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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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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열 번역사업본부장 

 

임금에게 생선가시처럼 따끔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신하를 '골경지신'이라고 한다. 사실 임금에게 직언을 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자신의 운명을 건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신하만 있어서는 반쪽의 미담일 뿐이다. 그런 과감한 직언을 좋게 받아들이는 도량을 지닌 임금이 있어야 미담은 완성된다.
 
물론 간언의 임무를 맡은 간관(諫官)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서 이상론적인 주장만 고집하거나, 임금이 추진하고자 하는 일을 언관(言官)이라는 직책을 빌려 저지하려고만 하는 폐단은 늘 있어 왔다.
 
그래서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은 '간관론(諫官論)'을 지어, 간관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간관론변(諫官論辨)'을 지어 반박했던 조선 후기의 문인 이의숙(李義肅, 1733-1807)의 주장처럼 어쨌든 직언을 하는 간관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옛날에는 직언을 용납하고 우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직언을 하는 방식도 과감했다. 북조 때 위나라의 고필(古弼)은 재가를 받으려다가 임금이 다른 신하와 바둑을 두면서 돌아보지 않자 임금의 면전에서 그 신하의 머리채를 잡고 때리면서 '조정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실로 이 놈 때문'이라고 일갈했고, 위나라 문후(文侯) 때 사경(師經)은 임금이 실언을 하자 임금을 폭군인 걸주(桀紂)에 비유하며, 타고 있던 거문고로 임금을 내리쳐 면류관을 망가뜨리기까지 했다.
 
조선 선조(宣祖) 때 김성일(金誠一)은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걸주 같은 폭군에게 비겨 '대전 위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고, 내관 이봉정(李鳳禎)은 "왜 요즘 살이 쪘느냐"는 광해군(光海君)의 물음에 "선조 임금 때는 밤늦도록 정사를 보시는 임금을 모시느라 힘들어서 살이 찔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은 놀고먹느라고 살이 쪘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과격한 방식의 간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간언을 할 때는 임금이 관심이 있고 잘 아는 부분부터 시작하라는 '주역'의 '납약자유'라는 말이나, 춘추 시대 위나라 대부(大夫) 사어(史魚)가 임종 때 남긴 유언으로 문상 온 임금을 깨우치게 만든 '시간(尸諫)'의 고사는 후대에까지 간언의 주요 원칙으로 널리 인용됐다.
 
이렇든 저렇든 신하는 임금을 바로 잡고 이상 국가를 구현하겠다는 간절한 충성심이 있고, 임금은 그런 직언을 받아들일 도량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상하관계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이런 직언을 해 줄 만큼 정성스런 아랫사람을 기대하기 어렵다. 옛날에도 신하는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임금을 버리고 떠나도 된다고 했으니, 하물며 지금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직언을 하는 사람보다, 직언을 잘 받아들이려는 윗사람의 노력이 더 절실한 시점이다.

권경열(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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