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얽힌 추억 다들 있으시죠? 용돈이라도 생기면 동네 만화가게로 달려가서 손때 묻은 만화책을 넘기면서 친구들과 키득대던그 시절이 생각나는데요.
척박하던 그 시절 만화는 우리 모두에게 꿈과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됐습니다.
만화 하나로 수많은 독자들을 웃고 울게 했던, 한국만화계의 산 증인이자 누구보다도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 영원한 청춘 백수 발바리의 만화가 강철수 씨. 영원히 청춘일 것 같던 그도 이제는 만화계의 원로가 됐습니다.
47년 동안 2000편이 넘게 만화를 그렸고, 작품 생각에 단 하루도 편히 자 본 적 없이 치열하게 세상을 맞서온,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 뿐”이라며 겸손히 대답하는 만화계의 원로 강철수 씨를 만나봅니다.
◇ 중학교 때부터 만화작가로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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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라는 표현 들으시면 어떠세요?
너무 듣기 싫어요. 대개 원로라고 하면 그 분야에서 공헌을 했다거나 하는데, 저는 별로 한 것도 없거든요. 그래서 원로라고 하면 죄짓는 것 같구요. 그냥 좀 나이 들었다는 느낌 정도죠.
▶ 만화계에서도 가장 오래 가장 많은 작품을 그린 ‘다작 작가’다 라고 하던데요. 올해로 몇 년째 활동하고 계신 거죠?
참 오래 되었네요.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이 쭉 바뀌는 동안 계속 해왔으니 한 47년쯤 되나요?
▶ 일찍 시작하셨죠?
초등학교 때 출판사에 갔더니 왠 조그만 애가 왔나 하면서 쫓겨났죠. 그러다 중학교 2학년 쯤 되니까 조금 관심을 갖더라고요. 그래도 명색이 작가인데 출판사 가면 머리 쓰다듬어주고 그랬어요. 그러고 보면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제가 진주 중학교를 다니다가 일약 출세를 해서 서울에 올라와서 고등학교를 다녔죠. 근데 학교에서도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내일이 마감이면 공부시간에 몰래 원고를 해야되는데 하다가 원고를 뺏겼어요.
교무실에 불려가서 출석부로 머리 맞고 선생님이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살아가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냐?” 라고 했었어요. 저는 좀 내성적이어서 ‘선생님, 그것이 제 밥줄입니다.’ 소리를 못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나중에는 원고를 돌려 주시더라고요.
▶ 요즘같이 빠른 세대에도 중학생 작가는 없는 것 같은데, 대단히 빨리 출세를 하셨어요?
만화가는 가수나 성우와는 달라서 많은 밑천이 있어야 그리거든요. 그림 재주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디어가 있어야 되는데 중학교 2-3학년짜리가 무슨 인생의 밑천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좀 하다가 들통이 나는 거죠. 밑천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수히 고생을 했죠. 반짝 하다가 “야, 너 저번 그린 것 하고 다른 게 뭐있어? 시작 때는 재밌더니 뒤에는 다 누구 것 베낀 거지?” 하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어른들 말이 다 맞더라고요. 어릴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인생경험을 많이 쌓아야지 작가가 되는 거더라고요.
▶ 지금까지 그린 만화가 몇 편 정도 되나요?
편 수로 하면 몇 천 편 되지만, 그것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 것이 옛날 만화가 50페이지짜리도 있고 그랬습니다. 제목은 몇 천 권 쓴 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어느 날 노트북으로 계산을 해봤더니 백만 컷트쯤 제 손을 거쳐 갔더라고요.
▶ ‘발바리의 추억’ 말고도 주요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워낙 제목들이 많아서요. ‘사랑의 낙서’, ‘팔불출’, 또 옛날 사극, 세계 명작들, 문학작품들, 하다못해 빈대가 주인공인 만화도 있었어요. 제가 안 해본 건 공주님 나오는 것만 못해보고 나머지는 다 해본 것 같아요.
