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해 해상 교통안전 관리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가운데 해양 안전 중장기 정책 수립과 해양 사고 발생 시 신속 대응을 목적으로 발의된 해양교통안전공단 설립 법안이 국회의원들의 졸속 심의 끝에 폐기된 것으로 나타났다.
18대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서 국토해양부가 관련 법안 상정을 강력히 반대했고 소위 위원들은 무기력하게 국토부 손을 들어줬다.
여야 정치권이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에 합의한 가운데 참사를 미연에 막을 수도 있었던 법률안 마련에 소극적이었던 국회의원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전망이다.
◈ 정부기관 간 권한 다툼에 무기력한 국회세월호 참사로 우리 사회 전반의 '안전 불감증'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가운데 안전 관리 등 관련 법 규정을 면밀하게 살펴야 할 국회의원들 역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가장 뼈 아픈 게 해사안전법 개정안 폐기다.
해상 교통안전 점검과 선박 운항 관리 강화 등을 규정한 해사안전법 개정안은 2011년 11월 8일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 회부됐다.
개정안의 골자는 해상 교통사고에 신속 대응이 어려운 만큼 육상의 교통안전공단이나 도로교통공단처럼 '해양교통안전공단'을 신설해 해양 사고 예방 및 피해 확산 방지 체계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여객선과 위그선, 해상·육로 복합형 교통수단 등장으로 해상 교통안전 관리가 시급하지만, 관련 법률과 안전 관리 체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게 개정안 발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토교통부가 "정부 간 이견 조율 중이니 개정안 심의를 중지해 달라"고 요구했고 국토해양위 위원들은 별다른 검토 없이 국토부 요청을 받아들였다.
당시 법안심사 소위 속기록에 따르면 심의에는 최규성 소위 위원장과 백재현 의원(당시 민주당), 현기환·최구식 의원(당시 한나라당) 등 위원 9명과 전문위원 3명, 정부 측 참가자 7명 등 19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명박 정부가 해양수산부와 건설교통부를 통합해 만든 국토해양부의 김희국 2차관은 해양교통안전공단 설립 논의를 유보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현기환 위원은 별다른 의견 제시 없이 "뭘 유보시켜? 죽여야지"라며 법안을 아예 폐기할 것을 주장했다.
백재현 위원이 "해양교통안전공단 필요성은 인정하냐?"고 질의하자 김희국 차관은 "(공단이 없어도) 현재 큰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최구식 위원은 뜬금없이 "누가 발의한 법안이냐?"고 물었고, 최규성 위원장은 "내 법인데 현기환 위원이 죽이자니까… 알았다"고 답했다.
이에 최구식 위원은 "우리가 참 위원장은 진짜 훌륭한 분을 모셨다"며 법률 개정안과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만 쏟아냈다.
김 차관은 "지금 선사들의 결사체인 '해운조합'에서 잘하고 있는데 굳이 또 법제 사이드에 넘길 실익이 없다"며 해양안전교통공단 설립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에 최규성 위원장이 "일단 현기환 위원 의견에 따라 (법안을) 죽이는 쪽으로 정리하자"고 하자 현기환 위원은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했다.
국토해양부 차관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한 선사들의 결사체 해운조합은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안전 점검과 운항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른 곳이다.
퇴직한 관료들이 해운조합에 재취업해 여객선 관리 체계가 '안전'이 아닌 '먹이사슬'로 엮여 있는 것이 확인된 곳이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지난 19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해운사들의 이익단체인 해운조합에 선박의 안전 관리 권한이 주어지고, 퇴직 관료들이 해운조합에 관행처럼 자리를 차지해 왔다"고 질타할 정도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안전을 담보해야 할 정부 주무 부처는 문제투성이 민간 조합을 지지하고, 국회 상임위는 그런 국토부 의견을 무조건 수용하고, 무슨 이유인지 심사 의견은 없이 법안 폐기만 주장했던 위원은 폐기 결정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백재현 위원이 "속기가 되고 있다"며 위원들에게 발언 자제를 요청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연출됐다.
당시 소위에 참석했던 해양경찰청 이정근 경비안전국장이 "여객선은 해운조합이, 화물선은 국토부가, 유조선은 해경이, 어선과 낚싯배는 지자체가 관리하는 등 관리 주체가 다 다르다"며 "해사 안전과 관련해 총괄적인 기구가 필요하다"고 호소했지만, 해양교통안전공단 설립 법안 폐기를 막을 수 없었다.
속기록을 보면 해사안전법 개정안은 불과 5분 안팎의 심사 같지 않은 심사 끝에 폐기가 결정됐다.
소위 위원장이었던 최규성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9일 CBS와 통화에서 "당시 국토해양부가 완강하게 반대를 했고 여당 의원들도 법안심사 소위가 열리기 전부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며 "여야 합의가 전혀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최 의원은 "세월호 참사가 난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
◈ "법만 제대로 만들었으면 세월호 참사 없었을 것"당시 해경은 국토해양부 산하에 있었고 해양교통안전공단 설립 여부를 두고 두 기관이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안전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법안 통과를 고심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정부 기관 간 권한 다툼에 휩쓸려 아무런 역할을 못 한 사실이 속기록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당시 소위에서 국토해양부가 잘하고 있다고 지적한 해운조합은 선사들을 상대로 안전 점검과 지도·감독을 수행해야 했지만, 과적이나 규격 초과 화물을 발견하고도 단 한 차례도 출항 정지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이지현 팀장은 "해당 속기록은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법안 심사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며 "당시 법만 제대로 만들었어도 세월호와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이지현 팀장은 "'선박 운항 안전 관리가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으로 개정안을 발의한 위원장이 여당과 국토해양부 반대에 따라 별다른 이유 제시 없이 개정안을 폐기하고, 면밀한 법안 검토 없이 무조건 '법안을 죽이자'고 한 위원들의 행태는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당시 국토해양위 법안심사 소위에는 강기정, 김성태, 김진애, 백재현, 신영수, 이한성, 최구식, 최규성, 현기환 의원 등 9명이 참석했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 추궁을 위한 대대적인 국정조사가 예고된 가운데 조사 주체인 국회의원들조차 참사 방지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