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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사라진 평양'…처절했던 폭격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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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⑤]불바다로 변한 북한…"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다"

1950년 9월 미 공군의 B-26 경폭격기가 전북 이리조차장을 폭격하고 있다 (사진=창비 제공)

 

◈ "어설픈 폭격의 시작…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했다"

#장면1

1950년 6월 27일 저녁.

도쿄에 있는 맥아더 장군은 제5공군사령관 파트리지에게 퉁명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폭격기를 한반도로 출동시켜 앞으로 36시간 동안 모든 폭탄을 북한군에게 쏟아부어라"

"지형도 모르고 한국군과의 교신이 안돼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38선과 전선 사이에서 움직이는 건 다 폭격해. 미군이 왔다는 걸 알면 북한군은 제 자리로 돌아갈거야"

#장면2

1950년 7월 7일 김일성 내각수상 사무실.

연신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김일성 수상이 슈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언성을 높였다.

"사방에서 전화로 미 공군의 폭격과 대규모 파괴에 대해 보고한다. 왜 소련은 공군을 안 보내는 건가? 정말 힘들다~"

당시 전황은 북한군이 오산에서 미 육군 선발대를 궤멸시키면서 쾌속의 속도로 대전으로 남하하는 중이었다.

급하게 출동한 미군 폭격기들은 여의도 비행장이나 서울역,한강 교량 등 요충지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임진강 방어선에서 철수하다 문산에서 B-26 경폭기가 우리 부대를 폭격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고 회고했다.

◈ "점차 강도가 높아지는 미 공군의 폭격"

1950년 8월 28일 폭격을 받기 전의 함경북도 성진제철소 (사진=창비 제공)

 

폭격이 끝난 성진제철소 모습 (사진=창비 제공)

 

한국전쟁 발발 이후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동안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차례차례 폭격의 강도를 높였다.

처음에는 남하하는 북한군이나 산업시설,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도로·철도·항만 등 북한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곳을 주로 파괴했다.

그러나 구름 위 높은 곳에서 B-29 중폭격기가 쏟아부운 폭탄이 정확히 맞을 리 없었다.

1950년 7월 13일 B-29 중폭격기 56대가 참가한 원산폭격에서는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에 폭탄이 떨어져 1,249명이 희생되었다.

이중 195명이 여성, 125명이 어린이, 122명이 노인이었다.

그러나 북진하던 유엔군이 대거 참전한 중국군에게 참패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11월 5일 중대한 명령을 내렸다.

"수력발전소를 제외하고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삼아 초토화시켜라"

이때 등장한 폭탄이 독일과 일본을 불바다로 만든 소이탄과 네이팜탄이다.

가솔린이 섞인 이 폭탄들은 터지면 직경 약 45미터의 둥근 지역을 모조리 태웠다.

이때부터 유엔군 북쪽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모든 지역이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독일과 일본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대상으로 했던 2차대전과 달리, 북한에서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까지 모두 불살라버렸다.

폭격의 패턴은 먼저 중폭격기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면, 이어 전폭기가 나타나 화재 진화를 못하도록 기총소사를 하고 시한폭탄을 뿌렸다.

세번째 단계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1년 여름부터였다.

전선이 교착되자 미 공군은 전선으로 보내는 보급을 끊기 위해 북한전역을 연결하는 철도망을 파괴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협상이 중단되자 적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모든 민간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동시에 폭격대상에서 제외시켰던 수력발전소와 논농사에 필수적인 저수지를 대거 파괴하기 시작했다.

수풍발전소를 시작으로 부전, 장진, 허천발전소 등이 무너졌다.

곡창지대인 해주의 경우 저수지 20곳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둑이 파괴돼 마을이 물에 잠기고 벼농사가 중단되었다.

포로수용소를 나온 미 24사단장 딘 장군은 "희천 시가지를 보고 놀랐다. 도로와 2층 건물로 이뤄진 도시가 사라졌다. 건물은 공터 아니면 돌무더기만 남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가 텅 빈 껍데기로 변했다"고 회고했다.

◈ "폐허만 남은 도시…북한 주민 가슴에는 '미국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

미 공군의 연이은 폭격 때문에 사라져버린 평양 시가지 (사진=창비 제공)

 

1.4후퇴 때 개성에서 피난 내려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고향을 두고 내려왔습니까?"

"공산당도 싫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폭격이랑 원자폭탄이 더 무서웠지"

유엔군의 후퇴와 함께 남한주민의 1차 피난에 이은 북한주민의 2차 피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폐허 속에 남겨진 주민들은 배고픔과 함께 가슴 속에 깊은 원한이 자리잡았다.

한반도에서 가장 친미적이고 기독교가 번성했던 평양 일대 서북지역은 '반미'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지금도 북한에서 가장 심한 욕이 '미제 승냥이놈'이다.

탈북자들은 모두 어린 시절 유치원과 인민학교에서 '미국놈 때리기' 놀이를 했다고 진술했다.

북한폭격에 대해 기념비적인 저서 '폭격'(창비 간)을 펴낸 김태우 서울대 평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어린 시절 강원도 출신인 할머니에게 전쟁 때 제일 무서운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폭격이었지.굴뚝에서 연기가 날 때마다 폭격하는 것 같더라. 그 이후로 제대로 밥을 해먹을 수 없었어'라고 회고하셨다"고 밝혔다.

6자회담도 그렇고, 미북 양자회담도 그렇고, '통일대박'도 좋지만, 북한 주민 가슴 속에 응어리진 공포와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북관계를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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