▶ 그 당시 진주에서도 문화생활이 굉장히 척박하고 만화가게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옛날에는 만화가게가 가마니를 깔아놓고 보고 싶은 사람은 거기 앉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주인이 와서 책가지고 도망가지 않나 감시하고 했죠. 일어나면 바지에 가마니 지푸라기가 묻고 그랬죠. 그런데 서울에 왔더니 제가 처음 살던 곳이 마포 아현동이었는데. 만화가게에 들어갔더니 긴 나무의자에 앉아서 만화를 보는 거예요. 의자에 앉아서 만화를 보다니 하는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만화가 잘 되는 시절이 한 번도 없었어요. 늘 종이값이 오르고, 인쇄비가 오르고, TV 때문에 만화가게에 손님이 없어서 안되고, 만화가게에서 떡볶이 같은 음식도 같이 팔면서 만화가게가 비위생의 온상이다, 또 아이들이 많이 모이니까 싸우기도 하고, 옛날에는 만화를 봄으로써 애들이 나빠진다 해서 나중에는 칠대 악(惡)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만화 화형식도 하고요. 40년 그림 그리는 동안 40번 넘게 잡혀다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 만화의 주인공들을 통해 그 시대의 아픔과 추억을 그려▶ 처음 시작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건가요?
옛날에 악극단, 서커스단이 마을에 오고 했는데요. 그 때 배삼룡 씨 등이 나와서 막간극을 하고 했거든요. 배우들이 총을 쏘면 화약 냄새가 나고 사람이 팍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막간 배우들이 노래도 하고 내가 저런 것을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만화가게에 갔더니 만화가 있는 거예요. 만화는 무대보다는 설정이 쉽지 않습니까? 연필로도 가능하고요. 내가 하면 이 작가들 보다 나을 것 같더라고요. 그 때 김정래, 박광현 등이 유명했죠.
그런데 그것이 만용이죠. 서울에 왔더니 선배 되는 분이 “이런 독자들까지 기어 올라와서 위협을 하니 우리가 먹고 살 수 있겠느냐?” 라고 했었어요. 어쨌든 그 것이 시작이 된 거예요. 될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한 대신 아주 죽을 고생을 했죠.
▶ 그러다가 잘 되신 것은 언제부터예요?
고등학교 2-3학년쯤 되니까 출판사에서 돈도 천원 주던 것을 천오백원, 삼천원 주더라고요. 그리고 고2가 되니까 술집을 데려가더라고요. 그 때는 머리를 박박 깎아서 극장가서 잡히면 정학 맞고, 당구장은 모자쓰고 다니고 그랬거든요. 근데 고2때 요정을 갔었어요. 출판사 사장이 데려갔어요. 모자 쓰고요. 제가 태어나서 첨 가봤는데 방에 병풍이 있고, 멋있는 데 앉혀놓고 술도 먹을 줄 몰랐는데 그 날 청주를 먹었던 것 같아요. 출판사 사장이 잘 부탁한다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여흥을 즐길 줄 아는 나이에 가야지 재밌죠, 고2짜리가 가서 뭘 알았겠어요? 그 출판사 사장님이 아직도 살아계신데, 그 분은 자기 사람 만들려고 그러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좀 책이 팔리면 출판사 여기저기서 데려 가거든요. 그래서 예를 들어 편당 삼천원, 전속 몇 년 으로 돈 주면서 계약을 하고 포섭을 하는 거죠.
▶ 그 당시 삼천원 정도면 어느 정도 금액이었나요?
자세히 기억은 안나는데 대학등록금이 만원 정도 였어요. 그리고 그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 나오는 영화를 보러 택시를 타고 대한극장을 가는데 기본요금이 30원이 된다고 했으니 삼천원이면 큰 돈이었죠.
▶ 발바리가 나온 것은 언제죠?
발바리는 80년대에 나왔고, 발바리 선배가 있습니다. 1974년도에 ‘사랑의 낙서’를 할 때인데 그 때 참 어려웠죠. 발바리는 88년에 나왔습니다. 한 주인공이 시대에 따라서 계속 성격이 바뀌었고, 또 얘기가 여자와 사랑을 하는 이야기보다 이를테면 시위가 많던 시절에 왜 시위를 했던가, 왜 장발 때문에 잡혀가서 매를 맞아야 하나 하는 어떤 시대적인 청춘일기인거예요. 그 때는 여자랑 남자랑 첨 만나서 손잡으면 부도덕한 것으로 보던 시대였거든요. 근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거든요.
