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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과 보시라이, 2대에 걸친 '얄궂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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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정적' 사이...두 사람은 '엇갈린 정치노선'

 

보시라이의 재판에는 중국의 뿌리깊은 권력투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 서기는 중국 혁명 1세대 원로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태자당(太子黨. 중국 당·정·군·재계 고위층 인사들의 자녀를 일컫는 말)으로 꼽힌다.

◈ 부친은 '정적' 사이...정치적 노선 달라 권력투쟁

보시라이는 한때 시진핑 총서기와 당 총서기 경쟁을 벌이던 황태자로 불렸던 거물급 정치인이다.

두사람 모두 부친이 혁명원로인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똑같은 태자당이 아니다.

두사람의 부친은 정치적 노선이 확연히 달라 권력투쟁을 벌였던 정적(政敵)이기도 했다.

중국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 두사람의 부친은 정반대의 노선을 걸었다.

시진핑 총서기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함께 설계하고 실천했던 대표적인 개혁개방파로 꼽힌다. 덩샤오핑은 시중쉰에게 특구 건설을 지시했고 광둥성장을 지냈던 시중쉰은 선전을 경제특구로 선정해 중국경제 발전의 엔진으로 삼았다.

시중쉰은 후야오방, 자오즈양 등과 함께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후야오방은 문화대혁명으로 박해를 받고 지방에 쫓겨가 있던 시중쉰을 광둥(廣東)성 서기로 발탁했으며, 시중쉰은 후야오방을 실각시키려는 보수파에 반대했었다.

당시 보수파에서는 이같은 개혁개방정책과 정치개혁 주장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다. 개혁개방에 반대했던 대표적인 보수파 원로가 바로 보시라이의 부친인 보이보(薄一波)다.

중국 혁명 8대원로로 꼽히는 보이보는 덩샤오핑 말년 10년간 원로정치를 주도했다. 특히 후야오방 총서기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고, 후야오방을 변호하던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까지 축출했다.

◈ 시진핑 vs 보시라이 '엇갈린 정치노선'

부친의 영향 때문인지 시진핑 총서기와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도 엇갈린 정치노선을 걸었다.

시진핑은 저장성 당서기와 상하이 당서기를 거치는 등 개혁개방의 대표 지역 당 서기를 거쳤다.

지난해 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한 이후 첫 지방 시찰지도 선전 특구였다.

아버지가 설계한 특구지역을 방문하며 개혁개방정책을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는 해석도 있었다.

반면 보시라이는 보수파의 노선을 고수했다.

보시라이는 2007년 말 충칭 당서기로 부임한 이후 성장보다는 분배를 강조하는 '충칭 모델'을 통해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한 실험에 나섰다.

그는 빈부격차의 확대와 부패의 심화라는 개혁개방의 부작용에 주목하면서 빈부격차와 도농격차 해소를 강조하고 사회주의적 도덕과 공동체 정신을 부각시켰다.

한편으로는 공산당과 사회주의 홍색 문화를 예찬하고 조직 폭력 등은 엄하게 대응하는 '창홍다헤이(昌紅打黑)' 정책으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보시라이의 충칭 모델은 시장경제의 역할을 강조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광둥모델과 대비되면서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둘러싼 노선경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같은 보시라이의 정책과 충칭모델은 좌파 지식인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으며 보시라이는 좌파의 기수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러나 부인의 살해사건 연루와 자신의 핵심측근이었던 충칭시 전 부시장 왕리쥔과의 갈등으로 이같은 충칭실험은 미완으로 끝나고 중국 최고 지도부를 꿈꾸던 그는 비리 정치인으로 몰락했다.

시중쉰이 보이보에 의해 축출된 것과는 달리 아들 대에서는 보시라이가 시진핑 총서기 시대에 몰락하는 2대에 걸친 얄궂은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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