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대한민국 산과 계곡 중에서 피서지로 뛰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련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지리산 뱀사골 계곡과 설악산 백담사 수렴동 계곡일 것이다.
백두대간이나 전국의 유명산을 섭렵하는 등산가가 아닐지라도 걸을 수 있고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보면 후회하지 않을 등산로이자 산책로다.
출발점은 백담사다. 전국의 고찰 가운데 험준한 협곡 사이에 자리 잡은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님의 침묵'을 쓰며 은거했던 사찰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비리로 유배된 절로서도 유명하다.
지난 8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근황 취재차 백담사를 찾은 이후 25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백담사 주변 경관과 사찰 앞 계곡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리가 새로 건설된 듯이 보였고 계곡에는 조그마한 돌탑들이 아주 많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방문객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던 비닐 천막 자리엔 찻집과 템플스테이용 방들이 들어서 있었다.
백담사 계곡 수많은 돌탑들 (사진=김진오 기자)
백담사 전경 (사진=김진오 기자)
백담사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25년 전을 떠올려 보기라도 하듯 경내를 슬쩍 둘러본 뒤 백담사 앞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백담사 계곡을 건너 등산로에 들어섰다.
등산로라고 하기엔 산책로다. 영시암까지의 3.5km 구간이 군데군데 돌길과 10m 가량 높이의 언덕 아닌 언덕길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산책로에 가깝다. 어린이는 말할 것도 없이 6, 70대 어르신들도 큰 부담을 갖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산책로 오른쪽으로 보이는 백담사 계곡에서는 크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계곡물 소리가 들리고 계곡 양 옆으로는 20~30m짜리 적송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있다.
산책로 사이사이에 어김없이 설치된 폐타이어 데크는 등산객들을 한결 여유롭게 만든다.
둘이 담소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보면 어느 덧 영시암에 다다른다.
영시암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암자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암자라고 하기엔 규모가 상당한 일반 사찰처럼 보인다.
공양을 한답시고 강원도 감자를 한 광주리 삶아놓고 오가는 등산객들이나 영시암 탐방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감자를 한두 개 먹지 않고 영시암을 통과하는 등산객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영시암을 뒤로하면 곧바로 야트막한 언덕길이 나타난다.
언덕길인가 하고 긴장하고 내딛자마자 오르막을 다 마치고 삼거리 갈림길에 선다.
왼쪽으로는 오세암, 똑바로 가면 수렴동대피소와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이다.
봉정암으로 가기 위해 내리막에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백담사 계곡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길동무를 한다.
영시암에서 수렴동 계곡까지 1.2km 구간도 어김없이 오른쪽엔 백담사 계곡이, 왼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용아장성'(설악산에서 가장 험준한 능선) 줄기다.
수렴동대피소에서부터는 사실 구곡담 계곡이라고 일컫지만 그냥 수렴동 계곡이라고도 한다.
수렴동대피소에서 쌍용폭포까지는 가끔씩 오르막길이 자주 나오나 된비알이나 깔딱성 고갯길은 아니고 오르막길 정도에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 없이도 설악산의 가장 아름다운 폭포인 쌍용폭포의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쌍용폭포 (사진=김진오 기자)
쌍용폭포 이전에도 별로 크지 않은 폭포(용아폭포 등)가 두세 개 더 있고, 수렴동 계속 곳곳에 위치한 작은 '소'(웅덩이)가 산객으로 하여금 '풍덩'하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쌍용폭포 바로 직전과 이후 잠깐 동안의 된비알성 오르막길은 철제 계단길이 설치돼 있다.
등산로 곳곳에 타이어데크를 설치하는 등 등산객들을 위한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의 배려가 세심하다.
좌우의 협곡인 수렴동 계곡길을 걸으며 어느덧 백담사에서 10.1km 지점에 다다른다.
날씨가 후덥지근하지만 땀을 많이 흘리지도 않아 힘든 줄 모르고 왔더니 이제부터는 숨이 멈출 것 같은, 가슴이 터질 듯 한 깔딱고개길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봉정암까지는 0.5km. 백담사에서 봉정암 등산길(10.6km) 가운데 가장 힘들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길이다.
정확히는 500m 중에서 100m는 그나마 오를만하다고 치더라도 400m를 오를라치면 그야말로 입에서 '단내'가 나는 곳이다.
워낙 가팔라 내려오는 데도 쉽지 않은 길이다.
봉정암 오르는 길 (사진=김진오 기자)
설악산 봉정암. 해발 1,244m.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통도사, 상원사, 정암사, 법흥사와 더불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국내 5대 적멸보궁으로 꼽힌다. 따라서 불교 순례객들이 항상 넘치는 곳이다.
