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네이팜 소녀' / 닉 우트 / The Associated Press
AP통신의 베트남인 사진기자 닉 우트(64)는 '베트남-전쟁의 테러', 소위 '네이팜 소녀'로 불리는 사진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지난 24일부터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퓰리처상 사진전을 위해 세 번째 방한한 그는, 개막당일 기자를 만나 '네이팜 소녀' 킴 푸크를 찍을 때의 상황 등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세세히 풀어놓았다.
벌써 42년 전 일이지만 눈앞에 당시 상황이 또렷하다. 1972년 6월 8일 정오 무렵, 그는 사이공 서쪽 25마일에 있는 트랑방 마을 인근의 전투를 취재 중이었다. 로켓포, 박격포가 쉴새없이 터졌다. 그때 저공비행하던 비행기에서 네이팜탄 4개가 투하됐다. 참호 속 베트공을 겨냥했지만 빗나갔다. 네이팜탄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트랑방 마을로 떨어졌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할머니 품에 안겨있던 아기의 몸에서 살점이 뚝뚝 떨어졌다. 그 아기는 닉의 카메라 바로 앞에서 죽었다.
닉이 분노에 차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 9살 소녀 킴 푸크가 벌거벗은 채 그를 향해 달려왔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너무 뜨겁다"는 말을 반복했다. "소녀의 화상이 심하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카메라를 도로 위에 내려놓고, 갖고 있던 생수를 소녀의 몸에 부었어요." 자신의 차로 킴 푸크와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병원으로 이송했다. 병원 측은 "의약품이 떨어졌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하지만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죽는다"는 그의 애원에 태도를 바꿨다. "그런 다음 차로 돌아왔는데 제가 온몸을 떨고 있더라고요."
이 사진은 '나체사진을 싣지 못한다'는 미국 AP통신의 규정에 따라 빛을 보지 못할 뻔 했다. 하지만 당시 AP 베트남 사이공 지국장이었던 호스트 파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실을 수 있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사람들이 '퓰리처상 감'이라고 했어요. 저는 퓰리처상이 뭔지 몰랐는데 정말 상을 받아서 놀랐죠. 하하"
닉은 다음날 트랑방 마을로 돌아갔다. 딸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던 킴 푸크의 부모에게 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알려줬고, 곧 가족상봉이 이뤄졌다. 당시 3도 화상을 입은 킴 푸크는 14개월 동안 17번의 피부이식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비극의 순간을 함께 한 두 사람은 여전히 연락을 하고 지낸다. 킴 푸크는 97년부터 UN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네이팜 소녀'로 1973년 퓰리처상을 받은 닉 우트.
'네이팜 소녀' 사진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종식시키는데 기여했다.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에 합의했다. 닉은 이 사진이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7번째 형이 준 선물"이라고 했다. 12형제 중 11번째인 그에게 11살 많은 7번째 형은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은 베트남에서 유명한 사진가 겸 배우였어요. 형을 보면서 사진기자의 꿈을 키웠죠." 그러나 1965년 어느날, 형은 전쟁터에서 삶을 마감했다. "전쟁의 공포를 담은 사진 한 장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간직한 채.
그로부터 1년 후, 16살 소년 닉은 사진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화상이 심한 킴 푸크를 병원에 데려다준 후 차 안에서 형한테 '인화가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여러 장 인화했는데 가장 잘 나온 사진이 7번째 필름이었죠." 형과 필름의 공통분모인 '7'을 엮은 스토리는 CNN, ABC 같은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됐다. "종군기자로 전쟁터를 다니면서 저 또한 죽는 게 두려웠어요. 부상도 여러 번 당했지만 이 직업이 좋아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행복했어요."
미국 LA에 거주하는 닉은 48년째 AP통신에서 일하고 있다. 정년퇴직을 2년 앞뒀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을 누빈다.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사진을 통해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즐거워요." 2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 "베트남에서 사진 워크샵을 열어서 사진기자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사진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아직 못 가본 남미 쪽 나라를 여유있게 여행하고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