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지구를 지켜라'(2003)의 장준환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흥미로운 영화다.
제도권에서 크게 벗어난 삶을 사는 소년 화이(여진구)와 그를 둘러싼 다섯 아버지가 벌이는 수상한 일들이 그렇고, 추격신 액션신 등 장르영화로서 부족함 없는 볼거리가 그렇다.
극 곳곳에 묻어나는 장 감독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유머가 주는 여유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고대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리게 만드는, 카타르시스를 품은 힘있는 이야기가 그렇다.
때는 2012년 겨울, 열일곱 살 화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지만 항상 교복을 입고 있다. "튀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화이는 지식인의 풍모를 지닌 진성(장현성), 운전을 잘하는 알콜중독자 기태(조진훙), 냉혈한 행동파 동범(김성균), 총을 잘 다루는 범수(박해준)를 "아빠"라 부르고, 이들의 리더 격인 석태(김윤석)를 "아버지"라 부른다.
이들 다섯은 화이에게 사격, 운전 등을 가르치고, 화이도 '낮도깨비'라 불리는 이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 어린 나이를 활용해 경찰 등의 감시를 분산시키는 조력자로 나선다.
그러던 어느 날 재개발 지역 범죄 현장에서 아버지 석태가 화이에게 살인을 강요한다. 이 일로 화이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영화 화이의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의 개인사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사회사라는 두 축이 긴밀하게 맞물려 흐른다. 사회사는 개인사에 거부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그 개인사는 어느 순간 사회사의 거대한 기류를 틀어놓는다.
관객들은 오프닝을 통해 화이가 1998년 자신을 유괴한 범죄자들의 손에 길러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재의 화이는 어릴 때부터 봐 온 아버지들의 범죄가 일상처럼 익숙하다.
그럼에도 화이는 그들이 용돈이라며 건내는 많은 돈을 사양할 정도로 물욕이 없다. 대신 틈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
네 명의 '아빠'는 그런 화이를 아끼지만 '아버지' 석태는 다르다. 석태는 자기들과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화이를 굴복시키고자 한다. 이는 화이에 대한 동경과 질투가 섞인 복잡미묘한 욕망이다.
유괴의 트라우마 탓인지 종종 흉측한 괴물을 보고 두려움에 떠는 화이에게 석태는 "괴물이든 귀신이든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라고 윽박지르는 식으로 자신의 입장 만을 강요한다. 이러한 석태의 요구는 화이에게 살인을 강요하는 사건에서 절정에 이른다.
궁지에 몰린 화이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아버지를 따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다. 석태의 요구대로 변해가던 화이는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들에게 반기를 든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통해 아버지를 경쟁자로 인식하던 아들이 아버지를 절대자(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리면 초자아)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 반대의 극단에는 신화 속 오이디푸스 왕이 저지른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욕망이 있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영화 화이의 저변에 깔려 개인사는 물론 사회사로까지 확장된다.
극의 중심을 이루는 화이와 석태가 얽힌 개인사는 1990년대 급격하게 진행된 세계화, 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로 가치관이 전도된 한국 사회 안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 영화 오프닝의 시간적 배경이 대량해고를 낳은 외환위기로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물질만능화하던 1998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재개발 광풍이 부는 극의 현재에서 낮도깨비, 기업, 경찰, 조폭 등은 돈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연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이러한 사회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해 온 아버지들을 극복한 화이의 눈이 권력의 정점에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그렇게 화이가 아버지들에게 반기를 든 것은 극단의 물질만능 사회에 대한 극복 의지로 읽힌다.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나는 누구인가' '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등 인간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가혹하더라도 진실을 알기 위해 파멸의 운명까지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까닭이다. 영화 화이가 오이디푸스 왕의 변주곡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