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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으로 위장하고 양민학살 조사단에게 총을 갈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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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84]'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의 잔인하고 파렴치한 행각

◈ 자칭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일본도를 휘두르며 양민들을 학살하다

진압군의 명령에 따라 황급히 보따리를 싸매고 여수 서국민학교에 모이는 시민들. (사진=선인출판사 제공)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일주일 후인 1948년 10월 26일.

진압군은 3차례 작전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연락기를 띄운 가운데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밀고 들어갔다.

장갑차를 앞세운 진압군의 무차별적인 박격포 공격으로 여수시내는 초토화되었다.

시내로 들어온 진압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소탕작전을 벌였다.

반란군은 이미 지리산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진압군의 공격은 비무장의 여수시민들을 향했다.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은 제일 먼저 시민들을 공공장소로 모이라고 명령했다.

진압군은 모여있는 군중 가운데 사건 가담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은 학교 건물 뒤편에 마련한 즉결처분장에서 개머리판, 참나무 몽둥이, 체인으로 죽이거나 곧바로 총살했다.

진압군은 시민들을 국민학교 등에 모이게 한 다음 부역자를 색출했다. 옷이 벗겨진 혐의자들이 경찰과 우익인사들로부터 심문을 받고 있다. (사진=선인출판사 제공)

 

당시 여수탈환작전에 참가했던 고 이영희 교수의 회고를 들어보자.

"운동장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체가 즐비했다. 반란군과 진압군 쌍방의 희생자는 대부분 젊은 민간인이었다. 운동장 울타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먼 발치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학생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나버렸다.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한 후회와 공포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울타리 밖에서 울부짖는 남녀노소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중앙국민학교(현 종산초등학교) 교정에서는 한 희한한 인물이 설치고 있었다.

바로 부산에서 부하들을 데리고 달려온 김종원 5연대장이었다.

그는 배를 타고 여수 앞바다에 도착한 뒤 무모하게 상륙하려다 많은 부하를 잃었고, 마구잡이로 시내에 박격포를 쏘았다가 국군 다수를 살상해 비난을 받은 터였다.

김종원은 상륙작전 실패를 분풀이 하듯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혐의자들의 목을 뎅강뎅강 잘랐다.

일본도를 휘두르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민간인들을 사살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추악했던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인물 3명 중 하나로 꼽히는 김종원.

 

자칭 '백두산 호랑이'라는 김종원은 일본군에 제발로 들어가 하사관으로 복무하면서 뉴기니아 전투 등에 참가했다.

거기서 식량이 떨어지자 인육까지 먹은 적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한 김종원은 군대에 들어가 부하들과 체포된 혐의자들을 너무 잔인하게 굴다가 해임과 복귀를 반복했다.

그의 부대에 배속된 미 고문관은 "부하에게 가혹했고 전투에는 비겁했다.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장병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고 기록했다.

여순사건이 끝나고 마산 16연대에 있던 시절에는 마산 시내 전 중학생을 마산중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놓고는 기관총을 단 짚차를 타고 나타나 "반민특위에서 나를 잡으러 오면 3초 안에 모두 쏴죽이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경남경찰국장으로 있던 김종원은 참모회의에서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고생을 한다는 보고를 받자 바로 지시를 내렸다.

"수사과장~ 당장 나가서 '인플레' 잡아와"

◈ 거창양민학살사건 폭로되자 범죄 은폐에 앞장서다

빨치산 소탕을 위해 경찰이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선인출판사 제공)

 

1950년 2월 10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들어왔다.

이미 빨치산은 경찰병력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고는 산으로 도망간 후였다.

3대대는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며, 과정리, 중유리, 와룡리, 대현리 주민들을 과정리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

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교실 4개와 복도에 꽉 차 있었다고 한다.

이튿날 날이 밝자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을 가려내 내보낸 뒤 모두 박산골로 끌고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동시에 마을집도 모두 불살라버렸다.

박산골에서만 719명이 학살됐다.

태반이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이였다.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세워진 조각물. 학살 당시를 재현했다. (사진=거창사건추모공원 제공)

 

9연대 3대대는 이런 식으로 빨갱이 대신 무고한 양민들을 연이어 학살하며 이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9연대 본부에 187명의 공비와 통비분자들을 소탕했다고 보고했다.

3월 초순경 청년 2명이 국회 본회의가 열리고 있는 부산극장에 들어가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을 찾아갔다.

신중목은 이들로부터 "거창군 신원면에서 1,000명의 주민들이 집단총살을 당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를 들었다.

