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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권리세, 한 재일 한국인 소녀의 부러진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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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으로 태어났으니 한국문화를 배우고 싶은 욕심이 늘 있었습니다."

걸그룹 레이디스코드 리세(본명 권리세)의 빈소(사진=황진환 기자)

 

오늘 아침 발인식을 가진 재일한국인 고 권리세의 생전 고백입니다.

"어려서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좋았고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시작하고 싶다"고 줄곧 생각해 오던 그녀였습니다. "이유는 없지만 늘 한국에 끌렸다"는 그녀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정체성을 소중히 간직한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 말과 우리 글, 우리 문화를 배우고 싶어 조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일본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든, 하지만 이승만 이후의 대한민국은 철저히 외면했던 그 학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북한의 도움을 받았고, 이제는 그 도움이 끊겨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그 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송편을 빚고 한복을 입으며 한국 노래를 부르며 조국에 대한 애정을 항상 간직하며 자라난 그녀는, 영정 사진에서도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사람들은 잘 압니다. 그 차별과 질시는 심지어 조국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리세는, 그리고 그녀의 부모들은 그 많은 어려움들과 당당히 맞서 그녀를 한국인으로 키워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그녀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한 지상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날 때부터 악플은 그녀를 늘 쫓아다녔습니다. 한국말이 서툰 것이 죄였고, 조총련계 학교라고 잘못 알려진 조선학교에 다닌 것이 죄였고, 초등학생 때 한국무용 잘한다고 뽑혀 북한 갔던 것이 죄였습니다. 심지어 귀여운 볼살마저도 북한의 미녀 응원단을 닮았다면서 악플러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나라를 사랑했던, 그래서 순수한 한국인으로 자라났던 그녀를 그렇게 대했습니다.

오로지 진정성과 노력으로 그 아픔을 딛고 레이디스코드란 걸그룹으로 데뷔하자, 이제 선정성 논란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갓 스물이 넘은 그녀들을 꼭 그렇게 벗겨야 했는지, 그렇게 자극적인 춤을 추지 않으면 정말 주목을 받지 못하는 건지, 한복에 풋풋한 볼살이 예쁘기만 했던 리세가 성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가슴아팠던 사람은 정말 없었던 걸까요? 악플은 성격이 바뀌어 그렇게 또 그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대학에서 가장 선호하는 걸그룹에 그녀가 속한 레이디스 코드가 꼽히며 대학의 숱한 가을 축제들이 그녀의 노래와 춤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의 대중연예산업은, 그들의 살인적인 관행은 결국 그녀의 목숨을 빼앗아 갔습니다.

사고 직후 소속사가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빗길에서 차량 뒷바퀴가 빠졌고, 이에 여러 차례 회전을 한 뒤 가드레일을 들이박았다고 했고, 차량을 제공한 렌트카 업체는 새 차여서 정비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고, 차량 제작사는 차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부주의한, 혹은 무리한 운전이 바퀴까지 빠져나갈 만큼의 사고를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9일 오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그룹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故 권리세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지만 실은 모두가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새벽 1시 23분에 무리하게 이동하는 스케줄을 만들지 않았거나, 렌트카를 인수할 때 철저히 정비를 다시 했거나, 렌트카 업체가 더 꼼꼼한 정비를 규정으로 실행했거나, 차량이 더 안전했거나 에어백이 어떤 상황에서도 제대로 터졌다면 리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올 추석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길거리에서 맞이한 추석으로, 바로 전날 리세가 세상을 떠난 추석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 비극적 추석이 다시 또 성탄에, 설에 반복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리세를 죽게 한 사고의 원인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죽게 만든 원인도 제대로 규명될 것 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하나로 귀결됩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어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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