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자 판사직을 내던지고 무장투쟁에 나선 박상진 의사 (사진=고헌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 제공)
◈ 대한광복회, 친일 부호 장승원을 사살하다"탕~탕~탕"
1917년 11월 9일 저녁 6시, 경북 구미시 오태1동의 고대광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한광복회 회원 세 명이 이 집의 주인 장승원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소리다.
이들은 총을 발사한 후 집 담장에다 포고문을 붙였다.
"조국 광복에 협조하지 않는 대죄인을 처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광복회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박상진 의사다.
박상진 의사는 1910년 사법고시를 통과해 판사로 임용됐으나 나라가 망하자, 대한광복회를 설립해 총사령으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 가서 권총을 10여정 갖고 와 부하들에게 나눠준 뒤 광복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작전을 벌였다.
먼저 한말에 경북관찰사를 지낸 대부호 장승원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자, 단호히 거절하고 일본 경찰에게 밀고하려 하자 처단한 것이다.
이렇게 죽은 장승원에게는 아들이 3명 있었다.
큰 아들 길상과 둘째 직상은 아버지가 피살되자 근거지를 대구로 옮겨 땅을 판 돈으로 은행을 세웠다.
길상은 소작인들에게 가혹한 소작료를 물리고 친일활동을 벌이다 인심을 잃어 대구를 떠나 경성으로 올라갔다.
직상은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에 이어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오르는 등 출세의 가도를 달리면서 정성을 다해 친일행각을 벌였다.
장승원의 세번째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장택상이다.
◈ 남한을 접수한 미군정, 친미파 장택상을 수도경찰청장으로 발탁하다
하지 미군정사령관의 연설을 통역하고 있는 장택상
해방 후 남한에 상륙한 미군의 첫 작업은 지리멸렬해진 식민지 경찰의 복원이었다.
미군은 도망간 친일경찰들을 찾아내 떠나간 일본경찰의 공백을 메꿨다.
그리고는 경찰의 최고 우두머리인 경무부장에 조병옥, 수도 서울의 치안책임자로는 장택상을 임명했다.
두 사람 다 친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반공사상이 투철하고, 이승만을 옹립하려는 한민당원인데다 무엇보다 영어를 잘 구사하는 친미파였다.
이들과 미군정은 치안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경찰관을 대거 채용했다.
일제 말기에 조선의 전 경찰관은 2만 명이었는데 1946년 10월에 남한만 2만 5천명으로 늘렸다.
남한만 놓고 보자면 두배로 늘어난 것이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3년 가까이 경찰을 지휘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이렇게 정리된다.
1. 친일경력을 가진 경찰관을 중용해 수족처럼 부려먹는다.
2. 이들의 물리력을 이용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
3. 좌익을 잡는다.
4. 내 아버지를 죽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 가슴에 맺힌 울분을 푼다.
장택상은 이 네 가지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아니, 너무 철저하게 수행하느라 남북간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민족정기를 훼손시키고, 수많은 백성의 가슴에 한을 심어 놓았다.
1946년 10월에 발생한 대구폭동을 겪은 어느 공무원의 회고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모두 대구경찰서 앞에 집결했습니다. 나도 경찰서로 가는데 한 사람이 심하게 두들겨 맞아 길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유혈이 낭자하게 부상을 입고 넋이 빠진 채 말도 못하고 있는 사람을 몇 사람이 둘러서서 구경만 하고 있더라고요. 주위 사람들에게 왜 저리 됐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뭐~ 못되게 하다가 그리 됐지'라고 하더군요. 그날 대구 시내 분위기는 경찰이나 일본놈 앞잡이를 하면서 상당히 미움 받았던 사람들을 모두 끄집어내 두들겨 팼던 것 같아요"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을 모조리 체포, 구속하고 주모자는 즉결 처분해버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경무부 고문인 대령 매글린이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장택상에게 항의할 정도였습니다"
악질 친일경찰이 일본놈들이 물러간 뒤에도 대로를 활개치면서 권력을 휘두르니 전국 곳곳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친일경찰을 패면 다시 경찰의 보복이 뒤따르고, 다시 집단으로 몰려가고…
이 격한 대립을 공산당이 교묘하게 이용했으니 결과적으로 장택상의 조치는 적을 이롭게 한 셈이다.
◈ 장택상,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가문의 원한을 풀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약산 김원봉. 평생을 반일 무장투쟁을 벌였던 그는 장택상에게 수모를 당한 뒤 북한으로 넘어간다.
장택상은 공산당을 박멸하고 이승만에게 대권을 넘겨주려고 설치다가 금기의 영역을 넘어버렸다.
반공주의자인데도 이승만에 반대한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계열과 중도세력까지 좌익으로 몰아 숨도 못쉬게 탄압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서 항일테러 활동과 무장독립 투쟁을 벌인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이다.
