.
▶ 3천점이면 돈으로 계산해도 상당한 액수이겠는데요.
지금은 좀 환산하기 어려운 것이 이미 지구상에서 없어져버려서 결국 저만 가지고 있는 것들도 몇 점 되고요. 또 장인들도 다 사라지고, 옛 재료들도 공해 때문에 못 만들고 하는 여러 가지 변화들 때문에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많이 귀해졌죠.
그런데 수집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횡재도 하고 수업료도 내고 하잖아요. 저는 외국에 살면서 했기 때문에 횡재를 좀 많이 했죠. 터무니없는 가격에 산 것도 있고, 아주 고가인 것도 물론 있고요.
▶ 장신구 박물관까지 하시는 것 보면, 문화적 가치로 평가받는 거죠?
네. 이미 박물관을 열었을 때는 검증 받은 거라고 할 수 있고요. 제가 수집하고 있는 장신구들을 수집하는 분들이 세계에 3분 정도 밖에 안 계세요. 그래서 박물관은 저만 열었습니다. 독일과 그리스에 커다란 박물관이 있기는 한데 전부 보석류에 치중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인 장신구가 많고요. 저처럼 오래된 전통의 장신구를 수집하는 분은 네덜란드에 한 분 있고, 벨기에에 한 분 있고, 한국에 제가 있고 그렇습니다.
▶ 그럼 우리나라에 있는 장신구 박물관은 세계에 자랑해야 될 박물관이네요.
그래서 제가 박물관 이름을 붙일 때도 부끄럼 없이 ‘세계’라는 말을 붙였어요. 결국 세계의 장신구를 제가 아우르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거침없이 붙였습니다.
▶ 나라 숫자로 따지면 몇 나라의 장신구를 가지고 계신건가요?
나라 숫자로 따지면 한 70여개국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장신구 역사 자체가 오래됐죠?
인류의 가장 오래된 벗, 동반자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인류가 수렵하면서 제일 먼저 의식주를 해결한 다음에는 짐승의 뼈 등을 갈아서 제일 먼저 만든 것이 팬던트거든요. 그리고 지금 발견된 것으로는 약 8만4천년 전의 것이 모로코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 그러면 소장하신 장신구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몇 년이나 된 겁니까?
기원전 200년 전의 것이 있으니까요. 2천 살 정도 되겠네요.
▶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장신구를 수집하실 수 있었나요?
그렇게들 많이 생각하시죠. 그런데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고요. 사실 어려움 속에서 했어요. 저는 그렇게 부잣집 딸도 아니었고요. 결혼한 후에 살림을 하면서 시작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리저리 재고 조이고 하면서 모은 거죠. 그러니까 다른 분들 옷 사고 가방 사고 그릇사고 하는 동안 저는 이런 것들을 샀죠.
◇ 외교관이었던 남편...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생활▶ 70여개국의 장신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외교관이시기 때문에 각국 생활을 하신거죠?
네. 결국 우리나라에 많은 신세를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절대적으로 남편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에요. 여행을 하면서는 도저히 이런 물건을 만날 수가 없고요. 그 곳에 몇 년씩 주재하면서 했기 때문에 그 나라 말도 배우고 친구도 사귀고 정말 그 곳에 사는 동안은 마당발이 되었죠. 그러면서 마당발이 되면 남편 외교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요.
▶ 어느 어느 나라에서 생활하셨나요?
저희가 브라질로 시작해서요. 독일,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미국, 자마이카,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아르헨티나 등에서 살았습니다.
▶ 여행도 많이 하셨겠어요.
네. 그래서 어느 점술가가 저를 보고 역마살이 세 개나 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보고 전생에 ‘남미의 인디오’ 였다고 하신 적도 있어요. 믿거나 말거나지만요.
▶ 작가로서 책도 내셨는데요. 소녀 때는 어떤 직업을 꿈꾸셨나요?
저는 사실 방송인이나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거든요. 그런데 외교관과 결혼을 하면서 저의 모든 인생 설계가 달라졌죠.
▶ ‘세상을 수청드는 여자’ 라는 책 이외에도 쓰신 책이 많으시죠?