낮과 저녁시간이 되면 밥과 국, 김치 한두 가지를 주는 공짜 식사, 공양으로도 유명하다.
순례객들과 등산객들로 언제나 붐비는 봉정암은 하룻밤 숙박과 식사를 하는데 돈 만원이면 족하다. 다만 숙박자가 많은 관계로 예약을 해야 하고 칼잠을 자야 하는 불편함이 따르는 곳이다.
문제는 봉정암부터다. 봉정암에서 소청대피소와 소청봉에 이르는 1.1km구간은 그야말로 마의 구간이다. 시종 된비알 오름길이고 그야말로 젖 먹던 당시의 힘까지 내야 하는 가장 난코스다. 물론 희운각 대피소에서 소청봉까지 오르는 길도 마찬가지다.
소청봉에 오르면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좌측으로는 설악산 서북능선의 중심인 귀때기청봉이, 바로 정면으로는 기암괴석과 단풍으로 유명한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이, 조금 멀리는 마등령, 황철봉, 신선봉까지, 조금 오른쪽으로는 신선대와 천불동 계속, 멀리는 울산바위가, 속초시가, 우측으로는 화채봉이, 뒤로 돌면 중청봉과 대청봉 자락까지 아득하다. 중청봉 남쪽인 점봉산 쪽만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뿐 설악산 전체가 조망된다. 대청봉에 오르지 않아도 될 만큼 내설악과 외설악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다.
소청봉에서 중청까지 오르는 길은 그다지 심한 오르막길이 아니어서 가끔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눈시울이 불거질 정도로 즐겁다. 전문 등산객들은 이런 맛에 설악산을 찾고 또 찾는다고 말한다.
어느덧 중청 대피소. 평일(8월 5일)이어서 그런지 10명 남짓의 등산객만 머무를 뿐 그다지 혼잡하지 않다. 주말이나 가을 단풍철이면 중청 대피소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어디 앉아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이제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1708m)까지는 0.6km 남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저기를 어떻게 오르지 라는 느낌이 든다. 지쳤다는 얘기다. 실제로 걸어보면 그다지 힘들지 않는 오름길이지만 중청 대피소에서 대청봉까지의 오르막은 언제나 버겁게 다가온다.
중청 대피소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 (사진=김진오 기자)
중청 대피소를 휘감던 안개는 어느 덧 대청봉을 감싸버리더니 금방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대청봉 정상석이다. 사진을 찍고 또 찍느라 기다리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등산객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정상석을 배경으로 담는다.
지난해 10월 5일 공룡능선 종주를 위해 설악산을 찾았을 때 등산객들이 너무 많아 대청봉 정상석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지난해 그때보다는 날씨가 쾌청하지 않아 사진이 좀 흐릿할 것으로 생각된다.
대청봉 정상석 1,708m (사진=김진오 기자)
중청 대피소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하산 길에 오른다. 수렴동 계곡(구곡담 계곡) 물이 그냥 내려가지 말라고 산객에게 손짓한다. 오늘 아니면 이런 물맛을 언제 보겠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몸을 담가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 대신 족욕과 두족식을 하기를 서너 차례 반복하니 두피가 얼어버리는 것처럼 차갑다.
이게 바로 피서다. 백담사까지 내려오는 길에 두 번씩이나 계곡물에 발과 머리를 씻었다. 상큼함 그 자체다. 이런 계곡에서 두세 시간만 보내면 도회지 생활에 찌든 때(일종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버릴 것 같다.
백담사를 뒤로 하고 백담사와 백담사 입구를 오가는 버스에 올랐다. 편도 2,300원. 구불구불하긴 해도 6.5km밖에 되지 않는 길을 실어다 주는데 2,300원이란다. 비싼 편이다. 올 여름부터 300원 올랐다. 바가지로 인식하는 등산객들도 있었다. 여름과 가을 성수기 때는 30분 정도 버스를 기다리기 일쑤다.
백담사를 출발기점으로 해 봉정암, 소청봉, 중청 대피소, 대청봉까지 12.9km를 하루에 왕복(25.8km)하는 게 무리라는 의견도 있지만 해가 긴 여름에는 도전해볼만하다. 설악산 등산로 중에서도 백담사 - 대청봉 구간(12.9km)은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는 등산로다. 계곡을 벗 삼으며 걷는 등산로인지라 피로감이 대간이나 능선 등산로와는 다르다.
비가 많이 온 이번 주말(23~24일)에는 천상의 폭포, 쌍용폭포가 장관을 이룰 것이다. 쌍용폭포의 물줄기가 한층 장엄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