그런 것들을 저 같은 사람이 정사(正史)는 아니고 야사(野史)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런 편편들을 기록하는데, 그냥 기록하면 재미없으니까 약간 유머를 곁들이고, 로맨스와 슬픔과 사랑얘기를 곁들이게 되는 거죠. 또 사랑 얘기는 꼭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거든요. 삼각관계, 사각관계가 나타나기도 하고, 포장마차에서 위로하다가 엮이게 되고 하는 시대적인 상황들, 정치적인 것도 약간 묻어나고 하게 된 거죠.
또 저희 발바리 중에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 아버지가 투기꾼이에요. 그 부모가 투기를 해서 엄청나게 돈을 버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한테 돈을 막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부모는 돈은 들여놓고 자식은 나가버리는 거예요. 자식은 돈이 많으니까 나가서 술먹고 여자 만나고 하는 일종의 시대적인 현상인 셈이죠. 그러니까 좀 좋지 않은 집안에서 유학 보내놨더니 결국은 타락해서 공부도 안하고 마약하고 하는 식으로 제 주인공들이 시대적인 양태를 남자와 여자로 나타내서 보여주는 거죠. 근데 그걸 그냥 보여주면 안 보니까 재밌게 그리다 보니까 그런 작품이 나온 거죠.
▶ 혹시 이 작품은 내가 졸작이었다 싶은 것들도 있으세요?
저는 대개 밤이나 새벽에 그리거든요. 그리고 대개 스토리텔러가 있는데, 저는 거의 99.9% 는 제가 쓰고 그렸거든요. 그러니까 남들보다 힘이 많이 들죠. 근데 다 끝나면 보기도 싫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린 만화가 집에 별로 없습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한 번 지나고 나면 다 버리고 싶어요. 그나마 독자들이 봐줘서 자식도 키우고 밥도 안 굶고 살아왔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이런 것을 창피하게 어떻게 냈을까 싶고 한 것이 오히려 오랫동안 안 굶고 산 것 같아요. 다 해놓고 보면 어떻게 이렇게 했을까 방송하는 분들도 비슷한 심정일 거예요.
제 자식들도 제 만화 못 보게 감춰놓고요. 그럴 정도로 너무 부끄럽고, 밤새서 작업하다보니 틀린 글자도 나오고 그렇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늘 불만인거예요. 너무 불만이 쌓이다보니까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가고, 여러 가지 사례를 연구하고 저 혼자서 꾸밀 수 없으니까 많이 돌아다니게 되고, 그러니까 밑천이 많이 든다는 얘기예요.
▶ 그런데 그런 대중성 있는 작품을 하다보면 너무 통속적이다 라는 비난도 있으시죠?
소위 고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단순수치로 따져볼 때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으면 영어로 이야기 해야지 우간다 말로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못 알아듣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서 대중성에 영합하는 거고요. 대중성에 영합을 하면서 고상한 것을 넣으려고 하는 것이 이상향이죠. 하찮은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괜찮은 얘기도 많고 좋은 메시지도 있더라 하는 것이 말하자면 목적이죠.
▶ 그런 분위기 때문에 70-80년에 사회악이다 해서 검열기준도 있고 했는데, 이것이 어떤 정치적인 색채 때문에 그랬습니까? 왜 사회악으로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었죠?
일부 입김이 센 사회단체들이 있었죠. 그들의 말도 들어보면 또 그럴 듯 합니다. 애들이 공부는 안하고 만화를 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대개 저도 그랬지만 그냥 만화를 봅니다. TV가 좋고 나쁘고 어떤 의식에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무조건 집에 오면 TV를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시대에는 생각이 열리지 않은 분들이 많아서 염속주의식의 단순 발상이 참 많았죠. 지금은 참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는 사회거든요. 근데 옛날에는 남보다 앞서가면 꼭 불려 다니고 매맞고 그랬어요.
60-70년대에는 성인 만화가 없었어요. 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인 거예요. 그래서 초등학생인 주인공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이 나오면 다 음란하다고 다 걸려 갔어요. 그래서 원고를 뺏기고 빨간 줄을 긋고 해서 제가 싸우다가 막 찍히고 반사회주의자니 온갖 욕을 다 먹었죠.
또 ‘복수’ 이런 것도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몬테크리스토 백작 책을 가져가서 “이것이 학교에서 보라는 세계 명작인데, 복수 이야기입니다.” 했더니, “당신 복수하고 그 복수는 질이 다른데, 어디 건방지게 세계명작과 비교를 하느냐?”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질이 낮든 방법이 치졸하든 복수는 복수입니다.”라고 했던 적도 있죠.