수필집은 두 권이고요. 시집을 세 권을 냈습니다. 그런데 더 의미 있는 것은 시집을 스페니쉬로 남미에 있는 동안 콜롬비아에서 한 권이 발간이 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도 한 권이 발간되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대표로 쿠바에 시인 페스티벌까지 가고 했는데요. 그 시집이 번역이 돼서 출간되었기 때문에 콜롬비아에서는 한 3-4년 동안 지방에서 제 시집을 교과서로도 썼어요.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도 굉장히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는 한국에 대한 문화를 잘 모르니까요.
▶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사시는 분들은 모두 ‘대한민국 홍보대사’인 것 같습니다.
네. 특히 대사나 대사의 집인 관저는 ‘우리나라 문화의 센터’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저는 절실하게 깨닫고 실천하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 원래 문화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하셨던 건가요?
그랬나봐요. 많이 밝혔다고 할까요.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 같아요. 제가 호기심도 많고 하니까 외국생활을 하는데 제 자신을 발전시키고 장신구 수집하는 데도 하나의 원동력이자 추진력 역할을 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외교관 부인은 부엌데기도 되고, 이사 전문가, 미용사, 꽃꽂이 강사까지 다 되는 거죠.▶ 외교관 생활하면 굉장히 좋을 것 같지만, 콜롬비아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치안 문제 등이 위험한 나라도 있죠?
제가 콜롬비아 같은 경우 2년 정도 있었는데요. 지금 떠나서 생각하니까 정말 차하고 집만 왔다갔다 한 것 같아요. 거리를 마음대로 걸어보지 못하고, 폭탄이 아무데서나 터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내가 안전한 것은 그것이 나를 피해갔을 뿐인거고요.
오죽하면 예전에 탤런트 박상원씨가 한 번 오셨는데요. 그 분이 르완다 대학살 있을 때도 가셨는데, 르완다보다 더 무섭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거기서도 제가 남미의 귀한 장신구들을 많이 구했어요. 그래서 위험한 지역도 많이 들어가고 그랬죠.
▶ 게릴라 집단과 정부군의 평화회담에도 참석하셨다던데요. 한 편의 무용담 같습니다.
네. 그건 정말 무용담이죠. 지금은 새 대통령이 들어와서 게릴라 세력이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 때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거든요. 그런데 새 대통령과 게릴라간의 평화회담을 한다는 것은 남미역사에서는 상당히 역사적인 사건이거든요. 그래서 CNN등 세계의 모든 미디어가 다 오고 했는데요. 아마존 밀림에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거기를 꼭 가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원래는 안되는데 한국 언론인 자격으로 저만 갔죠.
▶ 외교관 생활이 파티도 많이 하고, 아주 화려할 것 같은데요?
파티도 많이 하죠. 그것도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대통령부터 푸줏간 아저씨까지 만나는 영역이 굉장히 넓어요. 제한을 두면 안되니까요. 그러다보니 그런 화려한 생활을 하기까지 초년병 시절에 겪어야 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죠.
▶ 외교관 생활 하시면서 힘들었던 적은 언제신가요?
저는 글 쓰는 작업에 대한 욕구도 상당히 강했는데 좀 늦게 시작했어요. 그것은 제가 외교관과 결혼한 이상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임무를 120% 수행하기 전에는 제가 원했던 것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설정하고 남편과도 약속하고 시작을 했거든요.
그래서 아마 모든 외교관 부인들이 다 그러시지만 예를 들어 저희를 ‘밥장사’ 라고도 하잖아요. 하도 손님을 많이 치르니까요. 제 손에 지금 그 역사가 있는데요. 제가 그만두고 나서 그 손님 치를 때의 날자, 인원수, 메뉴 등을 다 기록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통계를 내보니까 남편이 35년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제가 한 2만5천명의 손님을 치렀더라구요. 그것도 거의 아홉 코스, 열 코스 되는 한정식으로 했습니다. 한과까지 다 만들어서 후식으로 했어요.
▶ 우리의 음식 문화를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겠네요.
