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도 아닌데...' 4월30일 SK-KIA의 경기 도중 난입한 취객이 박근영 1루심에 폭력을 가하다 SK 코치와 경호 요원에 제압당해 끌려나가고 있는 모습.(자료사진=KIA 타이거즈)
26년 전인가요? 1988년 어린이날 함께 팀을 이뤄 야구를 하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야구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해태(현 KIA)-OB(현 두산)의 잠실 경기였습니다. 해마다 진행되는 어린이날 LG-두산의 잠실 더비가 정착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죠. (5월 5일 잠실 라이벌 대결의 시작은 1996년부터라는군요.)
김성한 현 한화 수석코치의 2점 홈런 등으로 해태가 9-2로 이겼던 기억이 납니다. 신이 난 저는 경기가 끝난 뒤 친구들 몇몇과 함께 그라운드로 뛰어들었습니다. 우중간 외야석에서 3m는 족히 됨직한 담장 밖으로 뛰어내린 겁니다.(잔디가 푹신해 다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현재 잠실 펜스 높이는 2.75m라니 별 차이는 없었네요.)
당시는 경기 후에 적잖은 관중이 그라운드로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때문에 경찰이 그라운드에 배치돼 더그아웃이나 내야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때도 경찰들이 방망이를 들고 난입한 관중을 잡아 경기장 밖으로 몰았습니다.
제법 날랜 편이었던 저는 이리저리 피해다녔지만 한 친구는 경찰 아저씨의 몽둥이에 엉덩이를 '빡' 하고 맞았습니다. 엉덩이를 부여잡은 그 녀석이 저를 가리키며 '쟤가 뛰어내리자고 했어요'라고 하자 경찰들이 몰려와 혼비백산 달아났던 기억도 납니다. 우리들의 리그에 한번 써볼까 하고 아무리 뽑아보려 해도 요지부동이었던 베이스, 더그아웃에서 마주친 거인과도 같았던 선수들, 아이들이 잘 잡히지 않자 어르고 달래던 경찰 아저씨들, 모두 한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벌써 25년도 넘은 세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린이날, 철들기 전의 치기어린 행동이었기에 쑥스럽게 면죄부를 주면서 웃어넘길 수 있는 기억이 아닐까 합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 초창기에나 있을 법한 에피소드였습니다.
▲취객, 심판 폭행…관중석 화재까지하지만 30살을 넘긴 올해 프로야구는 여전히 이런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라운드 난입을 넘어 사상 초유의 심판 폭행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지난달 30일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SK-KIA의 경기였습니다. 1루 쪽 관중석에서 한 취객이 난입해 박근영 1루심의 목을 조르고 넘어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관중 난입이야 야구 선진국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가끔씩 일어나는 일로 일종의 해프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에 위해를 가하는 사건이라면 다른 문제입니다. 경기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데다 선수, 코칭스태프 등의 안전까지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1일 챔피언스필드 관중석에서는 불까지 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 팬이 휴대용 부탄가스 버너에 오징어를 구워 먹으려다 불이 응원단상에 옮겨 붙은 겁니다. 반입이 금지된 물품이었지만 버젓이 들여와 대형 화재 사건이 될지 모를 일이 발생한 겁니다.
'야구장에 웬 불?' 1일 SK-KIA의 경기 도중 1루 측 관중석에 한 팬의 부주의로 불이 붙은 모습.(자료사진=MBC 스포츠츨러스 중계 화면 캡처)
송재우 메이저리그(MLB) 전문 해설위원은 "만약 MLB에서 심판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면 곧바로 상근 경찰에 의해 연행돼 형사 처벌을 받을 사안"이라고 말했습니다. 퇴장이나 영구 출입 정지 등 홈 팀의 제재를 떠나 공공장소에서 규칙을 위반한 만큼 법대로 처리가 된다는 겁니다. (광주의 취객은 박 심판이 처벌을 원하지 않아 사법 처리는 면했습니다.)
