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 "박정희 대통령도 '수사반장' 광팬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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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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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내 가슴 속에 무대가 있다' 탤런트 최불암 1편

‘수사반장’의 박 반장, ‘전원일기’의 김 회장, ‘그대 그리고 나’의 캡틴 박. 1967년 데뷔한 후 40년 동안 믿음직한 맏형에서 한국의 아버지까지…. 국민 배우 최불암 씨는 우리에게 느티나무 같은 배웁니다.

삽을 든 구부정한 뒷모습, 말없이 텅 빈 들판을 바라다보는 뒷모습만으로도 깊은 감동을 주는 최불암 씨는 기쁨과 눈물, 시련과 환희의 인생을 시청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파~” 하는 웃음소리와 더불어 90년대 한때 저 유명한 ‘최불암 시리즈’로 한 시대의 ‘코드’가 되기도 했구요.고 정주영 회장의 권유로 정치에 발을 담그는 잠깐의 외도도 했죠.

뭔가 ‘욕심’을 부릴 법한 큰 인기를 누렸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서민의 일상으로 들어와 쓸쓸하고 팍팍한 우리들의 가슴 속에 머물렀습니다. ‘인생은 연극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배우’라고 생각하는 국민배우 최불암 씨를 10월 12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봤습니다.

◇ 우리시대의 아버지 최불암, ‘식객’으로 컴백

 

▶ 뵐 때마다 늘 건강하신 것 같아요.

건강한 것도 사실 미안해요. 확 늙어야 하는데 얼굴이 귤껍질 같아서 주름이 잘 안 잡혀요. 어떤 분은 얼굴에 주름 하나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계시고 그럴 때는 “나는 이미지로 사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노역을 해서 청년기가 없이 노년기로 바로 간 사람입니다. 그러니 젊은 얼굴을 못 보셨으니까 지금 보는 얼굴이 젊을 겁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웃음)

▶ 탈모에도 시달리는 분들이 계시는데 최불암 선생님은 그대로세요.

저도 머리가 빠지죠. 그런데 많이 빠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늘 부모님께 감사한 게 머리에요. 친구들을 보면 전부 하얗거나 물들이거나 빠지거나 하거든요.난 이제껏 샴푸를 써본 적이 없어요. 계속 비누만 썼지. 오히려 샴푸를 쓰면 이질감이 오고 향도 싫고 해서 냄새 없는 비누를 쓰고 있어요. 우리 집사람이 저보고 아주 이상하다고 그래요.(웃음)

▶ 요즘 어떤 작품을 하고 계시죠?

요즘은 사회활동을 많이 했어요. TV도 MBC에서 활동을 많이 하다가 진력도 나고 짜증도 나고 또 스텝과의 관계, 연출과의 관계들이 제 나이가 칠십을 향해서 달리는 나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괜히 어른스러워지고 상대방도 어른 대하기가 까다롭지 않겠어요? 그럴 바에는 얼마 동안 쉬어야 되겠다 싶었어요. 그동안 시청자들한테 받은 사랑도 많고 해서 이제는 제가 사랑을 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찾아보고 그랬죠.

▶ 말씀처럼 홍보대사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하셨어요.

홍보대사라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서 각 부처마다 홍보대사가 있어요. 그런데 안 하겠다고 사양하는 것이 더 어려워요.

▶ 배역을 맡으시려고 로비를 하신 것 보다는 배역을 빼달라고 역로비를 하신 것 아닌가요?(웃음)

그렇지 않아요. 일단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배역이 없고 달콤새콤한 이야기의 아버지 같은 역할보다는 건강하고 미래가 있는 드라마나 시청자들에게 꿈을 줄 수 있는 걸 하려고 해요. 요즘 드라마를 찍고 있는데 허영만 씨 원작만화인 ‘식객’을 찍고 있어요. 그건 사명감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겠고 요즘 한류가 약간 주춤하는 것 같아요.

요즘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먹는 음식을 보면 일반 사람들이 먹는 것, 순대나 감자탕 같은 것만 찾아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거예요. 이게 다 옛날 일반 백성들이 먹던 거잖아요. 우리의 저장식품, 발효식품, 이런 게 세계 또는 한류에 진출하면 어떨까 하는데 마침 이 작품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음식의 내력, 우리 선조들의 음식의 지혜, 음식이 또 건강이잖아요. 웰빙 시대가 되서 살도 안 찌고 조상들이 좋아하던 방법들을 시청자들에게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찍고 있습니다.

