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국내 한 화장품 회사 대표 강모(32) 씨는 퍼블리시티권 권리 대행업체에서 보낸 한 통의 '내용증명'을 받았다.
강 씨가 자사 홍보용 블로그에 유명 연예인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소송을 하지 않겠으니 200만 원에 합의하자는 요구였다.
이 업체가 문제삼은 것은 김 씨의 회사 블로그가 아닌, 대학생 시절 만든 개인 블로그에 당시 신인 여배우로 화제가 됐던 연예인 사진 한 장이었다.
강 씨는 "4~5년 전에 한 드라마에 나온 연예인이 너무 예뻐 단지 '팬'으로서 올렸던 것 뿐"이라며 "예전에 올린 거라 그런 사진이 있는지도 몰랐다"며 억울해했다.
게다가 '회사 홍보 블로그'라는 업체의 주장과 달리 해당 사진은 지금 강 씨의 회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강 씨가 회사를 창업한 날은 지난해 초. 회사 설립 훨씬 이전에 만든 개인 블로그를 뒤져서, 단순 스크랩한 사진을 마치 상업적인 용도로 이용한마냥 법의 잣대를 들이댄 대행 업체의 행동에 강 씨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업체는 "법을 위반했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며 꿈쩍하지 않았다.
강 씨가 지지 않고 "그래 소송하자"며 세게 나가자, 이 업체는 "창업한 것을 감안하겠다"는 식으로 선심 쓰듯 합의금을 조금씩 낮추더니 나중에는 50만원을 불렀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강 씨가 곧바로 인터넷에 찾아봤더니 비슷한 피해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 해당 업체 피해자들이 모여 까페를 개설했고, 이들을 위한 전문 변호사까지 있던 것.
대부분 강 씨처럼 개인 블로그를 뒤져 초상사용권을 빌미로 합의금을 요구했고 처음에는 2~300만 원씩 불렀다가 나중에는 많게는 50만원, 적게는 20~30만원에 합의를 봤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강 씨는 현재 대행업체의 주장에 반박하는 내용 증명을 보냈고, 업체의 대응을 기다리고 있다. "홍보와는 무관한 개인 블로그를 뒤져 돈을 뜯어내는 행태를 용서할 수 없다"며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 엔터테인먼트-법무법인-리서치 회사 '기획 소송' 알바생까지 동원일부 중소형법무법인들이 '퍼블리시티권(Right of Publicity·초상사용권) 소송에 전문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퍼블리시티권이란 유명인의 얼굴이나 이름 등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로, 우리나라는 법적 근거나 처벌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법무법인들은 이같은 허점을 파고든다. 주 타깃은 '블로그 마케팅'을 하는 성형외과나 피부과, 미용실, 쇼핑몰 등이다. 특히 대형 성형외과는 소송을 꺼리는 데다 거액의 합의금을 쉽게 받을 수 있어 소송을 많이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 따르면 인터넷 블로그만 뒤지는 전문 리서치 업체에서 연예인이 무단 게재돼 있는 사이트를 찾아낸 뒤, 이들 정보를 법무법인에 넘겨주며 소정의 비용을 받는다.
이후 법무법인은 해당 연예인 소속사에 연락해 소송을 권유한다. 이른바 '기획 소송'이다.
아예 자체적으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초상사용권이 침해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는 법무법인들도 나타났다.
하율 법률사무소 하정미 변호사는 "선후관계는 확실치 않지만 리서치 업체와 법무법인,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3자 간 계약을 맺어 소송을 걸고 승소 금액을 서로 나눠가지곤 한다"고 말했다.
◈ 인식 낮고 명시적인 법은 없어…판례도 제각각 '혼란'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퍼블리시티권, 저작권 등에 대한 인식이 낮은 데다 명시적인 법 규정이 없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이들 권리에 대한 침해 문제가 대두되는 가운데, 법이 없는 상태에서 판례로 인정해주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러다보니 퍼블리시티권을 둘러싸고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법원이 판례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개별 사안마다 판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가수 백지영 씨와 남규리 씨는 병원 홍보성 블로그에 자신들의 사진이 무단으로 사용됐다며 성형외과를 상대로 소송해 각각 500만 원의 손해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달 장동건 씨와 인기 걸그룹 소녀시대 등 16명은 사진과 이름의 무단 도용으로 초상권을 침해당했다며 서울 강남의 한 안과 의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병원 홍보를 위한 블로그 제작과 관리는 광고 의뢰를 받은 외주업체에 홍보를 맡겼기 때문에 병원장에게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이유였다.
반면 백지영 씨와 남규리 씨 같은 경우는 "병원장이 직원들을 동원해 블로그 마케팅을 펼치면서 연예인 사진을 무단 도용해 광고모델로서 스타들의 상품성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정미 변호사는 "이같은 행위가 헌법상의 인격권이나 민법상의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는 점, 다른 국가에서는 법령이나 판례로 폭넓게 인정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하급심 판례를 중심으로 현재는 거의 인정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다만 "명문의 권리가 아닌 퍼블리시티권을 부정하고, 인격권 침해만을 인정한 하급심 판례도 있기 때문에 손해배상의 근거가 달라질 뿐, 결과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 때문에 아직 우리 판례가 갈팡질팡하다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연예인 사진 도용뿐만아니라 이제는 '윤아 머리', '배용준 머리' 등 연예인 이름만 써도 소송에 휘말리곤 한다"며 "특히 외주 업체나 홍보성 블로거의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