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13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계란을 맞았다. 웬일인지 ''''계란 세례'''', ''''계란 투척'''', ''''계란 테러'''', ''''계란 봉변''''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낯설지 않다. 계란을 맞았던 정치인들이 그동안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계란을 맞은 정치인과 사건들을 되짚어 보았다.
▲ 첫 번째 6월3일
계란을 맞았던 내 기억 속의 첫 번째 정치인은 정원식 전 총리다. 1991년 6월 3일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한국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오던 도중 학생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외대 학생 15명에게 사전 영장이 발부되었고, 당시 교육부장관과 외대총장은 책임이 있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총리폭행'''', ''''스승을 폭행한 패륜아'''', ''''지각없는 테러'''', ''''반인륜''''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1991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당시 외대 총학생장이던 정원택등 4명에게 징역 3년6월에서 2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당시는 4월 26일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고 강경대씨가 시위 중 전경에 맞아 숨진 뒤 학생들과 재야인사들의 항의 분신이 잇따랐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2006년 12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이들에 명예회복 결정을 내렸다.
▲ 또 한 번의 6월 3일
그로부터 정확히 8년 뒤 1999년 6월 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밟던 중 붉은 색 페인트가 든 달걀 세례를 받았다.
사건은 김 전 대통령이 김포공항 국제선 2청사 귀빈주차장에 도착해 환송객 70여명과 악수를 나누던 중 재미교포인 박의정씨에 의해 일어났다. 박의정씨는 당시 지니고 있던 유인물에서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해 나라를 망친 김씨가 할복 자결을 해도 속죄할 길이 없는데도 망발로 통치권에 도전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경제회복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정보다 일본에 늦게 도착한 김 전 대통령은 숙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독재자에게 몇 번 당했지만 얼굴 전체가 조여드는 고통으로 견디기는 어려웠다''''며 ''''''''살인적 페인트'''' 목표는 나를 봉사로 만들어 죽은 사람과 똑같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 박씨는 1심에서 징역 8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었으나. 박씨가 고령(당시71세)인 점과 전과가 없는 점을 고려해 집행유예가 선고 되었다.
▲ 전(前) 대통령의 수난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계란을 맞기 1년 전 1998년 11월에 전두환 전 대통령도 계란 세례를 받았다. 전남 순천 선암사의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공항에 도착한 전 대통령은 공항 정문에서 5.18광주민중항쟁청년동지회 회원에 의해 계란을 맞았다.
전 대통령이 직접 맞은 것은 아니었고, 승용차에 맞은 것이었다. 이 후 선암사에서 법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던 중 또 한 번 계란에 맞았다.
▲ 광주에서 또 한 번
1998년 광주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수행하던 이 중에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있었다. 장세동씨는 지난 16대 대선에서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는데 그는 2002년 11월 18일 광주 5.18 국립묘지 추모탑을 참배하다 5.18청년동지회원들로부터 계란을 맞았다.
▲ 노무현 대통령도 후보시절 계란 세례
노무현 대통령도 후보시절 계란을 맞았다. 5년 전 이맘 때인 2002년 11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농민 7만 여명이 모인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 연설을 하는 도중 참석자가 던진 계란에 맞은 것이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얼굴을 닦은 뒤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 이후 노무현 후보는 ''''현장에 안 나가면 계란을 안 맞는다.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런 현장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내가 또 계란을 맞아서 일이 잘 풀린다면 어디에 가서도 계란을 맞겠다''''라고 말했다.
국민에게 잊혀질만하면 나타나는 계란 투척. 계란을 맞는 정치인들은 모두 억울함을 호소한다. 하지만 그 호소를 국민들도 이해해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