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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의 포로가 된 美 포로수용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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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56]휴전회담, '포로문제'로 1년 더 질질 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전경. 360만 평 부지에 가장 많을 때는 10여만 명의 포로가 북적거렸다.

 

◈ 포로수용소 소장,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당하다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갑자기 친공포로들이 밥에 독을 넣었다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단식투쟁을 하면서 포로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 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평소 포로 대표단의 요청이 있으면 면담을 자주 가졌던 도드 소장은 아무 생각없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과 얘기를 나눴다.

포로들이 슬그머니 수용소 문을 열고 나와 도드를 둘러싸는데도 경비병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다 '똥통'을 비우러 나왔다가 들어오는 포로들과 뒤엉켜 도드는 철조망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문은 닫혀버렸다.

세계 전쟁 사상 처음으로 수용소장이 '포로들의 포로'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장면을 모형으로 재현했다. (사진=거제해양관광개발공사 제공)

 

도드를 포로로 잡은 친공포로들은 곧바로 현수막을 걸었다.

"우리는 도드를 포로로 잡았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 들여지는 한 그의 안전은 보장된다.총격이나 그밖의 폭행이 가해진다면 그의 생명이 위험할 줄 알아라"

현수막이 납치 직후 곧장 내걸린 것으로 보아 도드 납치 계획은 미리 준비된 것이다.

포로들은 이어 친공포로에 대한 학대 중지, 송환 강제 심사 철회, 자유 송환 중지, 포로 대표단 인정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후임 소장으로 임명된 찰스 콜슨 준장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를 살상한 유혈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포로들의 송환 강제 심사나 개인 심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콜슨이 무릎을 꿇자 도드 장군은 감금 78시간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이는 도드가 살해되더라도 무력으로 수용소 질서를 바로 잡으려던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뜻에 완전히 배치되는 조치였다.

명색이 포로수용소이지 무법천지가 된 거제도포로수용소. 친공포로들이 장악한 막사에서는 이렇게 정치적 구호가 난무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총사령관은 도드와 후임 소장 콜슨 장군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문책을 단행했다.

◈ 유엔군, 친공포로들에게 강경진압 작전을 벌이다

리지웨이 대장의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수용소의 질서를 잡기 위해 강경책을 구사했다.

새로 수용소장으로 온 헤이든 보트너 준장은 총검을 장착한 보병과 탱크를 수용소 안에 진입시켜 10일 만에 포로들을 진압했다.

기가 꺾인 포로들은 작은 규모의 새 수용 막사로 분산 수용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폭동을 강경하게 진압하고 있는 유엔군

 

먼저 분산 수용을 시도한 곳은 가장 저항이 심하고 친공포로들의 본부 역할을 했던 76수용소였다.

6월 10일 새벽 경비병들이 기관총과 박격포를 조준한 가운데 대부분의 포로는 새 막사로 이동했으나, 1,500여명이 불을 지르며 저항하는 바람에 30여 명이 죽고, 130여 명이 다쳤다.

결국 76수용소의 포로 6,500명은 500명 단위로 나뉘어 새 수용소로 분산 수용되었다.

포로들이 떠난 막사에서는 창 3,000여 개, 가솔린 수류탄 1,000여 개, 칼 4,500여 자루가 발견되었다.

압수된 비밀문서에는 1952년 6월 20일을 기해 모든 수용소에서 동시다발로 탈출한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보트너 소장은 이어 반공과 친공포로들을 심사. 분리해 반공포로들은 영천, 부평, 마산, 논산, 가야 등지로 옮겨 친공포로들의 테러에서 보호했다.

1952년 6월 거제도 76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폭동을 유엔군이 진압하고 있다.

 

거제도 부근의 봉남도에 설치한 새 막사에서는 12월 14일 폭동이 발생해 85명이 죽고 113명이 다쳤다.