◇ 연기자 아닌 본래의 모습을 담은 에세이 펴 내

▶ 최근에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라는 자서전을 내셨어요. 텔레비전과 에세이를 합친 ‘텔레세이’라고요?

텔레세이는 텔레비전 주변에 있는 이야기를 쓴, 텔레비전 주변의 에세이라는 뜻으로 실었어요. 옛날에 우리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걸 보면 연극하면서 “너만 배우가 아니야. 세상 사람들이 배우인데 너 잘 해야 돼. 넌 보통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세요.

왜 그러냐고 하면 “이 지구가 무대다. 그리고 무대 위에 사는 사람은 모두가 다 배우다. 자기 분야를 소개도 하고 연구하고 이게 다 배우의 형태가 아니냐.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일종의 알 것을 전달해주는, 네가 그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게 광대 아니냐. 너 잘 해야 돼.”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 어떤 계기로 책을 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예전에 한 권을 시시하게 슬쩍 냈는데 홍보도 안 하고 보관용으로 갖고 있었는데 오래 된 거라 너무 낡았어요. 15년쯤 되었는데 그걸 엎고 다시 하자고, 그동안 자료도 많이 생겼으니까 출판사 편집장과 인터뷰를 하다가 이야기가 재미있고 없고 간에 한 번 책으로 내보자고 그래요.

내가 낼 게 뭐 있겠냐고 했더니, 내 이면을 궁금해 하는 후배들이나 사람들이 왜 없겠느냐고, 하자고 해서 쉽게 대답했는데 편집장이 추진력이 강해요. 그래서 자료 내 놔라, 신문에 난 거 내 놔라, 잡지에 난 것도 내 놔라 이래서 구색을 짜 맞춘 거예요.

연기자의 입장과 연기자가 아닌 내 본래의 모습들이 담겨 있어요. 저희는 작가의 생각 속에 놀았죠. 그런데 내 얘기를 내가 직접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이런 책이라도 내서 배우가 아닌 평상시의 최불암은 이런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이 들어있으니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죠.

◇ TV출연과 함께 배우 김민자에게 필 꽂혀

▶ 데뷔하신 것이 1967년도 KBS 수양대군이셨어요?

그렇습니다. 제가 국립극장에서 연극할 때인데 그 당시 중앙정보부, 지금의 안기부죠. 거기에 문화국이 있어서 말하자면 대북관계 등을 관할하기 때문에 가끔씩 중앙정보부 7국에서 불러다가 썼어요. 거기에 두 번 정도 나갔었어요.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제 눈에 띄어가지고 방송국으로 가야 집사람을 잡을 것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마침 67년도에 수양대군에서 김종서 역이 들어왔어요.

당시에는 연극하던 사람들이 프라이드가 높았어요. 생으로 관객과 교류하는 것이 예술이지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것은 기능공이지 연기자가 아니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전부 편집하고 하니까. 그래서 연극배우로서 텔레비전에 올라가는 것을 터부시했어요. 지금이야 돈을 잘 버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때 얼마나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TV가 돈을 넉넉하게 주죠. 지금은 출연료지만 그때는 사례라고 했어요. 사례를 주는데 돈이 그리운 게 아닐 때니까 안 나갈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집 사람이 방송국에서 일하는 걸 보고 저도 27,8살 때니까 결혼적령기였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텔레비전을 통해서 ‘정동마님’을 보고 있다가 집 사람을 친구들이 자꾸 소개를 해요. 네가 바라는 여자는 이런 여자 아니냐고. 감성적이고 새침하고 냉기가 흘러야 한다고, 키도 크고 뼈가 굵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친구들이 거기에 하나 있다고 해요.

TV 3기로 들어온 사람인데 네가 생각하는 여자는 눈이 큰 여자 아니냐, 넌 눈이 작아서 합성하면 꽤 괜찮은 자식들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일단 내가 배우생활하면서 자식도 근사한 걸 낳고 싶은 생각이 왜 없겠어요? 저런 여자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던 차에 김종서를 맡으라고 해서 맡았던 거죠. 그때는 30살도 못 되었던 때니까 50대 역할을 맡은 거예요. 그거 하면서 집사람을 만나고 그랬어요.

