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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떠나는 서울 여행 - ‘비주류’, ‘언더’, ‘인디’로 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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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발견 - 음악으로 그린 서울 지도

우리 대중가요에서 비주류, 언더그라운드, 인디 등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음악은 어디서 탄생했을까? 어느 장소에서 어떤 배경 속에 이전과 다른 음악이 만들어졌고, 또 마침내는 어떻게 그 음악이 우리 대중가요의 주류로 부상하게 된 것일까?

서울의 각 장소들이 어떻게 음악들을 낳았는지를 살펴보면서 음악을 통해 서울의 장소들을 새롭게 만나보는 CBS 기획특집 [Sound map – 음악으로 그린 서울지도] '제3부 : 해방구, 노래를 불러모으다 – 이태원, 대학가, 홍대 앞’은 우리 대중가요 역사에서 새로운 음악이 자라난 곳 우리 문화의 틈새이자 해방구들을 탐색했다.

◈ 이태원 - 대중가요의 새로운 주류를 탄생시키다

이태원은 우리 대중가요의 패러다임을 바꾼 신주류 탄생의 근거지다. 50~60년대 일본식 엔카의 영향을 받은 트로트 위주의 가요의 판도를 미국 팝으로 전환시킨 곳이 이태원이다. 뿐만 아니라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백인 위주의 팝이 지배하던 음악 시장에서 흑인 랩과 힙합을 수입해 우리 식으로 다듬어 90년대 댄스가요의 전성기를 이끈 곳도 이태원이다.

왜 이태원이었을까?

이는 이태원의 슬픈 역사와 그것이 갖는 역설적 기능에서 비롯됐다. 이태원은 역사적으로 외국군의 점령지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진을 쳤다가, 명나라가 또 진을 친 뒤, 병자호란 때는 청이 본부를 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는 일본군, 해방 후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했다. 이렇듯 이태원은 외국 세력의 점령지로서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역설적으로 이태원은 이 슬픈 역사 때문에 다른 곳이 갖지 못하는 기능을 갖게 됐다.

첫째는 점령군이 이태원에 주둔했기 때문에 이태원은 점령국의 문화가 직수입되는 장소였다는 점, 둘째는 이 장소가 미군 주둔 부대 즉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와 같았기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 문화적 검열이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적 해방구였다는 점이다.

이태원 미8군 무대는 우리 가수들이 미국식 대중음악을 경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간이었다. 미8군 무대는 50~60년대 최고의 가수 등용문이었고,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미8군 무대로 모여들었다. 패티김, 조용필, 신중현, 조영남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은 모두 미8군 무대 출신이었다. 60년대 이후 처음으로 공중파 방송 생기고 스타가 필요한 시기에 바로 이 미8군 무대 출신 가수들이 초기 가요시장을 주도했다. 우리나라에 양풍 음악 즉 미국식 팝 음악은 바로 이런 경로를 통해 우리 가요를 뒤바꿔놓았다.

즉 1950년대 미군 대상의 공연 무대를 통해 훈련된 가수와 그들의 음악을 통해 미국 대중음악이 우리나라로 급속히 유입됐고, 이태원은 바로 그런 공간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미군 클럽에서의 활동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미군 부대의 중심인 용산과 이태원 기지촌은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새로운 대중음악 흐름을 받아들이고 훈련하는 통로였다.. 당시 한국의 대중들에게 당장 인기를 얻을 수는 없지만, 몇 년 후면 한국인들도 마음을 열게 될 그런 경향들을, 미리 배우고 익히는 곳이었다.

단순히 미8군 무대만이 아니었다. 이태원은 한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낯선 미국의 최첨단 인기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한국 속 미국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국의 평균과 상식에서 벗어난 일탈과 실험이 가능했던 곳, 바로 문화의 해방구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획일화된 표준에 대한 강압에서 비껴간 곳이 이태원이었다. 당장 표준에서 벗어난 체구를 지닌 이들은 옷을 이태원에서 샀고, 남자가 머리를 길러도 이태원에서는 편안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빽판이라 불리던 최신 불법 복제음반을 가장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곳도 이태원이었고, 문화 통제의 시기에 군사정권의 검열과 금지로부터 자유롭던 일종의 치외법권 지대가 이태원이었다. 이런 이태원의 장소성은 한국 사회의 표준에서 억압을 느끼는 이들이 해방감을 느끼며 모여드는 곳이었다.