◈ 어렵게 시작한 휴전회담, '뜨거운 감자'인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난항을 겪다

전선이 휴전선을 경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미국이나 공산권 모두 전쟁 지속보다는 협상의 길을 모색했다.

양측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시작해 보름만에 군사분계선 설정, 전투행위와 정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등 5개 의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포로 송환'을 둘러싸고 암초에 부딪쳤다.

이 문제는 10월에 처음 의제에 올랐으나 회의 벽두부터 공산측이 "휴전협정 조인 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를 석방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와 공전을 거듭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휴전회담 본회의 첫 날의 모습.

 

포로 송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공산측 주장이 옳았다.

문제는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이들을 억지로 송환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유엔군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유엔군은 이를 통해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선점하려고 했다.

포로의 숫자도 문제였다.

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 2,474명의 숫자를 제시했으나, 공산 측은 한국군 7,142명과 유엔군 4,417명을 합쳐 고작 1만 1,559명의 포로 숫자를 제시했다.

공산 측의 자랑과 달리 5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공산 측도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 명이 빠진 것을 문제삼았다.

결국 회담은 난항을 겪다 1년 후인 다음 해 5월, 송환을 반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 정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엄청난 도박을 걸다

1952년 7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포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사진=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제공)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는 1953년 6월 18일 새벽 1~2시.

북한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돼 있는 7개 포로수용소 하늘에 예광탄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3만 5,400명의 반공포로들이 우리 헌병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대탈주를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1시 미국을 상대로 이번 조치가 자신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것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덕분에 2만 6,930명이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미군이 감시하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경비병의 발포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다쳤다.

8,293명은 탈출에 실패해 다시 철조망에 갇혔다.

이들은 중립지대 인도군 수용소로 옮겨져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거쳐 대부분 석방됐다.

자유의 품으로 돌아온 반공포로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국군에 입대한다.

 

미국은 물론 세계는 이승만의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국의 충격은 정말 컸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해 포로들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옷을 갈아입히고 집에 숨긴 채 숙식을 제공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때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을 실각시키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국군의 충성심이 높고 마땅한 대안이 없어 접어버렸다.

미국이 가장 놀란 것은 유엔군 사령부가 장악하고 있는 작전통제권을 이승만이 무시하고 포로들을 석방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승만이 북진 통일 주장을 접고 휴전협상에 찬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했다.

정말 이승만은 항간의 소문대로 '내치는 등신, 외교는 귀재'라는 말이 실감난다.

◈ 천신만고 끝에 마무리한 포로 송환...88명은 중립국을 선택하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여군 포로들.

 

1953년 7월 17일 휴전협상이 조인되고, 이어 8월 5일부터 한달간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별 무리없이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그러나 송환을 원치 않는 한국인과 중국인 포로 2만 2,000여 명은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졌다.

이들은 인도군이 관리하는 판문점 근처의 비무장지대에 수용되었다.

남북한과 중공 대표들은 3달간 설득 작업을 벌였다.

이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중공군 1만 4,227명, 인민군 7,582명이었다.

특이하게 88명이 제3국행(인도행)을 택했다.

88명 중 12명은 중공군, 76명(한국군 2명, 인민군 74명)은 한국인 포로였다.

이들이 제3국을 선택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북녘에 부모님이 있어 지척의 거리인 남한에 살면 부모님을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포로수용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한 땅에서 반공포로로 불리며 살기 싫어서"
"공산당이 싫어 남한에 남아야 하는데 20살이기 때문에 다시 군대에 끌려갈 게 뻔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이 별천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등 다양했다.

이들 76명의 한국인 포로들은 1954년 2월 21일 오스트리아 선적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인도 남단 마드라스항으로 떠났다.

이들 포로에 대한 뒷 이야기는 <광장>과 <시간의 저편> 등의 소설과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중립국감독위원회 책임수사관(이영애 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조국을 버린 이들이나 아직도 남북간에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는 국군포로 문제를 접할 때마다 다시 한번 분단의 아픔, 동족상잔의 후유증을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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