그는 참극 현장으로 달려가 사실을 확인한 후 3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를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따라 국회와 내무. 법무. 국방부 인사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이 4월 6일 현지에 파견됐다.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운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겸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인 김종원은 서둘러 학살 현장으로 뛰어가 어린이들의 시체를 2km 떨어진 계곡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합동조사단이 거창 현지에 도착하자 숙소마다 전화를 걸어 "신안면에 수백 명의 공비가 나타났습니다"하며 겁을 주었다.

제16연대 부연대장을 맡았던 김종원(왼쪽 끝)이 진주지구를 시찰하고 촉석루에서 기념촬영한 사진.

 

다음 날 조사단이 신원면을 향해 산길을 가고 있을 때는 김종원의 지시를 받고 공비로 가장한 병사들이 따발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 담화문을 통해 "이 사건은 공비와 협력한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거짓 해명을 했다.

그러나 워싱톤포스트를 비롯한 외국 언론들이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자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진상조사를 실시한 뒤 학살혐의자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9연대장 오익경은 무기징역, 한동석 3대대장은 징역 10년, 김종원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1년 안에 특사나 보석으로 풀려나 현역으로 복귀했다.

김종원은 경찰로 신분을 바꿔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을 거쳐 전북과 경남,경북경찰국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한다.

◈ 경찰 총수로 올라선 김종원, 장면 부통령 암살사건의 배후로 암약하다

서로 당은 다르지만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동반 당선된 이승만(왼쪽)과 장면. 이승만은 장면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이승만은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하자,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장관에 이익흥, 치안국장에 김종원을 임명했다.

이익흥은 일제 때 경찰서장을 지낸 일급 친일파이고, 김종원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에 거창양민학살 은폐사건으로 수감됐던 인물이다.

"탕!~"

넉달 후인 1956년 9월 28일 오후 2시 30분경,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한 방의 둔탁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장면 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막 시공관 동쪽 문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에 누군가 권총을 발사한 것이다.

다행히 총탄이 왼손을 스쳤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살인미수에 그쳤다.

해링턴 권총을 쏜 범인 김상붕은 민주당원들에게 붙잡혀 뭇매를 맞고 갑자기 나타난 김종원 치안국장에게 넘겨졌다.

실패해서 그렇지 모든 상황이 백범 김구 암살 당시와 비슷했다.

김상붕은 권총을 쏜 직후 "조병옥 박사 만세~"라고 외쳐 사건을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내분으로 몰고 가려는 서툰 연극을 연출했다.

저격사건 직후 경호원의 부축을 받고 있는 장면 부통령.

 

김종원은 김상붕을 병원에 입원시킨 후 "김상붕은 민주당이 당파싸움만 하는데 실망했고, 특히 장면은 우리의 원수인 일본과 친하려고 했기 때문에 암살하려 했다"고 엉터리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가 진전되면서 김상붕의 배후에 최훈, 그 뒤에 이덕신 성동경찰서 사찰주임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밝혀냈다.

최훈은 법정에서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라고 생각한다"고 폭로했다.

이렇게 해서 김종원은 또다시 법정에 끌려나오게 된다.

법정에서의 그의 태도는 정말 파렴치했다.

그는 판사에게 "재판 공정히 하시오~ 나를 근거도 없이 배후로 몰고 있어. 법정도 못 믿겠어. 맘대로 해!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헌병사령관이었어!"라고 떠들어 방청객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미국으로 도주하자, 그때서야 재수사가 시작돼 배후가 밝혀졌다.

시작은 연로한 이승만이 죽을 경우 자동적으로 대통령 자리가 장면 부통령에게 넘어갈 것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후계자 이기붕이었다.

이기붕의 지시를 받은 측근인 자유당 간부 임흥순이 이 음모를 실행하라고 이익흥 내무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익흥은 김종원 치안국장에게 지시하고, 김은 휘하의 특정과장 장영복과 중앙사찰분실장 박사일에게 지시했다.

이 지시는 다시 시경 사찰과장 오충환을 거쳐 이덕신에게 넘어갔다.

김종원이 1957년 1월 22일 소환 심문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도한 신문 기사

 

결국 이덕신이 총대를 메고 범행 실행자를 물색한 것이다.

김종원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복역 중에 당뇨병에 걸려 석방됐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돼 실명상태에서 암흑의 상태에서 살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김종원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언젠가 어느 군인과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그 군인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김종원, 원용덕, 김창룡, 이 세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정말 정확하고 명쾌한 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셋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악명을 떨쳤습니다.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 헌병사령관, 군 특무부대장을 지낸 사람들로 정말 많은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역사에 기록됐습니다"

이 세 사람의 악행이 신생 대한민국의 출발을 어둡게 덧칠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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