▶ 보는 순간 필이 꽂히신 거네요.(웃음)

그런 걸 보고 필 꽂히는 거라고 하겠죠.(웃음)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리고 집사람 눈길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또 저도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굉장한 추진력으로 밀고나갔어요. 당시에 집사람이 인기가 좋아서 우리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연극하는 데다 어머니가 주점도 하시고 무녀 독남에 외아들이고 아버지도 안 계시고 말이죠. 홀어머니에다 주점을 하고 계시니 이미지가 안 좋았겠죠.

▶ 문화예술계에서 최불암 선생님의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하던데요. 어떤 음식점이었나요?

대포집이죠. 문화예술 기자들, 또 그런 분야를 갈망하는 주변 사람들이 명동에서 모여서 모든 문화가 형성되었어요. 누가 책을 한 권 내도 표지는 누가 하고, 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했으니까요. 어머니가 계신 주점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 그리는 사람 등 문화인의 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완전히 아지트였어요. 이익도 남지 않고 자기네들이 돈 내고 자기네들이 술 한 잔 먹고 가는 곳이었죠.

어머니가 손도 크지 않으신데 돈을 잘 못 받아요. 돈을 받으려고 해도 문화예술계에 있는 사람들이 돈이 있겠어요? 시인이나 이런 사람들인데. 다 한 잔씩 잡숫게 만들고 또 그 기분으로 어머니는 마음에 살이 찌신 거예요. 내가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덕분이죠.

수사반장에 나왔다고 하면 어머니가 가게에 나가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진짜도 아닌데 남의 팔목에 하얀 팔찌 채우는 거 하지 마라.” 누가 그랬냐고 물으면 이봉구 선생이 그랬다고 하세요.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부터는 부하들이 수갑을 채우고 나는 안 채우는 거예요. 어머니 말씀이 맞거든요. 객관적으로 모니터링해주는 사람 말이 맞는 거예요.

그리고 눈은 형사처럼 흘겨 뜨지 말고 보통 사람들 보듯이 하라고, 또 모든 사건의 사회적 비리나 부조리는 네 몸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여라. 이런 조언들이 내 연기를 만드는 거예요. 난 원래 연출공부를 했지, 연기자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런 분들이 나오면 연극보고 격려해 준 것이 나를 많이 성장시켜줬지요.

 


◇ 지독한 청춘의 좌절에서 찾은 희망 ‘인무원려 난성대업’

▶ 그때는 안양대학교 영화학과였죠?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를 나왔거든요. 나와서 할 일이 있나? 더구나 연출을 전공했는데 누가 나한테 연출을 시키겠어요? 딴 사람이 못하는 노역배우, 할아버지 아버지 역할을 했어요. 얼굴이 좋고 모양새가 좋으면 주인공을 하라고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어요.그래서 나는 노역배우였어요.

▶ 당시에 주연은 어떤 분이 하셨어요?

많았죠. 그리고 다들 주연이었어요. 김창세 씨 같은 경우는 평생 주연이죠. 또 강부자씨 남편 이묵원 씨도 주연이었고 나보다 생명이 짧았지만 정욱 등 이런 잘생긴 사람들이 있고 영화계에서는 신성일 선배님, 최무룡 씨 다 주연배우들이시죠.

▶ 주연배우를 못 하셔서 속상하신 적도 있어요?

섭섭했죠. 근사하게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다음에 69년도에 데뷔작을 했어요. 작고하신 차범석 선생님의 4.19,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한 극에서 주인공을 맡았어요.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 이라는 연극인데 거기서 대학생 역할을 맡았는데 상당히 과격한 역이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컨디션이 안 좋았어요. 감기가 잔뜩 들었는데 콧소리만 나는 거예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근삼씨한테 신문에서 욕을 크게 먹었어요. 발음도 안 되는 놈이 연극에서 주연한다고 까분다고 말이죠.(웃음)

그때 연극을 그만두려고 한 게 아니라 아예 연기자를 포기하려고 했었어요. 이건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그러다가 포기하고 군대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외아들이라서 조금 연기가 되었지만 마음먹고 다녀왔는데 이후에 시련의 길, 번민의 길을 걷다가 천천히 노역으로 다시 나왔어요.

