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건주 (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많은 30대 이상 독자들이 '순돌이'를 기억할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일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전파를 탔던 TV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 나오던 꼬마 말이다.
극중 전파상을 하는 아빠(임현식)와 억척스러운 엄마(박원숙)를 둔 순돌이는 그리 넉넉지 못한 살림으로 다세대주택 바깥채에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똘똘한 아이였다.
당시 다섯 살배기 꼬마였던 순돌이가 지금 나이 서른을 훌쩍 넘긴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 서울 목동 CBS노컷뉴스를 찾은 배우 이건주(33)는 순돌이 특유의 환한 웃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촬영장에서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가도 졸릴 땐 떼쓰며 울고, 자는 신에서는 정말로 자고는 했죠. 꼬마였으니 어른들도 다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한지붕 세가족으로 한참 인기를 모을 때는 일주일에 프로그램을 8개 했던 기억이 나요.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영화도 찍고, 라디오를 하면서 광고 찍고 사인회 다니고, 예능에도 출연했으니까요."
자다 일어나 보면 촬영장에 와 있었고, 촬영을 마친 뒤 잠들었다 깨면 또 다른 촬영장이었다. 사람들이 "예쁘다" "귀엽다"며 만지고 꼬집어서 몸에서는 피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고 이건주는 전했다.
"당시 '순돌이가 벌어들이는 돈이 웬만한 기업의 고위 간부보다 더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더군요. 아역 배우들 중에서는 물론이요, 한 영화에서는 당시 톱배우보다 출연료를 더 받았다고 들었는데, 어린 나이여서 직접 돈을 만져본 것은 아니니 잘 모르겠어요. (웃음) 지금도 번 돈은 모두 부모님께 드리고 필요할 때마다 용돈을 타 써요. 신용카드는 없고 체크카드 하나 들고 다니는데, 제가 직접 관리했으면 오히려 경제적으로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순돌이로 살던 이건주의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리던 그는 열여섯 살 무렵 출연한 한 청소년 드라마의 주인공을 끝으로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춘기였어요. 학교 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고 정신 없이 일만 하는 것 같았죠. 그때는 모든 게 힘에 부치고 싫었어요. 친구들과 노는 모습 하나, 먹는 것 하나도 나중에 와전돼 별별 얘기로 다 돌아올 때였죠. 주변에서는 제가 뭘 해도 수근거리는 것 같고, 어린 나이에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었어요."
평범한 학생으로 살고 싶어 방송 활동을 그만뒀지만,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친구들을 사귀어도 주변에서 '연예인이니까 애들이 붙는다'는 숙덕거림은 멈추지 않았고, 때로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이어졌다.
"저와 가깝게 된 친구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학교 생활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잘 버티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는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때 많이 단단해진 듯해요. 저에 대해 뭐라 하는 친구들이랑 싸우기보다 조용히 학교생활 잘 하고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려고 노력했죠. 그렇게 지금도 연락하는 친구들을 만났어요. 공부에는 소질 없었는데, 어릴 때 대본을 외운 덕인지 암기 과목은 정말 잘했어요. (웃음)"
연예계를 떠난 7년여 동안 이건주는 조금씩 대중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흥미로운 캐릭터를 볼 때면 '내가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왜 그만뒀지'라는 아쉬움도 때때로 찾아왔다.
배우 이건주 (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그렇게 연기에 대한 갈증이 커지던 스물두 살 이건주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은 어릴 적 맺어진 인연이었다.
"제가 다섯 살에 대뷔한 작품에서 조감독을 하셨던 이대영 감독님이 2002년 드라마 '로망스'의 연출을 맡으시면서 저를 한 달간 수소문하셨대요. 당시 배우로서 가능성을 봐 주셨다는 점이 감사할 따름이었는데, 오히려 감독님께서 '작은 역을 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정말 잘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더군요."
촬영 현장에 30분 먼저 나가고 배우, 스태프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습관도 그때 다져졌단다. '어릴 때 좀 유명했다고 그러냐'는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할까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현장에서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90도로 깍듯이 인사부터 해요. 항상 웃으면서 진심으로 대하면 촬영이 끝나더라도 좋은 인연으로 남는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내가 왕년에…'라는 허튼 생각은 1%도 가져본 적 없고요. 현장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을 뿐이죠."
이후 주로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비치던 그를 스크린으로 부른 이가 김현석 감독이다. 이건주는 김 감독이 연출한 영화 '스카우트'(2007)에서 야구선수 선동열을 연기했다. 그는 지금도 김 감독을 만나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감독님이 스카우트를 준비하시면서 선동열 역을 두고 오디션을 무척 많이 보셨다고 들었어요. 촬영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못 정하시다가 우연히 제 사진을 보시고는 무조건 오케이 하셨다더군요. 제가 당시 외국 여행 중이어서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귀국해 감독님을 뵙고 영화를 찍었어요. 그때 촬영을 마치고 감독님이 '나중에 꼭 비중 있는 역으로 캐스팅해 주겠다'고 하셨고, '열한시'에서 그 약속을 지키셨죠. 육상효 감독님의 '강철대오'에 캐스팅 됐을 때도 평소 친하신 김 감독님의 추천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2012년에만 최근 개봉한 '여배우는 너무해'까지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