국내에선 접하기 힘든 미국의 실시간 인기 음악을 맛볼 수 있던 장소. 그곳은 동시에 일종의 문화적 치외법권지대라는 이유로 뭔가 검열과 제지가 미치지 않는 독특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장소였기에 이태원은 우리 문화에서 독특한 위상을 지니면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기운이 감돌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비주류 문화의 인큐베이터, 그곳이 이태원이었다.

가죽 바지에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녀도 뻘줌하지 않은 곳, 헤비메탈 가수 김도균에게 이태원은 음악적 아지트였다. 80년대말 우리에게 낯설었던 비주류 음악인 흑인 랩과 힙합을 문나이트라는 클럽에서 미군 흑인들과 춤추고 어울리면서 배우고 익혀 우리 가요에 접목시킨 듀스의 이현도에게도 이태원은 새로운 음악의 산실이었다.

이태원에서 브레이크 댄스의 1인자로 불리던 가수 이주노. (송은석 기자)

 

이태원에서 브레이크 댄스의 1인자로 불리던 이가 '인순이와 리듬터치', '박남정과 프렌즈' 등에서 활동하며 '비보이 1세대'로 활약한 이주노였다. 이주노와 함께 '춤꾼의 메카' 이태원 문나이트 클럽을 주름잡던 양현석은 힙합 댄스의 대가였다. 이 두 춤꾼이 역시 이태원에서 연습하던 한 가수를 만나 90년대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작을 열어젖히는데, 이 노래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다.

50~60년대 일본식 엔카풍의 가요를 미국식 팝 분위기로 바꿔놓은 이태원은 80~90년대에는 흑인 힙합과 랩, 스트릿댄스 등이 우리 가요를 휩쓸게 한 산실이었다. 기존의 비주류 장르가 주류를 휩쓸기까지 몸을 만든 곳이 이태원이었던 것이다. 90년대 우리 대중가요의 주류이자 아이돌 음악의 시작인 랩댄스는 비주류 힙합 흑인음악에서 비롯됐고 이 비주류 음악을 우리 식으로 소화한 곳이 이태원. 결국 이태원은 90년대 우리 대중가요 주류 음악의 근원지였던 것이다.

◈ 신촌 - 언더그라운드의 메카가 되다

70~80년대 대중가요에서 방송이 갖는 힘은 막강했다. 방송에 목을 매는 가수들의 풍토에 반기를 들고 나름의 음악을 펼쳐보이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필요로 했다. 그곳이 신촌이었다.

왜 신촌이었을까?

신촌에는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 등 기독교계에서 설립한 대학들이 모여 있었다. 일찌감치 미국식 자유주의와 미국문화에 개방적이었던 지역이 신촌이었던 것이다. 신촌의 분위기는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의 서구적 선진 문화 영향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고, 선진 음악 장르를 활발히 앞서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학가 술집에서의 철학적 토론 등 지적인 분위기도 감돌았다. 이런 신촌에서는 음악도 진보적이었고, 그래서 뭔가 다른 음악을 추구하는 언더그라운드의 문화가 신촌에 있던 것이다.

 

당시 명동과 무교동이 가수들에게 일종의 대중적인 ‘전국구’였다면, 신촌은 자유로운 대학가 해방구이자 언더그라운드의 메카였다. 신촌에는 70년대부터 라이브 연주를 하는 음악 감상실이 생겼고, 그 흐름이 80년대로 이어졌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주류의 대중가요계를 흔든 많은 가수들이 당시 신촌의 거리와 카페를 누볐다. 이곳에서 탄생한 밴드 ‘신촌블루스’는 ‘신촌’이라는 동네의 자유로운 느낌과 ‘블루스’가 음악 장르로서 갖는 즉흥적이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움, 히피 문화를 묶어 그 이름을 만들어냈다.

신촌은 보헤미안적이고 예술가적이고 즉흥적인 장소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방송에서 만날 수 없는 음악을 라이브 공연으로 만날 수 있었고, 70~80년대 신촌은 라이브 공연장을 중심으로 언더그라운드 밴드 음악과 포크 음악의 산실이 돼주었다.