또 뱀도 표지에 못그리게 했어요. 징그러운 파충류가 표지에 등장해서 애들 정서에 심대한 지장을 주니까요. 다 그려 놓은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서로 타협을 해서 “통과를 시키는 데 대신 뱀의 목에 리본을 달아라” 라고 하던 그런 시절이었죠. 우리는 만화라는 것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이해가 덜 되는 분들이 많아서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 요즘은 오히려 창의력 때문에 만화를 많이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작 그랬으면 좀 더 많은 선수들이 나타났을 텐데요. 거의 만화로서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놓고 만화 한 편 잘 만들면 천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그 열매만 강조를 하는 거예요. 다시말해 좋은 토양에 씨를 뿌려서 그 맺어진 열매를 좋은 쪽으로 활용하도록 그런 시작부터 끝까지 도와주고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열매만 따지는 거예요. 지금 만화가 다 망하고 난 뒤에 일본만화가 들어와서 다 쑥밭이 되고 또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거든요. 일년에 수천 명의 만화학과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갈 곳이 없어요. 그래도 가수나 성우는 시험쳐서 뽑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만화계는 그런 것이 거의 없거든요.
▶ 그래도 이현세 씨 등 아주 대단한 스타급 작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몇 명 있는 것을 가지고 괜찮다고 해서는 안되죠. 만화영화 하는 것도 그 척박한 환경속에서 뛰어난 천재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일부 극소수죠. 대개 게임산업으로 다 가고 말이죠. 본래 작은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이 작은 출판물, 작은 다락방에서 출발되거든요. 그런데 다락방 다 없애버리고, 펜촉도 다 사양 산업이 되어버렸어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만화 그리면 불량 청소년이 되는 거예요. 그런 모든 악재가 모여 문화 하나를 죽인 셈이죠.
▶ 그러면 만화를 그리시는 분들한테도 어떤 부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요?
없지 않죠. 제가 그린 만화도 들어가겠지만 작가가 만화를 그려서 정말 재미있는 것도 있었지만 졸작도 있거든요. 근데 졸작이라는 것은요, 음식처럼 유해한 독이 들었다거나 불량품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것만 아니면 다 시장에서 해결이 되는 거예요. 단, 옛날에는 용공사상이니 패륜아가 된다느니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건 약간 졸작을 엄숙주의 교수들과 사회단체들이 그런 쪽으로 몰아서 이런 만화는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괜히 종이만 낭비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만화라는 것에 너무 책임의식을 강조하는데, 사실 만화라는 것은 너무 교과서 같이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나서 TV를 보거나 만화를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는 것으로 그 피곤한 것을 풀어야지, 하루종일 학교에서 시험치다 오는 애를 또 교과서 같은 만화로 철학을 따지고 하는 건 고문이고, 만화라는 존재가 필요 없죠.
▶ 들으시는 분들이 ‘강철수 씨가 스타 만화가신데, 불만이 엄청 많으시네.’ 하는 지적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그만큼 아쉬운 부분이 많으신 건가요?
제가 만화가를 오래 했으니까요. 저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잡지가 잘 안되면 자기 밥그릇이 줄어드니까 그런다 싶겠지만, 제가 속한 부분 말고 단행본 얘기를 해드릴께요. 단행본은 만화가게나 대여점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요. 거기는 만화를 한 권 사면 죽을 때까지 그 책을 대여할 수 있습니다. 한국 만화계가 안 되는 이유가 그렇게 대여점이 만화 한 권으로 오랫동안 대여를 하니 작가들이 발을 붙이고 생활을 할 수 가 없는 거예요.
작가들이 수입이 삼십 만원, 오십 만원도 안되고 그러다보니 게임업체로 떠나고 하게 되니 무슨 아이디어가 나오겠어요. 노래방에서는 노래 하나를 해도 그 중에 얼마는 가수한테, 그 중에 얼마는 작곡가한테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만화는 그 한 권이 시중에 돌아다니면 그 책이 불타 없어질 때까지 대여점 주인이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화는 살 수가 없는 사회예요.
◇ 가족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 고등학교 2학년 때 벌써 스타 만화가가 되셨는데, 여성과 데이트 할 시간은 있으셨어요?
