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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투데이]분단 한국과 6자회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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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미·소)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중략)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있는 것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위의 글은 1948년 2월 10일 백범 김구 선생께서 남북협상을 앞두고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의 내용이다. 남한의 김구·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한 정치지도자 간의 협상을 제안했다.

협상은 당시 유엔의 결정에 따른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앞두고 민족통일문제를 논의할 목적으로, 4월 19일 평양에서 개최돼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미·소 양국 철수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서울로 돌아온 남북협상파 일행은 5월 10일 총선에 참여하지 않고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아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목표로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남북한 각각의 단독정부수립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통일민족국가수립노선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반면 이승만은 남북통일론을 지양하고 단독정부수립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미·소 간의 냉전은 격화돼 갔으며,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암살되었다.

그 후, 김규식은 6·25 전쟁 당시 납북됨으로써 이들의 통일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이승만은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난 뒤 6월 3일 정읍을 방문한 자리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나 위원회를 설치해 38선 이북의 소련군 철퇴를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한다"는 ''정읍 발언''을 했다.

우익세력은 ''신탁통치''에 중점을 두고 탁치야말로 또 다른 미·소의 식민지정책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반탁을 전개하는 가운데, 좌익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 중 신탁통치안보다는 한반도 임시 ''민주정부수립론''에 역점을 두고 탁치안을 지지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당시 두 거목이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대립은 우리 민족에게 분열적 대립의 서막처럼 다가왔다.

1948년 5·10 총선에 김구가 제헌의원에 출마, 당선돼 보다 안정된 제도권에서 통일론을 주장했더라면 1년 뒤의 암살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제에 의한 오랜 식민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간의 냉전과 이에 편승해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한 국내 일부 정치세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모쪼록 2월 8일에 있을 6자회담에서 북한이 조건없이 핵폐기 프로그램에 동의해 전 세계인이 희망하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미국정부가 제안하고 있는 평화협정으로 하루 속히 전환돼 한반도에서 영원히 전쟁이 종식되고 나아가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이글을 쓴 노량진 이그잼고시학원의 김유돈 교수는 ''우리한국사''·''우리근현대사''·''형통지문한국사''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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