네. 외국분들 중에 정말 김치, 깍두기 찾는 분들도 많이 만들고, 김치팬, 한복팬들을 곳곳에 많이 만들어놨죠. 사람이 어떤 꿈이 있으면 자기의 그 영역을 확장시키잖아요. 그러면서 장신구 수집을 하게 된 것이죠.
▶ 외교관 부인은 때로는 부엌데기도 되고, 이사 전문가도 되고 그러셨어요.
그럼요. 가정교사에다가, 미용사, 꽃꽂이 강사, 정원사까지 다 되는 거죠. 초년병 시절에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지만, 대사가 되면 살림이 굉장히 커져요. 그래서 제가 원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타입이었는데 대사가 되고부터는 제가 완전히 새벽형 인간이 됐어요. 왜냐하면 새벽 6시만 되면 공적인 생활이 시작이 되니까 제 시간을 갖기 위해서 새벽 2-3시면 일어나고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습니다.
◇ 입장료 수입만으로는 개인 박물관 운영이 불가능해▶ 박물관 운영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고 하던데요. 어떠세요?
저도 현실이 정말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저는 장신구를 수집하면서 점점 모이다 보니까 남편이 은퇴하면 박물관을 세우리라는 저만의 흑심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꿈을 이뤄서 굉장히 설레기도 하는데요. 제가 처음에 박물관을 한다니까 주위에서 말리더라고요. 외국에 오래 살아서 뭘 모르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요.
근데 설마 이럴까 싶어서 시작을 했는데 정말 현실이 제가 신문에 여러 컬럼도 쓰고 얘기도 했지만 개인이 30년 넘는 평생을 수집한 것을 자비를 들여서 건물을 세우고 박물관을 열고 운영을 하는 것이 모두 1인체제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희의 경우 입장료를 5천원을 받고 있는데요. 정말 입장료 가지고는 박물관 운영의 10% 정도의 도움 밖에는 안돼요. 그런데 오시는 분들은 5천원이 비싸다고 하시기도 하는데요.
박물관 수가 몇 개냐 하는 것이 결국 그 나라 문화의 가장 확실한 잣대잖아요. 우리나라는 5백 개인데, 미국의 경우는 1만 8천, 일본의 경우는 6천 개 정도거든요. 박물관 하나가 도시를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곳도 많잖아요. 루브르도 그렇고, 스페인의 빌바오도 그렇고요. 그런 문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사립 박물관인데, 현실은 굉장히 어렵죠.
▶ 입장 수입이 10% 밖에 안 되면, 나머지 90%는 어떻게 충당하시나요?
조그만 샵을 대개 가지고 있어서 문화상품도 개발하고 하는데요. 그것이 어떤 커다란 도움은 못 되고요. 그래서 지금 사립 박물관이 한 250개 정도 되는데, 거의 90% 이상이 1년에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의 적자를 감내하고 있죠. 그래서 저는 그것이 문화계에서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로 생각합니다.
▶ 일본의 경우는 관람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대로 유지가 된다고 하던데요.
네. 인식 자체가 사립 박물관을 방문한다는 것은 내가 우리 문화에 기여한다는 뜻을 그 분들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희는 아직 그렇지는 않은데요. 앞으로 그렇게 되리라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이나 영국 등 다른 선진국들은 국가의 보조체제도 잘 되어 있습니다.
▶ 박물관의 숫자도 그 나라의 문화예술 지수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 아니겠습니까?
네. 지금 아랍에미리트가 새롭게 기적을 만들어가면서 나라를 세우는데, 거기에서 제일 많이 돈을 들이고 공력을 기울이는 것이 박물관 건립입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건축가들을 다 불러다가 루브르 분관까지 세우잖아요. 그것은 그 사람들이 아는 거예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수익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 ‘박물관장’ 하면 굉장할 것 같은데, 실상 박물관장님 지갑은 텅텅 비어 있군요.
외국에서는 박물관장 하면 굉장히 존경받죠. 제가 얼마 전 영국에 아트페어를 다녀왔는데요. 거기서도 박물관장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굉장히 귀빈 대접을 받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한 길에 매진하고 사회에다가 자기 열정의 결산을 내놓은 것이잖아요. 거기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였겠죠.