그때 군대에서 큰일을 했어요. 전 예하부대 2군사령부에 나가있었는데 예하부대 사람들을 군 예절이나 군인으로서의 행동 등을 가르치는 건데 그걸 연극으로 만들었어요. 한 통신부대를 이용해서 부대 전체가 연극쟁이들이 되는 거예요. 6개월 동안 예하부대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와서 1시간 동안 막사를 거쳐서 부대를 걸어서 지나갈 때 공부가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청각 교육으로 현장교육이었던 거죠. 경례하는 법부터 식사하는 법까지, 소대생활 하는 거 일체 다 들어갔어요. 나는 물탱크 위에서 무전기를 가지고 하는데 하루 종일 하니까 힘들어서 병이 날 수밖에요. 그때 2군 사령관이 훌륭한 일 했다고, 집에 일찍 가라고 해서 6개월 일찍 갔어요.(웃음)집에 와서 쉬는데 주변을 돌아보니까 친구들이 당시 중앙일보에서 만든 TBC 동양방송국으로 다 갔더라고요. 이때가 63년도쯤이었을 거예요.

나와 보니까 내 자신을 처음 쳐다볼 수 있더라고요. 내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니고 백수건달이잖아요. 우리 집에 아래채가 있을 때 집에 있는데 친구들은 다 잘 되고 그 사이에 애인은 떠나고 어머니는 장사가 안 되시고, 또 어머니는 장사 나가시면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죠. 방에 가만히 있는데 이상하게 낮잠도 안 오고 먹기도 싫더라고요. 입안에 혓바늘이 돋고 모래 씹은 것 같더니 그게 병이 되는 거예요.

먹지 못하고 잠 안 자니까 사람이 꼴이 아니고 육체적 시련이 죽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져요. 자살도 생각해 보고 상당히 오랜 시간을 집에서 시계의 똑딱 소리를 못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손님 이불을 아래채에 쌓아놓는데 거기다가 머리를 쑤셔 박아야지 1시간 정도 잠을 잘 수 있었어요. 이부자리에서 빼니까 머리는 파도치는 것처럼 산발이죠. 거울을 보니까 사람 꼴이 아니고 귀신같아요.

우리 어머니가 사람을 보내서 여러 사람이 올라왔어요. 훌륭한 사람들 보내서 카운슬링을 한 거죠. 그런데 도저히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죽음이란 게 별 게 아니고 캄캄한 데 한 발짝 내밀면 되는 건데 그 용기도 없고 또 하늘이 요즘 날씨의 푸른 하늘, 구름, 꽃, 또 은빛 살이 반짝이며 흘러가는 한강을 쳐다보면서 결단을 못 내리는 거예요. 더군다나 물에 떨어지면 내가 수영선수라 목숨 구하려고 기어 나오겠죠.(웃음)

이런 아쉬움 속에서 클라이맥스까지 왔는데 어디선가 땡, 땡 종소리가 들려요.우리 동네에 안 들렸는데 새로 생긴 교회인가 봐요. 가보니까 교회를 하나 새로 지었어요. 교회를 지을 때 하늘 가까이 지으려고 하니까 집을 흙을 쌓아가지고 그 위에 교회를 지었는데 흙 속에 거의 묻힌 집 하나가 있어요. 이게 아마도 목사님이 사시는 집 같아요. 가니까 목사님은 없고 신자들만 몇 사람만 있어서 목사님을 뵈려면 어디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저 집에 있다고 해요.

함석으로 다 기울어가는 집에 가서 마당으로 한 발 들여놓는데 목사님이 그 날 설교하실 때 쓸려고 등을 하나 켜놓고 들고 계셨는데 날 보더니 저한테 시선 한 번 안 떼시더라고요. 머리도 뻗치고 마르고 눈이 퀭하니까 나중에 생각인데 날 보고 너무 놀라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눈을 안 떼시고 툇마루를 건너셔서 신발을 신고 나오시더니 목사님이 나한테 오셔서는 딴 말 하나 안 하세요.

그러고 양쪽 팔을 잡더니 바로 기도하세요. 하나님, 길 잃은 양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사실 내가 길을 잃었지.그렇게 기도하시는데 몸에 전율이 와요. 그리고는 이 사람을 구해 달라고 머리를 잡고 흔드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 산에서 돌이 하나 굴렀는데 이걸 잡을 길이 없습니다. 가속이 붙은 이 돌을 잡아달라고 하면서 내 머리카락을 잡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로 마음이 서더라고요.