ㄴ
일하느라고 별로 만날 새가 없었죠. 그리고 그 당시는 월급으로는 집 한 채 사기 어려워서 다 셋방살이하고, 홍수나면 책 다 떠내려가고, 집에 비가 새서 양동이로 받쳐놓고 살던 시절이라 겨우 80년대 들어서 집 한 칸 만들고 하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데이트 할 시간보다 술을 많이 먹고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 만나던 것이 밑천이라면 밑천이죠. 그것이 말하자면 저의 보물창고인 거예요. 특히 누가 싸우던지 치정에 얽혀 갈등을 겪는다든지 하면 저는 거기에 빠져 사는 거예요.
카운슬러 일을 하시는 분들이 그런 남의 힘든 얘기를 듣다보면 불행해진다고 하는데, 저는 다행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스운 얘기를 만들면서 덜 불안해졌죠. 하여튼 어떤 남녀가 있었는데 만나서 잘 살았다 하면 그건 얘기가 안되는 거예요. 반드시 갈등이 있어야 되는 거고, 헤어질 뻔 하다가 다시 만나고 해야 재미있거든요.
▶ 그럼 결혼은 어떤 분하고 하신 거예요?
그런 것은 좀 비밀로 하고 싶네요.(웃음) 왜냐면 야구선수들도 보면 시즌이 시작되면 집에를 못 들어가서 부인들이 고생을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도 비슷한 것 같아서 소재 없으면 나가고 맨날 밤새고 술 먹고 들어오니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참 미안하고 면목이 없죠. 대개 여자의 행복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앉아서 얘기도 하고, 가끔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고 해야 하는데, 만화하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 세계밖에 없어요. 그리고 신경이 많이 곤두 서있다 보니까 아내나 자식들이 슬슬 피한다고요. 제가 그럴 때마다 가책을 많이 느끼면서 살았는데요.
만약에 제가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반대급부로 준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달게 받고는 살았지만 부인한테는 참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저는 사과하는 사람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해요. 다 망해놓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해서 다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점수를 딴다거나 만회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다만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저는 자식교육이 같이 많이 뒹굴고 돌아다니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논술 기술을 가르치고 영어 단어를 가르치는 것보다도 같이 다니고 산에 다니고, 공부 못해도 된다고 해요. 공부 못해도 된다고 하면 오히려 더 공부 잘해요. 그런데 저는 자식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거예요. 이제는 애들이 커서 사회인이 되다보니 걔네들도 바빠서요. 서로 만날 기회가 없는 거예요. 내가 뿌린대로 그대로 거두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식들이라도 크면 저와 같이 지내주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관심은 많았는데 같이 놀아주지 못한 미안함은 있죠.
▶ ‘호랑이 선생님’ 이라는 드라마도 대중들에게 참 친근했죠?
그 PD분도 만화가가 쓰면 좀 재밌지 않을까 싶어서 장난같이 시작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시청률이 좋았죠. 4백 몇 회를 썼었어요. 참 많이 썼죠. 한 시절 몇 년간 거기에 청춘을 바쳤죠. 그러다 보니까 또 방송하고 인연이 닿아서 베스트 극장, 테마 게임 등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지 만화나 드라마나 노래나 소설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 전설처럼 남겨지는 주인공 인물이 있다는 것이 강 선생님한테는 아주 대단한 재산이시죠?
그런데 우리 주인공은 그렇지 않은데 ‘발바리’가 자꾸 강간범으로 나오니까 좀 불편하더라고요. 아마 제일 첨에 쓴 기자분이 상징성이 있으니까 재미로 붙였을 거예요. 그런데 자꾸 나오니까 좀 그렇더라고요.
▶ 당구 400을 치시고, 아마 바둑 6단이나 되신다면서요?
의사들이 머리를 많이 쓰다보면 반대쪽 뇌를 많이 써야 균형이 잡힌다고 하더라고요. 머리를 식히다 보니 술 마시거나 당구를 치거나 하다보니 솜씨가 늘은 거예요. 그리고 제가 보면 이런 쓸데없는 일, 잡기에 소질이 있나봐요.
◇ 세계 60여개국 여행하며 많은 것 배워 ▶ 그런 것에 비하면 여행 취미는 정말 건전한 것 같은데요.