◈ 홍대 - 인디 음악의 아지트가 되다

80년대 중반까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아지트였던 신촌이 극심한 상업화로 장소의 특색을 잃어가고 임대료도 치솟게 되면서, 90년대 언더 음악은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야 했다.

이때 음악인들이 주목하고 수요자들이 호응한 장소가 바로 홍대 앞이었다. 이때부터 신촌의 "언더"는 홍대의 "인디"로 바뀌게 된다. 이전의 언더그라운드가 텔레비전 출연을 하지 않는 데에 그쳤다면, 이들은 아예 상업적 음반이나 라디오에조차도 실리기 힘든 파격적인 음악을 고집했죠. 당연히 대학로나 신촌과는 또 다른 색깔이었다.

(자료 사진)

 

그런데, 인디 음악, 왜 하필 홍대 앞이었을까?

홍대 앞에 인디가 자리잡게 된 배경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홍대 미대와 예술학과를 중심으로 한 예술적 기풍, 둘째는 신촌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신촌의 외곽에서 상업화의 피해를 덜 받은 상황, 무엇보다 셋째는 홍대 미대 학생들의 거리미술제와 학교 본부의 캠페인 등을 통해 신촌의 상업화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자체적인 노력과 저항이 그것이다.

신촌의 상업화가 문제로 대두되던 90년대 전반기, 홍대는 그 분위기가 옮겨오는 것에 긴장하면서 나름의 실천을 전개했다. 화방과 미술학원 등이 밀집해서 나름의 예술의 거리 분위기를 지니고 있던 홍대 앞을 지키고자 학 당국과 학생들이 나서서 길거리 미술전 등을 펼치며 신촌에서 불어오는 상업화의 바람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에 홍대는 단순한 유흥 공간이 아닌 복합화공간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대안적 공간의 이미지, 예술적 감각의 이미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몰려들었고,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예술의 헤게모니가 음악으로 넘어오게 됐다. 특히 IMF 이후 강남이 대표하는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 그리고 강남 유흥의 경제적 부담이 겹치면서 홍대 앞이 새로운 트렌드의 공간으로 각광을 받게 됐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홍대는 덜 상업화된 공간, 문화적 저항의 기운이 감도는 곳, 예술적 풍취가 있는 대학가로 젊은이들의 마음 속 지도에 그렇게 자리잡아갔다. 좀 더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표현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홍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매체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공연만이 허용하는 상상력, 공연으로만 해낼 수 있는 훈련의 영역이 있다. 그래서 공연이 가능한 해방구는 어찌 보면, 우리 대중음악의 허파일 수 있다. 방송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다양성이란 꽃은, 이런 자유로운 공연 속에서 피어난다. 이태원, 신촌, 대학로, 홍대, 이 문화적 해방구들이 있어서, 우리는 이 빡빡한 우리 사회 풍토에서, 다양성의 꽃을 피우고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소들은 재개발과 상업화의 물결 속에 그 고유한 해방구적 기능, 비주류 문화의 인큐베이터로서의 특성을 잃어갈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 음악의 다양성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장소는 그 성격을 담은 음악을 낳고, 음악은 그 장소를 반영한다. 우리 대중가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장소들, 즉 해방구들은 또 어떤 곳들일까? 대중문화의 중심지 서울의 지도를 음악이라는 물감으로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대중가요로 서울의 지도를 그려보는 CBS 기획특집 [Sound map - 음악으로 그린 서울 지도]는 바로 이런 흥미로운 주제들을 총 4부에 걸쳐 음악 다큐 형식으로 탐색했다.

“1부: 한강, 노래를 가르다 - 강남과 강북” 편과 “2부 : 청계천, 노래 사이로 흐르다 - 북촌 종로와 남촌 명동”, 18일 “3부 : 해방구, 노래를 불러모으다 – 이태원, 대학가, 홍대”, “4부 지하철 1호선, 노래를 실어나르다 - 청량리, 영등포, 구로, 동대문” 편이 차례로 방송됐고, 특집 다큐의 자세한 내용은 CBS 라디오 특집 게시판 (http://www.cbs.co.kr/radio/pgm/main.asp?pgm=886)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서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픈 분들은 twitter.com/js8530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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