나중에 등을 치시는데 세상의 떡이 다 네 떡인 줄 아느냐? 하나만 먹으라고 등을 치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 목사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깨달음이 온 거예요. 그분 말씀이 지금도 환청처럼 머리에 남아있어요.그리고 집으로 왔는데 우리 집 벽장에 붙은 옛날 안중근 의사가 네 손가락을 찍은 게 있어요. 친필이 아니고 벽장에 붙어있는 건데 그 글이 처음으로 눈에 띄더라고요.

‘인무원려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젊은 사람이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언뜻 해석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멀리 쳐다보면서 뭘 해야지 당장 서두르면 안 된다. 그게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목사님 말씀하고 딱 맞아떨어져요. 그래서 제 길을 찾은 거죠. 그날부터 잠도 오기 시작하고 밥도 먹기 시작하면서 다시 살아났죠.

▶ 20대 후반이셨던 것 같은데 자살까지 생각하신 원인이 뭐였을까요?

여러 가지였을 거예요. 가정 생활형편도 넉넉하지 못했고 직업도 없었죠. 연출도 하기 어려웠고 연기자로 나가기도 뭣하고, 어디 선택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요. 그렇다고 친구들 일하는데 가서 술 얻어먹기도 싫었고 또 혼자 있으니까 대화할 사람이 없고 상상이 많은 거예요. 내가 필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이 미친 거죠.

◇ 시청률 높았어도 정권에 따라 방영중단 되기도

 

▶ 수사반장을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69년도에 MBC가 개국을 했어요. 그때 제가 단역도 하고 방송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라디오 연출가 한 분이 이번에 MBC 작품을 하는데 ‘역풍’이라고 70살 먹은 노인 역할을 해 달라고 해요. 그래서 당시에 전속금을 조금 받고 69년도에 개국 작품 역풍을 하러 갔습니다. 그때부터 MBC에 몸담았는데 70년, 71년도에 연극 연출하시던 분이 수사반장 들어간다고 네가 해야 하는데 너무 젊다는 거예요.

제가 그때 30살인가, 31살였어요. 노련한 관록 있는 형사인데 네가 50살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겠지? 50살 먹은 사람보고 하라는 것보다는 내가 50살짜리를 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할 수 있다고, 머리도 좀 치고 주름도 넣고 하면 노련미가 나올 거라고 했더니 하자고,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어요.

처음에 3개월은 스폰서가 안 붙으니까 자체 제작비로 했어요. 그래서 3개월로 끝나는 거였는데 그때 치안본부에서 관할을 했어요. 치안본부 사람이 형사 문제이고 더군다나 일제시대부터 경찰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이걸 바꿔야겠다고 그래요. 민간하고 경찰의 문제를 가교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그리고 범죄예방 측면에서 또 민중의 지팡이라는 의미에서 이걸 장려해야 한다고 하는데 방송국 재정이 시원치 않으니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분들과 같이 제약회사를 다니면서 스폰서를 얻어가면서 시작된 거예요.

▶ 녹화 때 반응은 어땠나요?

드라마 첫 편에서 어떻게 시작이 되는가 하면, 원래는 제가 부산에 있었는데 탤런트 김영애씨하고 김호정 씨라고 있어요. 조경환 씨는 서울본부에 있던 사람이고. 특별수사본부를 차리는데 제가 반장으로 가는데 부산에 있는 사람 둘을 같이 데리고 가야겠다고 상부에 보고했더니 김영애하고 서형사를 붙여준 거예요.

그래서 서울로 오는 것이 첫 편이에요.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게 첫 편인데 서울로 와서 조경환 씨를 만나죠.그래서 4명이서 출발하는 수사반이 됐어요.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김상순 씨, 서울 토박이인데 발바리라고해서 서울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죠. 그렇게 해서 19년 8개월 동안 했어요.

▶ 강력수사 실화극의 효시라고 해서 시청률이 70%가 넘은 적도 있어요.

그게 일요일 저녁 7시에 했는데 그 시간에 택시가 안 잡혀서 국민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기사 분들이 밥집에서 전부 수사반장을 보고 밤에 운전을 했으니까요. 제일 러시아워였어요. 그 시간을 넘겨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 한때는 정권에 따라서 중단이 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시청자들이 이걸 왜 중단하느냐고 항의해서 다시 이어지기도 했어요.