술 먹다보면 자꾸 담배도 피게 되고 공기 탁한 곳에 있게 되서 취미를 바꾼 거예요. 당구 치다보면 돈도 많이 쓰고 게임이라는 것이 다 하다보면 다투기도 하고요. 그래서 여행을 다니게 됐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특혜받은 것이라면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남은 재산은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 특히 일본을 많이 가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일본은 우선 가까우니까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점과, 치안이 잘 되어 있고, 문화가 비슷하고, 음식이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고생할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세대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들이 참 안 좋습니다. 항일이니 반일이니 해서요. 그래서 제가 고3때부터 일본어를 많이 공부했는데 공부한 근본적인 이유가 일본사람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싸우려고 배웠어요. 싸우려면 일본어를 잘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 싸울 일도 없어지고 그 때 일본어를 배운 덕에 일본을 많이 가죠.
▶ 60여개국을 여행하셨다던데, 참 많이 하셨어요?
참 많이 다녔죠. 그래도 안 간 곳이 더 많더라고요. 저는 많이 간 줄 알았더니 지도를 펴 보니까 안 간 곳이 많더라고요. 60개국 좀 넘게 갔을텐데 사실은 그건 여행도 아니에요. 예전에 저희들은 비자도 안나오고 여권도 안 나오던 시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외교관이나 상사원 갔다온 분들이 유럽 다녀온 얘기를 하면 “형, 어땠어? 로마 갔었어?” 하고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선배 하나가 “로마? 아마 갔었을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유럽은 막 일정에 쫓겨서 세 나라, 일곱 나라도 가고 하거든요.
본래 여행은 제가 감히 말씀드리지만 딱 한군데만 가는 거예요. 여의도 하면 여의도 가서 일주일 있는 거예요. 그래야 거기 사는 할머니와 얘기도 나눠보고, 여의도가 어디에 붙었는지 다녀와서 소개도 해주고 그러죠. 그런데 여기 와서 사진찍고 다시 또 금방 다른 곳으로 가고 하면 의미가 없어요. 여행 가서는 거기는 어떻게 사는지 보고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가를 살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요즘은 한류라고 해서 한국 사람들을 예전보다 알아보고 술을 마시다보면 술을 들고 와서 이것 먹으라고 주고 하는 것을 보고 감동도 많이 받고 했죠.
▶ 그렇게 다니셨던 곳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은 어디고, 어떤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만 않으면 가는 곳마다 다 좋던데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먹고 사느라고 바둥바둥 살아가더라고요. 인도에 갈 때도 거지가 많고 가난하다고 들었는데 뉴델리 갔더니 시내에 골프장 18홀을 가진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빈부격차는 어디를 가나 다 있고, 어느 나라나 먹고 사느라고 바둥바둥 살더라고요. 저는 어느 나라도 다 좋고, 어느 나라 음식도 다 먹을만 하더라고요.
▶ 그런 것들이 다 만화의 소재로 응용되는 거죠?
어느 동네를 가고 어느 국가를 가든 다 애정을 갖고 보면 좋고 맛있고 다 친하게 잘 대해줍니다. 그런데 삐딱한 눈으로 보면 반드시 저쪽에서도 좋지 않게 나옵니다.
▶ 60여개국을 가셨는데, 그러면 사모님과 같이 가신 나라는 몇 나라쯤 됩니까?
뭐, 한 서너 나라 정도요.(웃음)
▶ 만화가 분들을 세대별로 나눈다면 강선생님은 몇 세대쯤 되시는 건가요?
제가 중학교 때 시작할 때 선배님들은 40-50대였거든요. 그러면 한 20-30년 이상 차이 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만화가의 세대는 거의 5년에서 10년이 한 세대 인 것 같아요. 10년도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유행이 5년이면 확 지나가 버리고 요즘은 사회전반이 30대 중반만 지나가도 원로가 되는 것 같더라고요. 40만 넘어가도 일이 없어 노는 작가들을 보고 좀 충격적이기도 했죠. 그런데 거기에 맞물려 있는 고리가 만화사업이 잘 안되고 경기가 없으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 고우영 선배와 함께 단속을 피해 도망다니던 시절도 있어▶ 고우영 선생님은 선배님 되시죠?
