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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만 교포의 정신적 대통령'' 이구홍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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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1964년 한일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전국은 굴욕적인 회담을 규탄하는 시위로 들끓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 3억불에 가려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인 64년에 해외교포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그때부터 해외 동포문제와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동포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재일교포 지문날인 거부 싸움에 앞장섰습니다.

조총련 소속 재일교포를 만나면 한순간에 간첩 취급 받던 시절, 겁도 없이 조총련 의장을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해외 교포가 곧 우리 민족의 자산이고 힘이라면서 해외 교포를 더욱 따뜻하게 대하고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교민청 신설을 70년대부터 꾸준히 주장해 왔습니다.

40년 넘게, 700만 명의 해외 교포 문제와 씨름해온 사람,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된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이구홍 소장을 7월 28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교포는 짐이 아닌 우리의 민족 자산

▶ 6월 19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2007 세계 한인 회장대회''''는 잘 끝났습니까?

400명 정도 참가했는데 예년에 비해서 정말 많은 분들이 왔고, 금년에 모국에 대통령선거가 있다 보니까 교포들이 큰 이슈를 몇 가지 들고 나왔어요. 투표참정권에 대한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죠. 대통령 내외분이 교포들의 외부 행사에 직접 나오신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어요. 교포들에게는 아주 뜻 깊은 일이었죠.

▶ 참정권 문제가 굉장히 민감한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어요.

주로 재미교포들이 주가 되어서 참정권 요구를 하고 있는데, 거기도 시민권자 영주권자로 나눠져 있죠. 원칙적으로 시민권자는 참정권에서 제외가 되고 영주권자의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재미교포사회의 관행은 예를 들어 한인회장을 뽑는다 해도 시민권자와 영주권자 구별 없이 참여했거든요. 간단한 논리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교포사회와 모국과의 끈을 이어주기 위해서는 참정권이라는 제도적 보장이 한편으로는 필요하단 말이죠.시간을 가지고 연구 검토해서 결론을 내자는 것이 제 개인적인 소신입니다.

▶ 국내에서 해외교포를 보는 시각이 돈 벌러 간 사람들 아니냐, 거기에 갔으면 그 나라 사람이지 왜 늘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느냐, 이런 인식들도 있는 것 같아요.

두 가지가 다 맞는데 한국의 최근대사를 보면 해외교포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받았어요.60년대 한국 근대화를 이끌어준 주요 세력이 재일교포들이었거든요. 구로동 수출 공단이라든지 이런 것을 만들어서 기술과 시장원리와 자본, 이 삼박자가 동시에 들어와서 우리가 65년부터 67년, 70년대 초까지 이어졌죠.

당시 일본에서는 북한에선 망치 소리가 들려오는데 남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보릿고개라고 그랬어요. 재일교포 십만이,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남한출신자였는데 북송선을 탔다는 것은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거죠. 아무리 일본 적십자사, 일본 정부 규탄 얘기는 그동안 우리가 많이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 설명이 다 안 됩니다. 이건 방문한 게 아니고 삶의 거주지를 완전히 북한으로 옮기는 것인데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이라면 또 이해가 가요. 북에선 건설 망을 지었다고 하니까요.

그 과정을 거쳐서 북한을 앞선 것이 70년대 초 7.4공동성명이라고 생각해요. 통일이야기가 아니고 남북 어느 사회가 더 잘사는지 내기경쟁에서 우리가 이제는 앞섰다는 그것이 7.4공동성명이라고 저는 보거든요.그 과정 불과 5,6년 만에 한국경제를 그렇게까지 끌어올리는 데는 물론 국내동포들의 피땀이 전제가 되어있지만 해외교포, 특히 재일교포들이 많은 공헌을 해주었어요. 그것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지켜본 당사자로서 교포는 짐이 아니고 우리의 민족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국 국민들 일부가 보는 ''''당신네들이 해외에 거주하니까 우리 국내에 대해서 시시비비 걸지 마라'''' 등등 소위 타인으로 취급하는 그런 자세도 옳은 것은 아니지 않냐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 70년대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사실 독립자금을 모아서 보내주지 않았습니까.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그런 분들도 독립자금 모아서 보내주고 그랬잖아요.

