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또 하나의 약속' 사람은 부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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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뚤어진 경제시스템 한가운데서 세상을 바로 보게 된 가족들 얘기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을 가리켜 한자로 끊을 단(斷)에 창자 장(腸)을 써 '단장'이라 한다.

창자가 갈가리 끊어지는 아픔이 어떠한 것인지 우리는 쉽사리 짐작할 수조차 없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이 그러하다니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크나큰 불효'라는 옛말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질 법도 하다.
 
개개인의 과오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탓에 부모들이 단장의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면, 현재 누군가의 부모이고 앞으로 누군가의 부모가 될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까.
 
우리의 인간다운 삶과도 맞닿아 있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특별한 길잡이 노릇을 한다.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상구(박철민)는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딸 윤미(박희정)가 대기업에 취직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대학에 못 가는 것이 속상할 법도 하건만 "빨리 돈 벌어 아빠 차도 바꿔 드리고 엄마 용돈도 드리고 남동생 대학 공부도 시키겠다"는 딸이 상구는 마냥 기특할 따름이다.
 
그러한 딸 윤미가 입사 20개월 만에 큰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온다. 반도체 원판을 화학물질 혼합물에 담궜다 빼는 작업을 하던 딸의 병명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한 가닥 희망을 걸고 큰 병원에 입원하지만, 치료가 쉽지 않은데다 비용 부담도 상당해 상구 가족의 좌절감은 커져만 간다.
 
앞서 상구네 집을 찾아 "윤미가 사표를 쓰고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4000만 원을 주겠다"던 회사 관계자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고, 윤미는 10만 명에 한 명꼴로 걸린다는 백혈병인데, 자신이 일하던 반도체 공정 라인에서만 5명이 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에 빠진다.
 
산재 신청을 하겠다는 상구의 협박 아닌 협박에 마지못해 나타난 회사 관계자는 "지가 병 걸린 걸 왜 남 탓을 하는지" "대한민국 국민을 먹여살리는 게 누군데"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말만 내뱉고, 돈으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막으려 든다.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마련이다. 자기 가족이 사람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을 절감한 상구는 회사 측의 비상식적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품 안에서 죽어가는 딸을 부여잡고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말한다. "아빠가 니사('너'라는 뜻의 강원도 사투리) 어려운 거 다 풀어 줄게."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스물셋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 씨와 그녀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애써 온 아버지 황상기 씨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사람을 한낱 기계 부품으로 취급하는 비뚤어진 경제 시스템의 한가운데에 선 평범한 한 가족이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에 맞서게 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생산성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최소한의 안전 조치마저 무시할 것을 강요당했던 반도체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이러한 현실을 예방하는 데 투자했어야 할 인력과 돈을 자신들의 과오를 덮는 데 써 버린 기업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특별한 공을 들인다.
 
영화 속 반도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부조리, 이에 대항해 연대한 가족들이 취한 행동은 현대 철학의 거장 푸코(1926-1984)의 '삶권력(biopower)' '삶정치(biopolitics)' 개념을 연상시킨다.

푸코는 우리 삶을 관리하고 생산하는 삶권력이 모세혈관처럼 사회 곳곳으로 뻗어나가 개개인에게 그 힘을 행사하고 있다고 봤다. 하지만 삶권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에 저항하고 새로운 주체성을 낳는 삶정치가 따라다닌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이 가장 자유로울 때는 권력의 채찍으로부터 벗어나 잠든 시간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힘에 저항할 때라는 것이 푸코의 견해다.
 
극중 상구를 돕는 노무사 유난주(김규리)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특정 기업의 슬로건에 중의적인 뜻을 담아 "그 사람들이 우리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었다"고 전하는 말이나, 상구의 고군분투를 외면하던 아내 정임(윤유선)이 죽은 딸의 일기를 본 뒤 남편에게 "우리처럼 자식 먼저 보내는 부모들 안 생기게…… 당신 가서 싸워"라고 말하는 대목이 푸코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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