이어 화재 사건에 대해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MLB에서는 구장마다 차이가 있지만 금속 탐지기까지 동원해 가방과 소지품 등을 철저하게 검사한다는 겁니다. 송 위원은 "물이 담긴 페트병 정도만 허용될 뿐 화기나 유리병 등은 엄격하게 제한된다"고 말했습니다.
▲韓 프로야구 과도기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개인적으로 이 일련의 사건들이 33번째 시즌을 맞는 '한국 프로야구의 과도기'이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구장의 현대화와 중계 방송 기술의 발전 등 프로야구는 하드웨어의 측면에서 야구 선진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근접하고 있습니다. 해외 야구에 접할 기회가 높은 팬들의 눈높이도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판정 제도와 팬 문화 등 소프트웨어 면에서는 아직까지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수천, 수만 분의 일까지 잡아내는 중계 화면에 육안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비디오 판독 우리도 합시다' 4월 30일 SK와 경기에서 선동열 KIA 감독(가운데)이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모습.(자료사진=KIA)
사실 국내 심판들의 자질이나 능력이 MLB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디오 판독이 확대 시행된 올 시즌 MLB 판정 번복 확률은 40%를 웃돈다고 합니다. 송재우 위원은 "4~5일 전쯤 통계에서 보면 번복 확률이 45%였다"면서 "그러나 비디오로도 판독이 불가능해 원래 판정이 확정되는 장면까지 더하면 절반 정도가 오심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야구 선진국이라는 MLB에서도 절반에 가까운 판정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문제는 판정은 변한 게 없는데 중계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전에는 그냥 넘어갈 장면들이 다각도로 잡아내는 중계 화면의 천라지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들이 자신감을 잃고 더 불안한 판정을 내리고 팬들의 불만이 커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분석입니다.
여기에 비디오 판독 확대 시행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MLB와 비교돼 더욱 오심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에 인내심이 조금 부족한 일부 관중의 빗나간 팬심, 성숙하지 못한 관람 문화까지 총체적으로 한국 야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드러난 겁니다.
▲하드웨어 따라갈 소프트웨어 시급개인적으로 한국 야구에도 비디오 판독을 위한 하드웨어는 갖춰졌다고 봅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100억 원 정도 자금 마련이 당장 힘들다면 중계 화면의 힘을 빌리는 겁니다. 모든 장면을 담지 못한다는 중계사의 부담과 각 중계사마다 카메라 앵글의 차이 등 난관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현재 오심 사태가 중계 화면에서 비롯된 부분이 절대적인 만큼 결자해지의 차원에서도 적극 검토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입니다. 현재 중계 화면에서 잡아내지 못하는 장면이라면 오심 논란은 없을 테니까요. 중계 화면도 판독하지 못하는데 딴지를 걸 팬들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결단을 내려줄 소프트웨어의 차원이라는 겁니다.
'팬들이 모두 웃는 날까지' 33번째 시즌을 프로야구는 이제 팬들의 수준높은 요구를 보다 빠르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올 시즌 잠실 개막전 때 모습.(자료사진=윤창원 기자)
여기에 현재 한국 프로야구의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조금 더 기다려줄 줄 아는 팬들의 배려도 필요합니다. 이성과 애정이 담긴 지적을 넘어 감정뿐인 분노 표출, 마녀 사냥과 근거 없는 괴담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 오심을 지적하고 성토한들 당장 달라질 부분도 많지는 않습니다.
올 시즌 개장한 광주-KIA 챔피언스필드는 국내 구장 중 MLB급 시설을 자랑합니다. 그런 구장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사건들이 벌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3일 뒤면 어린이날입니다. 26년 전의 에피소드를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첨단 시설과 중계 방송에 어울리는 행정과 문화가 갖춰질 시대가 오길 바랍니다. 언젠가 그때의 친구들과 다시 한번 야구장을 찾았을 때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