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7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감기'는 인간도 2010년 구제역 발생 당시 살처분된 350만 마리의 가축과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영화다.
변종 감기 바이러스의 창궐로 한 도시를 폐쇄하면서 벌어지는 사회 현상을 다각도로 그려낸 이 영화의 중심에는 어린 딸을 지키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적 본분도 내던지는 싱글맘과 그녀의 간절함에 동화돼 두 모녀를 돕는 한 구조대원의 이야기가 있다.
김성수 감독(52)은 최근 노컷뉴스와 만나 "사람은 누구나 인해(수애)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쉽고, 누구나 지구(장혁)처럼 밑바탕에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는 어린 미르(박민하)처럼 힘없는 사람이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또한 "실제 재난이 닥치면 개인이 아니라 사회집단의 문제"라며 "재난에 대응하는 그 사회의 성숙도, 능력, 판단력의 수준에 따라 상처를 극복하고 더 단단해질 수도, 반대로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 무섭기로 소문난 감독임에도 수애를 캐스팅하기 위해 현장에서 큰 소리 안내고 욕도 안한다는 약속을 했다는 후문이다.
"나도 살기 위해서.(웃음) 현장이 달라졌으니 예전처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달라진 자세로 임했는데, 막상 요즘은 그렇게 소리 칠 일이 없더라. 스태프들의 전문성이 정말 높아져서 지시 안해도 알아서하고. 과거 서로 부딪히고 흐느끼면서 일했다면 지금은 정확하게 전문화 분업화돼있더라. 한국영화 발전은 시스템과 전문화된 인력의 동의어가 아닌가. 신인감독이 찍어도 완성도가 나오는 게 시스템이 뒷받침돼서가 아닌가."
▶제작자가 2006년 사스를 겪으며 기획했던 영화를 4년 뒤 연출했다. 가장 걱정된 부분은 무엇이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고 일어날법한 일이란 게 매력적이었는데, 그게 가장 어렵더라. 감기 바이러스란 게 보이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고 치유약도 없다. 어떻게 표현할지 힘들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흥미로웠다기보다 2011년 동물보호협회에서 올린 '살처분 돼지의 절규'라는 동영상을 보고 며칠 동안 받은 충격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형상화시킬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인간이 돼지에게 저지른 만행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그 장면이 이번 영화에서 가장 긴 쇼트(shot)다. 기분 나쁜 영상이지만 내 머릿속에 그 돼지영상이 박혔듯, 사람들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길 바랐다."
▶경악할 장면이었다. 비닐에 뚤뚤 말린 그 시체더미는 어떻게 구현했나.
"처음에는 시체 모형을 한 800구 준비했는데 부족하더라. 그래서 1000구 더 만들라고 했더니 미술감독이 비닐을 어디서 구하냐고 볼멘소리를 했는데, 스태프들이 며칠 매달려 준비를 다했더라. 딱 보고 너무 진짜 같아서 웃기지만 정말 행복했다. 장혁이 현장에 내려와 보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재난에 휩쓸린 다양한 인간 군상과 사회현상을 보여준다.
"종합선물세트처럼 만든 면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 중에서 꼭짓점에 있는 캐릭터는 수애 장혁 박민하가 연기한 세 인물이다.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엄마 아빠 딸처럼 보이게끔 찍었다."
▶군중신도 많고, 정말 힘들게 찍은 것이 영화로 보였다.
"요즘 예능도 진짜 아니면 금방 다 알잖나. 우리 영화는 대형마트를 비롯해 모두 실제 공간에서 찍었다. 보조출연자도 어마어마하게 나왔다. 보조출연자 회사 사장이 제게 앞으로 이런 영화 안 나올 것 같다며 감사인사를 했다.(웃음) 하루에 적게는 100~150명, 많게는 200~300명이 동원됐다."
▶군중신은 이집트반정부 시위 등을 많이 참조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4050대라면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1980년 5·18 광주가 떠오를 장면이다.
"제가 80학번이다. 광주는 제 청춘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사건인 만큼 어떻게 자유롭겠나. 저한테 각인된 기억이 있고 제 인생에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을 거다. 다만 그걸 의도하고 군중신을 연출한 것은 아니다."
▶후반부 전시작전권 문제는 정치적 메시지로 읽힐 위험이 있어서 상업적으로 실이 될 수도 있는데 왜 끌어들였나.
"애초 의도는 드라마적으로 또 다른 위기가 필요해서 영화적 장치로 끌어들였다. 우리 영화에서는 정보를 쥔 인해, 선량한 지구 그리고 힘없는 미르 세 인물이 재난 극복에 주요한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재난이 닥치면 이건 사회집단의 문제다. 마치 아버지 사업이 파산하면 온가족에게 여파가 미쳐 집안문제가 되듯이 재난 또한 사회근간을 건드리게 되는데, 그 근간에 전시작전권도 들어갈 수 있지 않나."
▶후반부 한국의 대통령과 미국 대표자의 갈등이 흥미로웠다.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복무해 팀스피리트(한미합동군사훈련) 나가고 했는데, 그때 만약 전쟁나면 난 미군지위를 받으며 싸우겠네, 전쟁이란 게 단순한 상황이 아니고 복잡한데 그럼 어떤 상황을 전쟁으로 판단하지, 그런 복잡 미묘한 상황에 직면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또 전쟁이란 게 바라보는 관점에서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감기를 보면서 이런 재난상황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처능력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2006년 사스 발생 당시 한중합작 영화 준비를 위해 중국에 있었는데 중국정부가 처음에는 사스 발생을 감추다가 겉잡을 수 없이 번지니까 확 공개하더라. 저렇게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던 중국이 전염병에 걸리니까 언론 통제를 푸네. 어쨌든 다행이다 싶었다. 몇 달 뒤 다시 중국에 돌아갔는데, 그 사이 중국의 공중위생 수준이 확 달라졌더라. 사실 어떤 시련이 닥치면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나 상처를 극복하면 그만큼 단단해지는 게 아닌가. 감기를 통해 이런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시뮬레이션을 관객 바로 앞에 펼쳐 보인 측면이 있다."
▶차인표가 연기한 대통령을 보면서 재난에 대처하는 주체가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감독의 어떤 바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