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은이
감이 잡히지 않았다. 1980년대생 가수들이 주를 이룬 가요계에서 1975년 데뷔한 가수 혜은이(50)의 존재는 안갯속에 손을 넣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물론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제3한강교'', ''파란 나라'', ''감수광'' 등 제목만 들어도 음을 흥얼거리게 하는 숱한 히트곡을 만든 가수란 점은 그의 이름을 여전히 빛나게 한다. 히트곡 수만 보면 1970~1980년대 ''시대를 풍미한 가수''란 수식도 무색하지 않다.
하지만 11년간 혜은이는 대중의 곁을 떠나 있었다. 1995년을 마지막으로 음반 발표를 멈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음반 제작자와 심한 마찰을 겪었어요. 서로 의견이 너무 달랐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죠.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그때 받은 충격이 커서 더 음악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혜은이는 가수로 성공한 뒤로는 음반 제작을 손수 해왔다. 원하는 모든 걸 음악 안에서 아낌없이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작자들은 기성 가수를 불편해했고, 제작자 역시 제가 원하는 음악을 충분히 지원해주지 못했죠. 제 노래는 당시 분위기와 달리 팝의 요소가 커서 여러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데 환경은 그렇지 못했어요. 자연스럽게 음반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죠."
탄탄대로를 걷던 혜은이는 결국 한 번의 어긋난 만남으로 11년의 공백을 보냈다. 누구도 아닌 자의에 의한 선택이다.
2003년 자궁 적출 수술받고 우울증 앓아 쉬고 싶어 떠나있던 11년이었지만 처음 기대만큼 편안하지는 않았다.
"2002년부터 2년동안 미사리에 라이브 카페를 열었어요. 사람들과 가까이 만나는 게 좋았는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루도 빠짐없이 무대에 올라야 하니 많이 힘들더라고요. 게다가 카페 운영까지 해야하니까."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3년에는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모든 게 손에 잡히지 않았고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8월 자궁에 물혹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양성이었지만 수술을 피할 수 없어 자궁 적출 수술을 했죠. 그때부터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수술 후 혜은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우울증이 겹쳐 겉으로 모두 표현할 수 없었지만 ''건성건성'' 시간을 보냈다.
3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과정인데 유난히 힘들게 보낸 것 같아요"라고 말하지만, 속 시원히 말 한 번 못해보고 그 시간을 버텨냈다.
어려울 때 가장 큰 힘이 돼 준 건 남편인 연기자 김동현과 중학교 3학년 아들 민석 군이다.
"아들한테 신경을 쏟으니 주변에서는 마마보이로 키우는 것 아니냐고 걱정도 들었지만 요즘은 엄마 없이 모든 걸 알아서 해내는 대견한 아들이에요(웃음)."
팬들이 직접 나서 음반 제작, 11년 만에 신보 발표 그 사이 음반 제의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신인이라 마음먹고 주변과 협력하는 일에 엄두가 나지 않았고, 크고 작은 콘서트에 익숙해지니 솔직히 타성에 젖기도 했단다.
혜은이
이런 혜은이를 다시 제자리에 세운 것은 30년 세월동안 변하지 않은 팬들이다.
인터넷 팬카페 ''열정'' 회원들은 혜은이를 찾아 몇 차례나 음반 발표를 제안했고, 그럴 때마다 거절하는 혜은이의 발목을 잡으려고 작곡가들에게 직접 곡을 구입했다.
"팬카페 모임에서 팬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으냐''고 묻기에 요즘 작곡가들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어요. 리키마틴처럼 라틴 장르도 도전하고 싶다고 했죠."
혜은이의 바람을 들은 팬들은 곧장 주가를 올리는 작곡가 홍진영과 추가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난 네가 좋아'', ''강해야 돼'' 3곡을 받아왔다.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강해야 돼''는 혜은이의 소망대로 라틴풍 댄스곡으로 여전히 청아한 목소리가 담겼다. ''여전히''와 ''난 네가 좋아'' 역시 오랫동안 노래 부른 사람의 힘이 전해진다.
"열정적인 팬들을 보니 잊고 있던 책임감이 다시 생겼어요. 10년 동안 의무감을 잊고 살았구나 반성했습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더 무책임하면 안되겠다 싶었죠. 남은 가수 인생을 흐지부지 보내지 말자 다짐했습니다."
20년간 인가 가수의 자리를 지키게 해줬고, 제2의 가수 인생까지 열어 준 팬들에게 혜은이는 값지 못할 빚을 진 셈이다.
"저는 그 어떤 가수보다 축복받고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앞으로는 직무유기를 하지 않고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다해 노래할 생각입니다."
혜은이는 22번째 정규 음반 ''강해야 돼''를 들고 내년 초부터 활발한 활동을 펼칠 생각이다. 오랜만에 TV 출연도 계획 중이고, 5월경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 공연도 펼친다.
톱스타에서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 겪은 아픔을 딛고 다시 무대에 선 혜은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