▶ 장신구가 예전에는 수호신 같은 주술적인 의미의 것들이 많지 않았나요?
네. 그것도 큰 역할 중의 하나고요. 일단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표시하려는 수단이잖아요. 그래서 아름다워지려는 본능은 제 생각에는 식욕이나 성욕에 못지않은 것 같아요. 그런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장신구가 발전해 온 것 같아요.
또, 부적의 의미도 있죠. 이 장신구를 함으로써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관혼상제의 상징적으로 쓰이기도 했죠. 반지 같은 장신구가 없는 결혼식은 있을 수가 없잖아요. 약속이나 언약의 의미로서도 장신구가 중요하고요.
또 움직이는 은행의 역할도 했죠. 특히 유목민의 경우, 간이 은행 같은 수단을 했죠. 저희도 6.25때 집안에 있던 금붙이가 가장 목숨을 구해주는 역할도 했었잖아요. 그렇듯이 움직이는 집안의 간이은행으로서의 역할로 장신구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장신구를 집안의 가보로 여기는 집안도 많고 해서 탐은 나는데 잘 팔지 않죠.
제가 아프리카에 있을 때 한 600km 포장도 제대로 안된 길을 귀한 팔찌를 찾으러 갔는데요. 절을 하고 뭘 해도 그걸 안 팔더라고요. 어느 부족의 추장 부인이 했던 팔찌였는데요. 제가 외국인인데다가 자기네 귀중한 것을 사겠다고 하니까 도둑으로 오해 받아서 낫, 곡괭이를 들고 나와 저를 공격하려고 했던 일도 겪었었어요.
▶ 그 때는 어떻게 위기를 넘기셨나요?
외교관이나 외교관 부인 공히 그 주재하는 나라의 말을 한다는 것은 실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요. 저는 아프리카에 가서도 아프리카 말을 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물론 내조하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제 속셈은 장신구를 구입하려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죠. 경우에 따라서는 오지에도 들어가야 하니까요.
그럴 때 제가 아프리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봉변을 당했을 거예요. 그런데 의외로 동양여자가 자기네 말을 하고, 자기네 문화를 사랑하고, 자기네 음식도 잘 먹고 하니까 그러면서 풀어지고 아무한테도 안 주던 것을 저에게 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런 때 횡재를 한거죠. 불가능할 것 같은 것들이 제게 오도록 했던 것이죠.
제가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그것을 어루만지면서 밤을 샌 적도 수도 없이 많죠. 지금도 어느 때 박물관에 사람들이 다 나가고 나서 장신구들을 보면 자기들이 품고 있던 얘기를 다 말하는 것 같아요. 특히 장신구는 다른 것들과 달라서 신체, 살갖과 직접 접촉을 하잖아요. 부벼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장신구를 오래하면 저는 그 사용했던 사람의 혼이 배어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만든 사람의 혼과 사용했던 사람의 혼, 거기다 제 혼을 집어넣어서 이 세 박자가 박물관 속에 녹아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장신구를 구하기 위해 위험한 지역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ㄴ
▶ 그렇게 위험한 곳을 다닐 때도 혼자 가셨어요?
혼자는 아니죠. 그리고 저는 국가를 대표하는 신분이니까 그렇게 제 자신을 막 할 수는 없잖아요. 혼자는 못 움직이죠. 그리고 남미도 그렇지만 에티오피아도 그 때 내전이 대단했었거든요. 길에 다니다 보면 시체가 쌓여 있고 그러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시장에 나가서 그 목걸이를 한 여인을 봤던 거죠. 그 때도 제가 시장을 나간다고 하니까 전부들 말렸어요. 그런데 제 못말리는 호기심에 나가서 본 것이 큰 계기가 된 것이었죠.
▶ 그 팔찌는 가격이 얼마나 되는 것이었는지도 궁금한데요.
저의 경우 그 곳의 환율도 있고 해서 그 팔찌의 경우는 그 당시에 기백불이었는데 그 때는 그것이 굉장히 큰 돈이었어요. 지금은 200-300달러면 그리 큰 돈이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참 큰 돈이었죠. 거기는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곳이니까 굉장히 큰 돈이예요.