그것이 독립 공채(公債)인데 10불, 50불, 100불짜리까지 있었어요.일당 17센트 받는 노동자가 100불짜리 독립공채를 산다는 것은 조국애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지요.그런데 조국의 독립이 5년 후에 된다, 10년 후에 된다는 보장도 없이, 또 독립이 되면 갚아준다는 주체도 분명치 않은 그런 상황에서 하와이 교포들이 독립공채를 그렇게 많이 사주었어요.

세계소수민족집단, 다시 말하면 미국의 유대인들이 조국애가 강하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최근 몇 년의 예를 보면 우리가 유대인보다 앞서요.예를 들면 88올림픽 때 재일교포들이 일본 돈 120억 엔을 모금해서 고국에 갖다 줬죠. 도쿄에서 모임을 갖는데 역사상 최초로 고국에서 올림픽이 열린다고 하니까 1억 엔을 내겠다고 손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열댓 명이 나왔어요.미국에 있는 600만 유대인들이 중동 3차전 벌이는데 6억5천만 불 현찰을 모금했어요. 그런데 그들은 600만 아닙니까. 그에 반해 그 당시 우리 재일교포를 60만이라고 하지만 조총련을 빼면 한 40만이었거든요. 40만이 120억 엔을 모았다는 것은 (상당한 거죠).

그런데 본국에 있는 동포들이 해외교포들에 대해서 폄하하는 못된 사고가 있어요. 군대문제를 비롯해서 언론이 만들어놓은 사치성 이민이니 도피성 이민... 그런 용어는 어느 의미에서는 내 동포를 이간시키는 언어에요.지금이 700만 교포시대인데 그중에는 도둑놈도 있을 수 있고 살인자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부각시켜서 내 동포는 하나라는 인식을 깨는 작업을 언론이 많이 했어요.

◇ 모국에 대한 애정은 민족의 축복

▶ 70년대 민주화운동 중에는 해외에서 시작된 것들도 있어요.

그때 재미교포들이 중심이 돼서 유신철폐라는 민주화운동을 활발하게 벌였고 서명운동 그런 것들을 했죠.또, 정치인들이 미국에 오면 집권세력은 규탄하고 민주화 세력은 격려하는 이런 걸 활발하게 벌였는데,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면 재일교포와 재미교포를 중심으로 워싱턴에서 세계한미족대표자회의가 있었어요. 재일교포들이 우리는 60년대부터 70,80년대 조국건설에 이러이러한 기여를 했다고 하니까 재미교포들이 ''''장하다, 당신네들이 경제적으로 모국을 도왔다고 한다면, 우리 재미교포는 민주화라는 선물을 조국에 던졌다, 우리는 미국언론을 통해서 한국의 언론이 어려울 때 우리가 격려도 했고 우리는 민주화를 조국에 선물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웃음)

▶ 정말 감사한 일인데 1세대 2세대들을 열심히 공부시켜서 고급인력으로 우리나라에 다시 보내준 일들도 있고 사실 화교들은 많이 보내잖아요. 중국이 오늘날 일어나는 원동력이 화교들의 돈 덕분이었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고 유대인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거의 20년 전에 논문을 하나 발표했어요. 그때는 700만이 아니라 600만 동포 시절이었죠. ''''600만 동포는 누구냐'''' 하는 것을 쓰면서 ''''내가 한국의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겁나는 일이 하나 있다. 중국이 61년에 원자탄실험을 성공하고 UN에 가입했는데 중국의 화교들이 우리 재일교포들이 6,70년대에 했던 식으로 중국본토에 화교의 자본과 기술, 시장원리를 가져갈 것이다. 이럴 때에 기존의 경제대국인 일본과 21세기 세계경제대국으로 떠오를 중국 사이에 껴있는 내 조국,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이냐....'''' 이런 관점에서 ''''우리 600만 해외교포는 누구냐'''' 라는 글을 썼거든요.

중국의 경제성장은 10% 이상 뛸 것이라고 20년 전 논문에 썼는데 ''''우리는 다행히 600만이라는 동포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동포를 비하하는 이 버릇 좀 고치고 둘째는 동포정책을 좀 강화하자.'''' 그래서 나온 게 교민청 신설입니다.