어느 독립운동가는 이렇게 회고했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끈질기게 추적해온 왜경이었으나 한번도 붙잡히지 않았던 김원봉 장군이다. 그런데 해방되었다는 조국에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의 지휘를 받는 친일경찰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른바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은 독립투사들이 다 당했듯이 김원봉 또한 인격적 모욕과 함께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김원봉을 붙잡아간 사람은 노덕술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악랄한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의열단의 처단 명단'에 올라 있던 자였다. '김원봉이를 반드시 잡아오라'고 특명을 내린 사람은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이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보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푼 노덕술은 '하이~'하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뜻밖에 장택상은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같은 놈아~ 정중히 모셔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했나?'라며 송구스럽다는 듯 묶인 것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완전히 패고 어르고 하며 독립운동가를 갖고 노는 모습이다.
수모를 당한 김원봉 장군은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남한을 떠날 결심을 굳힌다.
김원봉 장군과 함께 의열단 활동도 하면서 젊은 날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웠던 김성숙 선생도 똑같은 수모를 당한다.
<아리랑>에 '조선의 붉은 승려'라고 묘사된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해방된 조국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아리랑>
그는 승려 출신으로 중국에 망명해 무장투쟁을 벌이면서도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다.
그런 김성숙 선생이 해방된 조국에서 미군정법을 위반했다고 징역 6개월, 간첩사건 누명을 쓰고 6개월, 5.16 쿠데타 직후에는 그냥 혁신계였다는 이유로 아무 죄없이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를 잡아가고 문초한 경찰들은 죄다 장택상이 키운 친일경찰이었다.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장에 기용됐을 때 국일관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몇몇 사람이 충고를 했다.
"이제 군정의 경찰권을 장악했으니 독립운동가에게도 잘해야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한 장택상의 대답은 냉정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수 없어요.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죽었는데 어떻게 동정하란 말입니까?"
◈ 대통령이 된 이승만, 논공행상으로 장택상을 중용하다
훈시를 하고 있는 장택상 국무총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경찰을 총동원해 '이승만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공을 인정받아 초대 외무부장관에 발탁된다.
그러나 1948년 5.10선거와 이후의 두 차례 보권선거에 나가 계속 낙선한 것을 보면 국민들에게 얼마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다.
겨우 네번째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민의원 부의장도 지내고, 1952년에는 그토록 갈망하던 국무총리로 취임한다.
국무총리로 일하면서 남긴 업적은 단 하나다.
이승만의 재선을 위해 헌법을 뜯어 고친 '발췌 개헌안' 추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죽은 후 대통령이 된 김영삼, 김대중 두 정치인이 장택상의 비서를 거친 사실이다.
현대사의 거목인 양 김씨.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장택상의 비서를 지냈다.
양 김씨를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은 5.16 쿠데타 이후 장택상이 돌연 민주투사로 돌변해 야당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 장택상과 박정희의 악연…대지주의 자제 VS 소작인의 아들아마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대권을 잡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하나가 장택상일 것이다.
두 사람 다 금오산 기슭서 태어나 같은 동네서 자란 동향인이지만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두 집은 경부선 철길 하나 사이로 2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장택상 집안은 해방 무렵까지만 해도 영남 제일의 대부호 만석꾼으로 고향에서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
경북 구미시 오태1동에 있는 장택상 생가. 여러번 주인이 바뀌고 현재 한정식 집으로 쓰고 있다. (사진=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제공)
부잣집 아들인 장택상은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현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도쿄에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취미도 대부호답게 고미술품 수집이다.
관직도 대통령 빼고는 다 거쳤다.
반면 박정희 일가는 전형적인 소작인 집안이다.
아버지가 처음에는 묘지에 딸린 논밭 여덟 마지기 농사를 짓다가 도저히 생활이 안되자 장택상의 아버지에게 머리를 조아려 다섯 마지기를 소작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소년 박정희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둘째형 무희가 지게에다 도지(논밭을 빌린 삯)와 마름에게 줄 씨암탉을 지고 장택상 저택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한다.
경북 구미시 상모리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
이런 집안의 막내 아들이 자기가 평생 꿈꿔 온 대통령이 되니 장택상의 심정은 어땠을까?
박정희가 집권하자 장택상은 돌연 야당투사로 돌변한다.
그는 군정연장반대투위 고문,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의장 등을 지내며 반 박정희 운동에 앞장섰다.
사석에서도 '박정희 씨', '박정희 군'이라고 낮춰 부르며 독설을 늘어놓아,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박정희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같은 대통령이라도 이승만 같은 명문가 출신에게는 충성을 다 바쳐도, 소작인 출신의 대통령은 인정할 수 없었나보다.
결국 정권의 조직적인 방해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출국금지 대상에 오르자 비굴한 내용의 항복 편지를 보내 겨우 해외에 나갔다.
정말 세상살이가 새옹지마(塞翁之馬)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