그런데 그것도 특별히 준 것이죠. 절을 아주 많이 하고 받은 거니까요. 지금은 좋은 골동품을 구하려면 아무래도 서울에서 구하는 것이 좋다고 하잖아요. 그러듯이 그 나라의 수도에 제일 많으니까 골동품상과 친구가 되어야죠.
그런데 제가 보니까 사실은 골동품상이 어느 교수님보다도 해박하시더라고요. 자기 물건을 오랫동안 다루고 만지고 하면서 얻은 지식이라서 그 분들한테 참 많이 배웠죠. 그 때 제가 그 나라 말을 한다는 것이 강습을 받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 언어가 정말 타국 사람과 친밀감을 느끼는데 가장 좋은 수단인 것 같아요.
그럼요. 그래서 제가 ‘실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남미에서도 제가 스페니쉬를 안했으면 게릴라와 대통령의 평화회담에도 물론 못 갔고요. 영어만으로는 안 되고 그 곳 현지의 스페인 언어를 하니까 그것이 커다란 가산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쿠바에 갔을 때도 현지 말을 못했다면 제가 뜻하고 갔던 일의 절반정도 밖에 이룰 수가 없죠. 그래서 저는 외교관은 물론이고, 영어는 거의 여권이나 마찬가지로 필수품이죠. 어떤 분들은 영어를 공기라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 콜롬비아에서의 평화회담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 때 1999년도에 회담했던 분들이 지금 대통령의 전임인 ‘빠스뜨라나’ 대통령이시고요. 또 상대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거물급 게릴라인 ‘마룰란다’라고 민족해방 전선의 대장이었죠. 콜롬비아는 결국 나라의 행정력이 미칠 수 있는 곳이 3분의 1밖에 안되요. 그리고 게릴라들이 사실은 전부 밑바닥으로 스며들어가서요.
거기서는 수퍼마켓에 가서 카드 쓸 때도 조심하라고 해요. 계산하는 아가씨들도 게릴라 요원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거든요. 또 세계 최고의 마약이 콜롬비아산이거든요. 그래서 저희 딸이 그 당시에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콜롬비아에 저희를 만나러 왔다가면 네덜란드의 친구들이 약 안 가져왔냐고 하더래요. 그래서 얘가 깜짝 놀라니까 친구들이 콜롬비아 가서 약을 안 가져 오면 뭐하러 가냐고 하더래요.
그러니까 콜롬비아 마약을 하면 다른 마약은 못 할 정도로 그런 질 좋은 마약을 그 곳에서 만드니까 그런 이권이 얽혀서 정치권에까지도 마약자금이 들어가서 어떻게 이 게릴라 집단을 근절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죽하면 대통령이 밀림 본거지에 내려가서 평화회담을 했던 거죠. 게릴라 수장 대 대통령의 평화회담이었죠.
저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또 이번에 아르헨티나도 여자 대통령이 탄생했잖아요. 전임 대통령에 이어 부부 대통령이잖아요. 또 이번 노벨문학상은 영국 사람이 받았지만 남미가 노벨문학상을 이미 네 명이 탔거든요.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 그 사람들은 사고의 영역이 경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환상과 현실을 제일 뒤범벅해서 섞는 사람들이 남미 사람들일 거예요.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도 있고요. 인디오 원주민들끼리 살다가 스페인이 300년동안 지배를 하고, 나중에는 미국과 소련의 힘의 각축장을 벌여서 남미 곳곳에 게릴라가 없던 곳이 없거든요. 그래서 제 책에도 ‘탱고와 게릴라’ 라는 제목이 들어갔는데요. 그러다보니 민주주의가 쭉 자리잡았던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죠. 그리고 게릴라가 40-50년을 장악하는 또 하나의 대통령이잖아요.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이 역사적 배경 탓도 있겠죠. 그리고 온 나라의 인종이 다 섞인 곳이 그 곳입니다. 그래서 아주 재미있는 곳입니다. 앞으로는 자원전쟁이 될텐데, 남미는 아직 자원이 개발 안된 곳이 많아서 앞으로는 저희가 남미를 굉장히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콜롬비아의 경우도 아직은 어렵기는 하지만 신이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내려 주었다고 할까요? 세계최고의 에메랄드도 있고, 석유 등 많은 자원이 묻혀있죠.