그리고 제가 대한민국 헌법 2조 2항에 해외교민보호조항을 넣었거든요. 그때 아무리 역설해도 듣지를 않아요. 뭐가 그렇게 급하냐고, 국내에 굴뚝 하나 더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그런 분위기였어요.그때 제가 중국의 화교정책, 대만의 화교 정책, 이스라엘의 유대인 이중정책 이런 것을 들이대면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안 듣다가, 북한의 헌법 몇 가지를 들이밀면서 북한도 해외동포원우위원회라는 것이 있고 해외동포보호조항도 있는데 어째서 남한 정부는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느냐고 했더니 북한도 그러냐면서 그제야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2조 2항을 넣는데 제가 지도역할을 했습니다.

해외동포의 머리와 능력, 그런 자원들을 민족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우리 21세기도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는, 그런 관점을 가져줘야 하는데 그 인식이 아주 약해요.

▶ 700만이면 우리 인구의 10분의 1이네요. 머지않아 1천 만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보는데 화교, 유대인, 인도 사람 등 세계소수민족 집단들이 해외에 많이 나가있어요.우리는 본국동포 1할이 해외에 나가 있는데 화교가 5천만이나 있다고 하지만 주로 동남아에 있거든요. 일본사람이 200만 나갔다고 하지만 남,북미를 빼놓으면 얼마 없어요. 중국 러시아에는 없죠.

그런데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나가있어서 분포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구성원을 가지고 있고 우리 동포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도시에 있다는 겁니다.일본 사람들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농촌에서 커피를 재배한다든지 농장을 한다든지 그러는데, 우리는 도쿄, 오사카, LA, 뉴욕, 모스크바... 이런 도시에 집결을 하다 보니까 정보에 밝아요. 고급정보는 농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나오잖아요.

21세기는 정보화시대라고 하는데 이 고급해외정보가 도시에서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는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해외교포를 아픈 이민사 속에서도 탄생을 시켰어요.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민족자원으로써 활용할 수 있느냐인데, 이것은 국가 대사업으로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만 성공한다면 한민족의 21세기는 분명히 활짝 열릴 수 있다는 것이 제 신념이에요.

▶ 정말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구나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지네요. 제 딸 셋도 호주에 나가서 살고 있는데 그 700만 교민의 친척과 가족까지 따지면 세 가족 중에 하나는 일가친척인 셈이네요.

참정권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연히 미국의 정보계통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중에 들은 얘긴데, 한국의 총선 기간 중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전화하는 횟수가 굉장히 많다는 얘길 들었어요.관심이 있으니까 미국에서 볼 때는 누가 됐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하는 것인데 그만큼 한국정치의 영향력을 교포사회가 크게 던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독립운동사와도 연결이 되는데 왜 유달리 한국인들은 해외에 거주하면서도 모국정치에 민감하냐는 것을 분석해서 따지고 들어가 보니까 하와이 독립운동 지지 세력이 한국정부수립에 주요 역할을 모두 했다는 사실이 나왔어요. 중국의 상해임시정부 주요 인사들도 한국의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을 하죠. 그런 역사적인 근원이 있기 때문에, 특히 우리 동포들은 모국정치에 아주 민감해요.

참정권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이 한국정치의, 대게 대통령선거의 30만에서 50만 표가 좌우되는데 재미교포가 다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또 거주국가에서 존경 받는 시민이 되지 왜 국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느냐고 하는데 저는 전문가니까 제 논리에는 져요. 제가 충청도 부여 사람인데 고향을 떠나온 지 50년이 넘었고 지금 사는 데는 서대문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서대문 구청장이 누군지 몰라요. 하지만 부여 군수의 성과 이름이 뭐라는 것은 알아요.

부모님도 부여에 안 살고, 수돗물, 세금하고도 관련이 없어요. 정말 아무 관련 없어도 부여군수는 이름까지 알면서 현재 생활과 밀접한 서대문의 구청장이 누구인지는 몰라요. 이게 일반적인 정서거든요. 고향 애가 없이는 조국애도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해외교포가 모국에 대한 열정, 애정을 갖는 것은 우리민족의 축복이지 그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제가 강조하는 얘깁니다.

