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단원고 희생자 임시 합동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황진환기자
"인터뷰를 안하려고 했는데… 이런 인터뷰를 하고 나면 하루 이틀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어린이안전재단 고석 대표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마지못해 응했다. 고 대표는 "15년이 흘렀지만 이런 사고들이 그 때의 일을 다시 일깨워준다"고 했다.
고 대표가 말한 '그 때의 일'은 지난 1999년 6월 일어난 경기도 화성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참사다. 당시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4명 등 23명이 불길 속에서 숨졌다. 고 대표는 6살 두 쌍둥이 딸을 함께 잃었다.
"처음에는 인정하기 힘들었습니다. 나에게도 이런 사고가 일어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현실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고 대표는 "아이들을 잃고 난 뒤 죄인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며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씨랜드 유가족 대부분이 이런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이사를 여러번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이듬해부터 어린이안전재단을 만들어 안전활동을 해왔다"며 "이 활동으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다고 전했다.
"갑자기 아이들이 사라지는 꿈,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꿈을 가끔 꿉니다. 15년이 지나도 악몽은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고 대표는 "주위에서는 '세월가면 잊혀질거다'라고 말하는데 어불성설"이라며 "(자녀를 잃은 고통은) 평생 안고 가야할 고통이자 평생 눈물을 흘려야 치유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3년 192명이 숨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유가족인 전재영씨도 '그날'의 고통은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 씨는 사고 당시 아내와 큰 딸을 잃었다.
"사고 뒤 주위에서 '잊으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잊혀집니까? 물론 세월이 지나면 집사람과 딸 생각이 많이 나지는 않지만 비슷한 사고가 나거나 예쁜 옷이나 집사람이 쓰던 물건을 볼 때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칩니다."
전 씨는 "장례 때에는 멍한 상태였다"며 "장례가 끝나서는 무기력증에 빠져 2년동안 일을 못했다"고 전했다.
"아내와 딸을 잃은 뒤에는 화를 많이 냈습니다. 친구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끼어드는 자동차에 화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내 자신조차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화를 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자신을 추스리게 된 계기는 홀로 남은 막내아들이었다. 전 씨는 "사고 2년 뒤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렇게 살다가는 아들마저 잃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심리적 충격이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다고 전 씨는 말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옵니다. 지금도 새벽 5시에 잠들기 일쑵니다"
그는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구조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소식에 화가 매우 나서 TV를 껐다가도 소식이 궁금해 다시 TV를 켜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대구지하철희생자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 씨는 "위원회 일로 유가족들을 만나다 보니 평소에 가족간 대화를 많이 하는 유족들은 사회생활을 잘하는 반면 혼자 해겷하려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침울한 상태"라며 "혼자 슬퍼한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울고 싶을 때 우는 게 치유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 씨는 인터뷰 당일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진도로 떠났다.
지난 2월 18일 새벽 붕괴 사고가 난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 현장. 자료사진
그러나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유가족들도 있었다. 지난 2월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사고로 아들이 숨진 A씨는 대구참사 유족들의 진도 방문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야기를 한다고 우리 애가 살아 돌아옵니까?"
A씨는 "그 사고 당시에도 내가 '늑장구조'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런 메아리도 없었는데…, 구조대만 일찍 도착했어도…"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리조트 붕괴사고에서 딸을 잃었던 B씨 역시 "나도 (딸을) 따라 가려 했다가 신앙의 힘으로 견뎌 내고 있다"며 "사람들이 치료 상담 얘기를 많이 하는데 잘해야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채정호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대한외상성스트레스연구회장)는 "희생자 유가족들이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며 "아프면 안되는 것처럼, 의연해져야 하는 것처럼 접근하면 안된다"고 조언했다.
채 교수는 "아픔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가지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평생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