▶ 장신구도 그 나라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겠죠?
그럼요. 그래서 재질이나 디자인, 상징성 등이 나라마다 특징이 있는데요. 장신구는 또 하나의 장점이랄까 굉장히 작잖아요. 그래서 교역이 잘 되었던 것이 장신구예요. 그래서 전세계를 활발하게 교역했던 것이 아마 장신구일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유사한 것도 많고 많이 융합이 되고 하는 것이 장신구라서 장신구의 가치가 더 높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장신구에는 시대의 상징성과 의미가 담겨▶ 장신구에 어떤 권위나 부의 상징이 담겨있기도 하죠?
그렇죠. 우리나라는 특히 복식이 화려하고 해서 장신구 문화가 그렇게 크게 꽃피우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요. 지금도 저희가 장신구 이야기 하면 이조시대 때 남자분들은 거의 없고, 노리개, 가락지, 머리 장식인 떨잠 정도였죠. 목걸이는 안했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나라는 다양하거나 재료면에서 발달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외국의 경우에는 지도자의 상징, 정신적인 지도자들도 장신구로 자신의 지위를 표시하고, 예전에는 주술사들이 자기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많이 이용했죠.
예를 들어 남미에서 주술사들이 20cm쯤 되는 금코걸이를 하거든요. 그것은 반달 모양의 금판이예요. 왜 했냐면 그것을 함으로써 자기가 재규어 동물을 닮는다고 생각했어요. 왜 재규어를 닮으려고 했냐면요, 남미 무속신앙에 재규어가 영적인 세계와 인간세계를 매개시켜 주는 하늘과 땅을 동시에 바라보는 동물로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주술사가 닮아야겠죠.
그러니까 그것을 함으로써 자기가 힘을 얻고 국민들한테도 자기가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과장된 장신구를 한 거죠.
▶ 이집트에 가보니까 왕들의 치장은 너무 지나쳐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것도 다 당시 귀했던 보석들인데요. 이집트 경우만 해도 가서 보면 굉장히 화려하고 큰 장신구를 했잖아요.
▶ 십자가 전시실이 특히 유명하다고 하던데요. 십자가의 가로세로 비율이 똑같은 경우도 있다고요?
저희가 알고 있는 십자가를 구분하면 그리스 십자가와 라틴 십자가로 나눌 수가 있는데요. 그리스 십자가는 가로와 세로 길이가 같아요. 그런데 라틴 쪽은 세로가 길죠. 그런데 유일하게 에티오피아만 십자가가 장식성이 뛰어나요. 거기에 온갖 비둘기, 구름, 꽃을 넣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십자가를 변형시켜서 하나의 십자가 안에 또 다른 몇십개의 십자가가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조숙해서 1970년도에 그걸 보는 순간에 수집하기 시작했는데요. 사실은 그것이 지금 그 나라의 문화재예요. 그래서 지금 한 개도 못 가지고 나온다고 해요. 공항에도 그 십자가만 투시하는 엑스레이를 설치해서 하나도 못 가지고 나오게 한다는데요. 저희는 한 150개 정도를 전시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분들은 그것을 굉장히 비싼 돈을 주고 수집하는 수집품이 되었어요. 그래서 와서 보시면 십자가라는 말씀을 안 드리면 십자가인 줄 모를 정도로 디자인이 뛰어난 장신구입니다.
▶ 그런 장신구는 종교에서 쓰이는 성물입니까? 아니면 그냥 액서서리입니까?
두 가지예요. 저희가 두 가지를 전시하고 있는데요. 하나는 제단에서 썼던 제단용 십자가이고, 하나는 목걸이 형태의 십자가죠. 굉장히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변질되지 않은 기독교가 남아있는 곳이 에티오피아 라고 해요. 기원 후 4세기에 그 곳에 기독교가 들어갔는데 다른 곳은 변질되었는데 그곳만 유일하게 있다고 해서 성지 중에 성지라고 해요.