◇ 열정과 간판 하나로 시작된 해외교포문제 연구소

▶ 해외에 이민 한 번 가보지 않으신 분이 어떻게 해외교포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한일회담이 막바지였어요. 그때 국민 대다수가 ''''청구권 3억이 되느냐, 평화선을 지켜야 한다'''', 이게 한국에서는 주 이슈였지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이런 것에 관심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저는 그때 유대인과 관계된 책들을 좀 읽었어요. 외대 영문과를 다닐 때라 외대 문헌실에는 그런 도서들이 있었어요.

우연히 그런 책들을 접하면서 읽은 자료 중의 하나를 요약하면「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되면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0.16~1973.12.1) 초대 총리가, 총리가 되자마자 미국에 가요. 미국에 건너가서 하는 얘기가 ''''독립자금을 달라, 인구 70만으로 독립된 나라를 지키기 어려우니 미국 인구의 반을 보내다오, 미국의 로비는 당신들이 해다오.'''' 그런 부탁을 했는데 재미유대인연합회 측에서 ''''독립자금은 당신이 요구하는 배로 주겠다, 로비도 아무 걱정 하지 마라, 그런데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재미유대인이 힘을 지닌 것은 600만이라는 숫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건데 그 반을 보내고 나면 힘이 없으니까 너도 못 살고 나도 못살게 된다, 이건 요구하지 마라.''''」

우리가 3억 불을 받아서 쓰는 것도 긴요하지만 일본의 재일교포 100만을 지킨다면 3억 불은 문제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번 한일회담 타결에 재일교포 법적 지위만은 확실히 하자고 주장을 했어요.지문확인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아침에 목욕을 가는데도 외국인등록증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강제추방의 사유가 됐어요. 그런 무지막지한 내용에 법적 지위를 타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모르면 넘어갔겠지만 일단 알게 된 이상 안 된다고 투쟁할 수밖에 없었어요. 근처의 선후배들이 많이들 잡혀갔는데, 저는 그때 일본교포 신문에 투고도 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었죠.

저도 그때 심정은 2,3년만 하고 취직해서 밥이나 먹고 살자 이 정도로만 생각을 했었어요.그런데 빠져들수록 교포문제는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때 눈을 뜨니까 러시아 지역의 동포문제가 튀어나오고,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것이 튀어나오고, 사할린 동포문제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동포문제를 국내에 알리는 작업도 했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40수 년이 지났어요.

▶ 그래서 해외교포문제 연구소를 만드신 거네요?

64년에 한일회담이 타결되고 졸업 전에 해외교포문제연구소 간판을 해걸었죠.

▶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셨어요?

자금이라기보다는 친구 집의 2층 창가에다 2평짜리를 얻었어요.그때는 등록허가가 나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죠. 신분이 전직 국회의원이라든지 대학교수라든지 했다면 모르겠지만 20대 학생이 그걸 만들려고 하니 거들떠봅니까.그때 이야기하면 자서전 하나 나올 겁니다. (웃음)그때는 교포이야기만 나오면 조총련과 연관시키니까 허가를 내줄 리도 없었죠.

▶ 그때 엄민영 내무부 장관을 만나신 건가요?

외무부에 가서 등록을 하려고 하는데 담당자가 서식도 일러주고 제 이름으로는 안되니까 저명한 학계 분을 업고 오지 않고서는 등록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줬어요. 당시 경희대학교 교수를 하시다가 내무부 장관으로 간 엄민영 장관을 생각해 내고는, 열아홉 번이나 댁으로 찾아갔는데 못 만났어요. 안암동에서 돈암동까지 걸어가고 차비 없으면 못 가기도 하고 고생을 많이 했죠.사무실은 근처도 못 가게하고 나중에 꾀를 낸 게 맨 처음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가정부니까 구루무(화장품)을 사다가 뇌물로 주고 3일쯤 뜸을 들였다 가니까 들어오라는 거예요.

