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불평등 문제가 정치권의 최대 화두로 떠오르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 빈부격차 문제가 미국 정치권의 전면으로 부상하면서 이로 인해 TPP를 신속히 통과시키려는 백악관의 뜻이 암초에 부딪혔다고 보도했다.
작년 대통령선거에서 밋 롬니 공화당 후보는 불평등 문제를 부각시킨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계급 전쟁' 시도라고 폄하했지만 이제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에서도 이런 식의 태도는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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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가 유권자에게 갖는 폭발력 때문에 차기 대선의 공화당 후보로 유력한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의원과 같은 유력 공화당 인사들도 빈부격차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크루즈는 최근 연설에서 "당신들도 알다시피 상위 1%, 대통령이 항상 얘기하기 좋아하는 그 사악한 백만장자·천만장자들이 1928년 이래로 미국 소득의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가운데 특히 TPP와 미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등 오바마 행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자유무역협상이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여론이 여야 모두에서 힘을 얻고 있다.
백악관은 TPP 등을 신속히 성사시키기 위해 무역협상촉진권한(TPA), 이른바 '패스트 트랙'을 부여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해왔다.
TPA는 행정부가 외국과 타결한 무역협정을 백악관이 그대로 승인하되 의회가 수정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불평등 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TPA 부여는 어려워질 전망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백악관 비서실장과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의 정권인수팀장을 지낸 존 포데스타는 자유무역이 미국 국민에게 득이 되는지를 놓고 민주당 내부의 오랜 갈등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TPA를 통과시키려면 "정치적 밑천을 소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뜩이나 건강보험 개혁(오바마케어) 운영 파행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하며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엄청난 부담이다.
불평등 화두는 또한 민주당 내 좌우파의 대립으로도 번지고 있다.
민주당 내 좌파는 월가 거물 출신으로 클린턴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이 키워낸 친(親) 월가적인 오바마 경제팀 인사들을 겨냥해 압박에 나섰다.
'월가 개혁의 기수'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을 간판으로 내세워 '워런파'로 불리는 이들 좌파는 기존 '루빈파'와 자유무역·금융규제 등 경제정책을 놓고 치열히 맞서고 있다.
'워런파'는 최근 대표적인 루빈파 거물인 로런스(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의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차기 의장 지명을 좌절시켰다.
이어 불평등 문제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세운 빌 더블라지오 뉴욕 시장의 당선으로 한층 기세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좌파도 규제 강화와 사회안전망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미국 재정 긴축이 계속되고 새로운 경제 성장동력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상당한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고 FT는 분석했다.
포데스타의 경우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싱크탱크 '공평한 성장을 위한 워싱턴 센터'(WCEG)를 최근 창립했다.
그는 그간 너무나 흔히 반(反)성장 정책으로 평가절하돼온 소득재분배 정책을 성장과 결합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미국의 빈부 격차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 회복이 부진한 가운데 불평등이 더욱 심각해지면서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지난 9월 펴낸 보고서 '2012년 미국 소득·빈곤·건강보험 통계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가구소득 중간값은 5만1천17달러(약 5천400만원)로 2007년보다 8.3% 줄었고 물가를 고려한 실질가치로는 1989년 당시보다 감소했다.
특히 이매뉴얼 사에즈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UC버클리) 교수의 연구 결과 2010∼2012년 상위 1%의 소득은 31% 증가한 반면 나머지 99%의 소득은 0.4% 증가에 그쳤다.
사에즈는 "간단히 말해 상위 1%의 소득은 (금융위기 이후) 완전 회복에 가깝지만 나머지 99%는 거의 회복을 시작하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