그런데 제단용 십자가의 경우 42cm 정도 되는 커다란 은으로 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지금 대영박물관에만 있어요. 그런데 정말 십자가를 레이스처럼 만들었어요. 투각을 하고 해서 정교하게 모양을 만들었는데 이태리의 최고의 세공사들도 지금 그것을 못 만든다고 해요.
저도 정말 놀라워서 물어보니까 그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 믿음이 만들어준 작품이고, 매일밤 천사가 내려와서 연금술사의 작업을 도와주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 한 가족 모두 박물관에서 일해.... 가족 중 3명이 학예사▶ 그런 과정에 남편분이 많이 도와주시겠어요. 지금 박물관에서 함께 일하시나요?
제가 고용을 했죠. 월급도 안 주고 고용을 했지만요.(웃음) 저도 처음에는 직원도 쓰고 했는데 사립박물관을 경영하는 것이 어렵고, 귀한 것을 잘 보존해야 하니까요. 마침 제가 딸이 둘인데, 큰 딸이 네덜란드에서 박물관학 석사를 했어요. 그래서 그 쪽에서 활동을 하다가 준비된 상태에서 불려왔죠.
대사님의 경우도 문화고시라고 할 수 있는 ‘학예사 시험’이 있어요. 1년에 한 번 있는데요. 이번에 신정아씨 때문에 학예사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문화고시를 패스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런데 김승영 대사님이 최고령으로 합격했습니다. 그것도 저희 작은 딸과 같이 부녀 동반으로요. 그래서 국립을 빼고 사립 박물관으로는 저희가 아마 인증된 학예사가 가장 많은 박물관일겁니다. 3명이 있으니까요.
▶ 관람하시는 분들이 박물관에 오셔서 보시면서 어떤 점을 느끼는 것이 관장님께는 보람일까요?
저희가 관람객을 분석해보면, 유아원부터 복지원 어른들까지 그 연령층이 굉장히 넓어졌어요. 가장 어린 관람객은 두 살짜리 아기도 있었는데요. 사실 장신구 안에는 무한한 디자인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금속공예를 하거나 디자인을 하는 분들은 ‘내가 어렸을 때 이런 박물관이 있었다면 나의 디자인의 세계가 달라졌을 것이다’ 라는 얘기도 많이 하시고요.
그리고 저희 장신구들이 생각보다 많이 커요. 저희가 상상하는 것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들이 많고 신분을 나타내고, 최고의 재료로 만든 것들 이예요. 그래서 우선 그 크기에 압도되는 분들이 많아요. 저걸 어떻게 하고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무게가 3kg 정도 되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가장 많이 오는 반응이고요.
그리고 저희가 그 디자인을 보고 현대화시켜서 콘테스트같이 응모를 해서 상을 주는 행사도 했는데요. 아주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고요.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접해서 행복했다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 관람하시는 분들의 매너도 상당히 중요하죠?
방송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박물관을 열면서 가장 욕심을 부렸던 것이 교육적인 면이예요. 제가 해외에 살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살았기 때문에 외국의 어린이들이 접하는 다양한 문화를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접하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까웠거든요. 그래서 제가 가장 주력했던 것이 교육에 목적을 두는 것이었는데요.
지금 저희가 아동의 경우 2천원을 받는데요. 저는 한 1만원을 받고 싶어요. 왜냐하면 꼭 오면 어디가 손상이 돼요. 부산에서 달리 조각품이 파손됐을 때 제가 일간지에 관람매너에 대해 한 번 쓰기는 했어요. 외국의 경우에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만지지 않고 하는 기본적인 관람 매너가 어려서부터 익히고 몸에 뱄죠. 일본 사람들도 왔다가도 소리가 안나요. 얼마나 숨쉬는 것도요. 숨쉬면서 나오는 이산화탄소가 소장품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하루는 꼭 쉬게 하는건데요. 그런데 놀이터 같이 뛰어 다니고 만지는 경우가 많아요. 반지 전시회처럼 아주 예민한 전시회를 할 때도 흔들어서 떨어뜨리고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제가 그 동안 속내를 한 번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요. 아이들은 정말 만원을 받아도 충분치 않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돌아서서 생각하는 것이 그래도 여기에 데려오는 어머니들이 훌륭한 어머니다, 우리가 참자 하고 있어요. 앞으로 점차 개선이 되겠죠.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미 선진국의 경우에는 3세부터 에티켓과 매너 학교를 다녀요. 그것이 굉장히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이예요. ‘키드 매너’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에티켓과 매너를 가르치는 것이 아주 성업중인 이유도 아만 저희와 같은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어요. 식탁 매너 같은 경우도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 그런데 우리가 장신구라고 하면, 명품 보석으로 치장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 면도 있거든요?