반년 쉰 게 가장 오래 쉬었고 그것도 사건 하나를 잘 못 건드렸는데 당시 교육부 장관이 강력한 항의를 하셔서 잠시 끊어졌었죠. 말하자면 좋은 쪽으로 포커스가 가느냐, 나쁜 쪽으로 포커스가 가느냐에 따라서 논란이 많았어요. 당연히 좋은 쪽으로 가죠. 범죄 예방측면에서도 그렇고.

그렇게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정권은 그런 일이 없으니까 암행할 일도 없으니까 암행어사 끊어! 113 수사본부는 대북관계 할 거 없으니까 이것도 끊어! 간첩이 어디 있어? 수사반장, 뭘 수사하는 거야? 끊어! 이래가지고 다 끊어진 적도 있었는데 국민들이 내버려 두나요?

실제로 방송국이 문 닫을 정도로 전화가 와서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진짜 수사반장인 줄 알고 TV 수상기가 많지 않을 때니까요. 지방 같은 경우는 TV 한 대에 마을 전체가 모이기도 하잖아요. 70년대가 그럴 때니까요. 이게 TV 안에 무대처럼 움직임들이 신성화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나를 봐도 반장님으로 불렀어요. 현실의 수사반장으로 보는 거죠. 그래서 최중락 전 총경이 말하자면 고충처리반처럼 수사반에 의뢰해 오는 아픔들, 전과자들이 먹고 살 수가 없다든지 출소했는데 당장 밥 먹을 곳이 없다든지 하면 전부 수사반장으로 오는 거예요. 그걸 전부 안내해 주고 뭐라도 하나씩 사 주고 서울역으로 내보내곤 했어요.

▶ 자서전에 보면 수사반장이셨던 최중락 전 총경과도 인연이 많으셨어요. 새벽 3시에 전화하셔서 ‘당신 좀 빨리 나와야겠어!’ 그래서 현장도 많이 다니셨다고요?

현장에 가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어요. 현장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 경찰대학교에도 가고 과학수사연구소에도 수료하고 그 다음이 현장, 이렇게 3단계로 나누어서 참 오랜 시간을 다녔으니까요. 현장에 가서 죽은 시체들 보면 복수를 꼭 해야겠다는 처참함이 있죠.

그 다음에 다시 돌아서서 죽은 사람보고 범인은 바로 너야! 하고 마음속으로 지탄을 해요. 왜냐하면 남의 가슴에 대못을 친 놈이야, 이놈이...인간을 성선설로 보는 건데,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오죽 상대방한테 증오를 주었으면 죽였겠느냐, 죽은 놈한테 범행동기를 찾아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돈 몇 십만 원만 꿔 달랬더니 “이 자식아, 내가 돈이 어디 있어!?” 이러고 시침을 뗀다든지 흥부와 놀부처럼 애들이 일곱이니 쌀이나 좀...이랬는데 주걱으로 때린다든지 하면 이건 죽여야 되겠죠. 형님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렇게 모욕을 당하는 사람이 참을 수 없는 순간에 죽이는 거거든요.

우리나라 범죄율이 가장 많은 게 원한이 가장 많은 거예요. 통한범죄, 너무 아파서 죽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거죠. 가난범죄, 애환범죄가 가장 많아요.

▶ 범죄 심리 등을 통해서 사회의 현상까지 접근했기 때문에 국민들한테 사랑을 받으신 것 같아요.

국민의 아픔이라고 할까, 부조리라고 할까, 비리라고 할까, 또 사회적 환경이 잘못되어서 그런 경우도 있고 이런 것들을 사회 신문면처럼 고발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에 대통령이 좀 무서웠어요? 유신정권 때니까 머리 긴 사람이 지나가면서 도망다닐 때니까. 그때 우리들은 목숨 내놓고 가자. 사회의 아픔을 고치지 않으면, 고발하지 않으면 누가 이 사회를 다듬겠느냐고,

그걸 그냥 방송했는데 방송국 사장이 매일 떠는 거예요. 자기 목은 수사반장에 달렸다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제일 이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어요.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봤다고 하더라고요.

▶ 최불암 씨와의 인터뷰는 내일도 이어집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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