만나자마자 방바닥을 치면서 말이 19-20번이지, 어제까지 교수였다가 장관 됐다고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막 따졌어요.그리고 서울시내의 여고생들에게 재일동포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를 600여 통 받아놓은 것 중에 잘된 편지 2통을 보여줬죠. 한 여학생이 은단 봉지에 흙을 싸서 ''''이것이 조국의 흙이다. 너는 아직 조국의 흙 냄새를 못 맡았을 텐데, 이거라도 맡아다오'''' 라며 여학생 특유의 애절한 감수성이 담긴 편지를 썼어요.

그런 편지들을 보이면서 이 단체가 등록되면 이 편지를 외무부를 통해 일본에 보낼 수 있으니 소장을 맡아달라고 말씀 드렸죠.그렇게 해서 일본으로 편지 보내는 것까지는 성공을 했는데 엄 장관이 얼마 안 있다 주일대사로 나가게 돼요.

▶ 지문날인거부운동은 관철이 됐나요?

재일교포만 혼자 운동해서는 안 돼요. 국내에서도 같이 호응해줘야 하죠. 그 와중에 기억나는 것이 故김경득 변호사가 변호사시험에 합격을 했는데 국적이 일본이라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변호사 자격을 못 준다고 했을 때, 제가 서명운동을 해서 일본 법무성에 보내고 그랬어요. 그래서 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 정부가 이 문제는 한국도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그래서 제가 변호사와 인간관계 맺는 거라든지 교포들에게 지문거부운동 하는데 국내서 지원하는 여론화 운동을 많이 했지요.

◇ 내 신념의 완성은 내외교포에 대한 인식개선

▶ 한덕수 조총련 회장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그때 한덕수 조총련 회장은 일본에서도 보통 예우를 갖추는 게 아니었어요. 제가 오사카에서 동경 들어오는 신칸센(新幹線, 신간선)을 탔는데 교토역에서 치마저고리를 입은 100여 명의 여자들이 남자하고 앉아서 누군가를 막 환호하고 있더군요. 누구한테 그러나 봤더니 창가에 앉은 노신사가 가만히 무게 잡고 있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 신문에서 보던 한덕수 회장이에요. 제가 가만둘 리가 없죠. (웃음)

그 앞에 가서 60도로 절을 했어요.그리고는 한 가지 묻겠노라며 그 앞자리에 앉았죠.''''우리는 경험철학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북에서 낙동강까지 갔는데 왜 통일이 안 됐습니까, 선생님이 주장하는 통일이 왜 안 됐습니까, 미군이 인천으로 들어와서 안 된 거 아닙니까, 그건 사실 아닙니까, 우리 국군이 압록강까지 갔는데 왜 통일이 안 됐습니까, 중공군의 인해전술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한덕수 선생님의 조국과 여기 앉아있는 이 젊은이의 조국은 남북 나눠 가지고는 안 된다는 아주 값비싼 교훈을 우리가 얻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일본에 있는 60만이, 오늘은 민단(在日本大韓民國民團, 재일본대한민국민단)규탄대회를 조총련이 하고 그 다음 날은 민단이 조총련규탄대회를 한다고 한다면 일본사람들이 뭐라고 보겠느냔 말입니까. 이 조센징들 너희 나라에 가서 데모를 하든지 싸움을 하지 왜 남의 나라 와서 싸움질이냐., 이런 손가락질 할 거 아닙니까? 선생님 같은 지성인이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큰소리로 말했더니 ''''자네 KCIA(한국 중앙정보부) 아닌가?'''' 하며 묻는 겁니다.그래서 제가 ''''KCIA 앞잡이든 뒷잡이든 그건 둘째 문제고 선생님 제 이야기가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참 하다 보니까 도쿄역이라고 해요. 그래서 ''''한국에서 온 청년에게 뭐라도 한잔 안 사줍니까?'''' 그랬죠. (웃음) 그때 저한테 잡혀서 얘기를 참 많이 했어요.

▶ 돌아와서 조사 안 받았어요?

그때 제 신념은 명색이 제일교포문제 전문가라고 하면서 한쪽 민단세계만 알고 조총련은 모른다면 그건 반쪽이라고 생각했어요.제대로 전문가가 되려면 조총련도 알아야 하고 조선 대학도 좀 가봐야 하고, 조총련 초중고 학교도 가보고, 그 학교 선생님들과 민족교육 토론도 해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대놓고 했지만 한 번도 안 잡혀갔어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정부에 고마움을 가지고 있죠.