저는 그것도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자기의 스타일이나 분위기를 만들었을 때 특히 나이 들어가면서는 명품이 주는 아름다움 보다는 눈, 코, 입 등 자기 용모가 주는 아름다움이 더 큰 것 같아요. 자기 내면이 결국 분위기고, 스타일 아니겠어요?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은 결코 명품이 할 수는 없죠. 그런데 그것을 찾기 위한 과정 단계인데요. 저는 이렇게 명품에 몰입하고 달려가고 고가를 지불하는 것들이 곧 끝나리라고 믿습니다.
▶ 장신구 박물관의 위치가 삼청동이죠?
네. 삼청동 정독도서관 바로 뒤편입니다.
▶ 그 동네는 하나의 박물관 타운 같아요.
네. 제가 알기로 그 동네에 한 일곱 군데가 있고요. 가회동까지 하면 열 곳이 넘어요. 저는 그것도 대한민국의 하나의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될 것 같아요. 뉴욕에 ‘뮤지엄 마일’이라는 곳도 열 곳 정도 밖에 안되거든요. 그런데 그 곳에서 1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여는데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거든요. 그렇듯이 이 북촌에 있는 박물관들이 좀 더 정비되면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춘 문화상품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삼청동 북촌에 또 어떤 개인 박물관이 있죠?
티벳 박물관, 가회박물관, 자수 하시는 인간문화재 한상수 선생님의 자수 박물관, 실크로드, 부엉이 박물관, 인형 박물관, 장난감 박물관 등 많습니다.
▶ 박물관의 보수, 유지 측면에서 본다면, 무료 관람은 정말 어렵겠는데요?
그것은 아직 너무 불가능한 이야기죠. 일단 사립 박물관이 건강하게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요.
◇ 삼청동의 박물관 거리가 하나의 문화상품이 되길 희망▶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개인 박물관이 많이 생기고, 찾아오시는 발걸음도 더욱 많아지면 좋겠네요.
그럼요. 지금 뮤지컬은 몇 십만원씩 내시면서 보러 가시잖아요? 그러니까 문화의 편식, 지역의 편식, 우리가 중남미나 아프리카는 굉장히 후진국으로 변방에 놓고 많이 관심을 안 기울이잖아요. 그런 편식증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김승용 전 대사님께서 박물관장을 하겠다고 하시지는 않나요?
아니요. 감히 그렇지는 못하죠.(웃음) 그런데 사실 정말 일등공신이죠. 제가 이런 것을 수집하는 동안에 그냥 눈 감아 주고 별로 잔소리를 안했거든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멍석을 깔아주었던 것이 참 고맙죠. 공무원이다보니 굉장히 정확한데도 제가 어떤 경우는 빌려서도 사고 하는 일종의 일탈을 하는 경우에도 많이 눈을 감아주었죠.
▶ 30년 전에 취미생활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박물관장이 되셔서 보람도 크셨겠어요.
저는 사실 박물관 관장이라는 자리가 이렇게까지 영향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해외와 교류전도 준비하고 있고 특히 한국보다는 외국의 문화계 인사를 만났을 때 제가 대사 부인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 어려운 가운데서도 박물관을 하시는 것이 내 기쁨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희생과 나눔을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저도 일단은 열어놨으니까 경영을 해야죠. 그래서 그 묘수를 찾는 연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또 저희는 장신구라서 좀 더 쉽고 많은 길이 열려 있는 것 같아서 제품을 만들어서 해외에 수출하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운영과 마케팅을 잘 해야죠. 앞으로 정말 이름값을 하는 세계인들이 찾아오는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세계 장신구 박물관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