그럼요. 하늘같은 선배였죠. 나이도 한 10년 정도 차이가 났죠. 제가 고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추모사를 썼거든요. 그런데 추모사를 함부로 쓸 것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밤새도록 썼어요. 참 힘들게 썼는데, 그래도 고 선생님은 제 추모사에 만족하셨을 거예요.
▶ 원래 고우영 선생님은 고전을 그리라고 하셨는데, 그건 싫으셨다고요?
독자들도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니까 저는 좀 다른 길을 가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어떤 세상에 있는 이야기를 그리기는 싫어요. 아무도 손 안 댄 얘기를 하고 싶죠.
▶ 고우영 선생님의 재치나 재능은 정말 뛰어나셨죠.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분이죠. 필설로 옮길 수 없을 정도죠.
▶ 고 선생님에 얽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둘이 예전에 체포령 떨어져서 잡혀다니고 했는데 도망을 다니다가 그분은 미리 자수를 해서 새마을 연수원에 가서 교육을 받고 나왔어요. 저는 그것도 싫어서 친척집으로 도망가서 숨어있었죠. 간첩처럼 숨어서 밥을 몰래 조달해서 먹고 했는데, 나중에 그 분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돈도 좀 있으니까 해외로 도망가자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 그 때 왜 그렇게 잡아갔나요? 무슨 죄목이었습니까?
길에서 만화나 주간지를 팔던 시대가 있지 않았습니까? ‘고우영 삼국지’, ‘사랑의 낙서’ 등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잘 팔리니까 이상하고 야하고 저질 작품들도 많이 나오고 했죠. 그래서 그 단속이 시작된 거예요. 근데 그런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저희 오리지날들만 다 잡힌거예요. 그리고 저희같은 사람은 신원이 확실하고 주거가 확실해서 증거 인멸의 우려도 없잖습니까? 그래도 본보기로 저희 둘이 잡혀간 거예요.
불량 만화가 둘을 잡아서 혼쭐을 냈다는 소위 전시효과로서의 상징성도 있지 않습니까? 요새 같으면 고우영 선생님 만화를 보고 잡아갈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 좋은 만화를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위안을 삼고 살아갔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숨고 도망 다닐 일도 아니었는데 그 때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지 않을 때였어요.
▶ 경찰서 유치장이나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셨나요?
그럼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갑차고 잡혀갔었죠. 잡범들하고 같이 잡혀있었죠. 그 상황에서도 형사들이 와서 싸인해달라고 자기 그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소매치기나 폭력배들하고 한 방에 같이 있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저를 알아보고 와서 인사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구속은 안되고 혼쭐만 내서 보낸거죠. 믿지 않으시겠지만 어떤 때는 형사가 저를 책상 다리에다가 수갑을 채워놓은 적도 있었어요.
▶ 청운의 꿈을 안고 만화계에 입문하는 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된다고 말해주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 아주 조건이 나쁘다는 것을 잘 알고 해야 할 부분도 있죠. 갑자기 스타 만화가가 되는 것들을 보면서 나도 될꺼야 하는 생각은 접고, 앞으로 한 5년에서 10년 정도는 고생을 해야 할 거예요. 지금 일본만화가 들어와서 일본만화도 안 팔릴 지경이 되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1억권에서 10억권쯤 돌아다니고 있으니 우선 물리적으로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유행은 자꾸 바뀌고 계속 보다보면 또 안보게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물리적으로 보면 5년-10년 정도는 지나야 좀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또 대통령이 나서고 해서 문화적인 면으로도 시선을 주시고 하면 급격히 좋아질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고생을 한다는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 그래도 요즘 ‘토지’도 만화로, 어렵게 느껴지는 신화도 만화로, 와인 만화까지 나올 정도로 순기능의 추억의 만화를 팬들은 앞으로도 많이 기대할 겁니다.
지금 후배들이 전시하는 곳에 가끔 가보면 비록 고생을 하고 있고 전망은 흐리지만 그 솜씨들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래서 이 고비를 넘기면 좋은 시절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 마지막으로 작품활동 계획 있으시면 말씀해주시죠.
뭘 해야지 해서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번쩍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글을 쓰든지 만화를 그리든지 하거든요.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할 것이고 또 건강이 허락해야 가능한 것이니까 건강한 생각을 늘 갖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나쁜 나이든 사람이 되지 않게 해야겠죠.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