▶ 학생 때부터 그런 일을 하셨으면, 부모님께서 걱정이 많으셨겠어요.

아버님이 제 대학 졸업 때까지만 생존해 계셨다면 아마 저도 유학생 출신이 됐겠죠. 아버님이 깨어있는 분이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 저를 장터에 데리고 가서 지붕에 올려놓으면 말을 그렇게 잘했다고 해요. (웃음)막걸리 심부름을 하면 반은 제가 마셨는데 우리 아버님은 혼내지 않고 그런 것에도 행복감을 느끼셨어요. 아버님이 자유분방하게 저를 키워주셨죠. 형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유난히 저를 좋아했어요.

▶ 정치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기질적으로 정치에 묶여있죠. 일찍 그 세계에 발을 들였고 주위에 아는 사람도 많고 도와준 사람도 있고 그런데 제가 약점이 하나 있어요. 사람 이름을 못 외워요. (웃음)정치는 접고 연구소를 하는데 그 당시 민간연구소라는 것은 정부의 지원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예요. 지금은 NGO다 뭐다 정부와 기업에서 여러 가지 지원이 있잖아요.

▶ 어떻게 끌어오셨어요?

월세가 좀 밀리면 주인이 책상과 내가 아끼던 책들을 무지막지하게 밖으로 다 집어 던져요. 방세 못 내지, 막걸리 값 밀려있지... 그래도 지금 재단 이사장까지 왔잖아요. 지금은 자동차 주지, 방 주지, 비서 주지, 그런데 그때가 더 그리워요.

▶ 이사장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셨다지만 가족은 어떻게 하셨어요?

피라미 짓 5년 하기가 어렵지 피라미 10년 하면 부하가 물어다 줘요. (웃음)일본 갈 때 만 엔 정도 어떻게 넣어준 거 가져가요. 일주일 되면 한 50만 엔 정도가 생기는데 그때 50만 엔이면 꽤 큰돈이었어요. 제가 인복이 많아요. 뇌물이라면 내가 높아졌을 때나 권력이 있을 때 그럴 때 주는 게 뇌물인데, 생판 들어보지도 못한 연구소 간판 달고 다녔으니 그건 뇌물이 아니죠. (웃음) 50만 엔이 생기면 곧바로 재일교포청년회에 가서 조총련 불고깃집으로 전부 모이라고 하죠. 그러다 보면 전부 선후배가 되고 그러는 겁니다.

▶ ''''700만의 대통령''''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어요.

이번에 행사 때 주체자로서의 인사말은 보냈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대통령 내외분의 양해를 구해 꿈에서라도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다고 했죠. 그래서 ''''내외교포는 하나''''라는 복창을 3번 했어요. ''''700만 해외교포는 하나''''라는 신념을 가지고 운영하겠다는 내 다짐을 대통령 앞에서 한 거죠.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겠다는, 신념대로 일하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했어요. 끝나고 혹시나 해서 비디오를 보니까 대통령 내외분이 두 분 다 좋아서 박수를 치고 좋아하시더라고요.

교포들에게 ''''대통령이 내 자리를 임명했지만 난 여러분들에게 취임을 못 받았다. 오늘 이 순간에 내가 700만 교포의 대통령이냐, 아니냐, 여러분이 취임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모두 기립박수를 쳐줬어요.그래서 ''''나는 정신적으로 700만 해외교포의 대통령이오.'''' 그랬죠.

▶ 남은 임기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취임사 때도 이야기했는데 전에도 느꼈지만 재외교포이사장이 왔어도 본국 국민의 재외교포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요. 재외교포에 대한 인식전환만 하고 가도 내 임무는 다했다고 생각해요.그래서 취임하자마자 우리 사무실 건물에 ''''따뜻하게 맞이하자! 모국방문, 해외교포''''를 걸고, 두세 달 지나서는 ''''내외교포는 하나다!''''를 걸었어요.또 바꿀 거예요. 10월에 ''''세계한인회 날''''을 지정해 줬잖아요. 그걸 계기로 해서 김포공항에서부터 시내 들어오는 곳에 플래카드를 붙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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