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을 자초한 국가, 이름뿐인 제국, 무능한 나라’.. 이런 일방적 편견 속에 대중들의 가슴에서 잊혀져버린 역사가 있다. “대한제국”이다. 사람들이 말하기 민망해서 ‘구한말’(구한말은 말 그대로 대한제국 말기라는 뜻이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조선말부터 대한제국을 묶어 국운이 기울어 멸망하는 나라의 말기라는 부정적 의미로 쓰고 있음)이라는 알 수 없는 단어로 바꿔버린 역사, 그것이 바로 “대한제국”이다.
그러나 동양 최초의 전기 시설 설치, 일본 도쿄보다도 앞선 전차의 개설, 서구식 근대 도시 개조, 근대 기업 20배 증가와 국가 수입 250배 증가, 서양 건축 양식의 적극 도입과 응용을 통한 자주적 양식 개발, 독립신문 창간 주도와 지원, 2배 이상 늘어난 병력 그리고 해군함 도입, 독립국 지위 확보를 위한 외교전 등, 일제 강점 이전 제국의 전반기인 불과 6년 남짓 짧은 기간 수많은 난관과 한계 속에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빠르게 추진하던 국가로 “대한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897년부터 1910년. 14년도 되지 않는 제국의 역사 중 그나마도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시간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실질적인 강점을 시작한 때까지 7년도 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짧았고, 그 시작은 너무 늦었다. 그리고 결과는 멸망이었다. 결국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국치의 주인공으로 남게 됐다. 여전히 식민지 역사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망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이 남긴 노력과 성과가 의미를 지니기 힘들었던 배경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제가 합병한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과 성과를 지워버리려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하지만 최근 대한제국을 재발견하려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사학계의 주요 화두가 됐던 고종 재평가 논쟁도 같은 맥락이다. “대한제국”의 역사는 우리의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풍성하게 바라보는 열쇠다. 그러기에 미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학해서도 안 될 “대한제국”을 재평가하는 작업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복절과 국치일이 있는 8월, 대한제국 선포와 근대화 추진의 현장인 서울 도심을 걸어보자. 조선 개국 당시 서울의 틀을 기본부터 바꾸어 놓은 것이 일제강점기가 아닌 대한제국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서울 도심 속에서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몸부림쳤던 나라, ‘한국’이라는 이름을 낳은 “대한제국”의 잊혀진 역사를 만나보자.
■ 경운궁 (덕수궁)
경운궁은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이 대한제국을 출범시킨 곳이다. 조선의 궁궐이 아닌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새롭게 지어졌기에, 경운궁은 ‘고궁’이라고 부르기에 적절치 않은 한국 근대식 궁궐이다.
따라서 경운궁은 그 입지와 모습에서 다른 궁궐들과 차별화된다. 경복궁과 창덕궁, 경희궁이 각각 백악과 응봉, 인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경운궁은 뒤에 산을 배경으로 두고 있지 않다. 게다가 경복궁과 창덕궁보다 500년이나 늦게 도심 한복판에 세워져서 궁궐의 경계도 반듯하지 않고, 실질적인 대문의 위치와 방향도 다른 전통 궁궐들의 배치와 다르다. 다른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서구식 건축양식의 석조전이 들어선 것도 차이점이다. 중세 조선이 아닌 근데 대한제국의 황궁이기에 나타나는 경운궁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경운궁의 특징은 대한제국의 의지와 방향을 표명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경운궁은 민족의 수난기인 임진왜란 당시 왕의 임시거처인 행궁으로 시작됐다. 중건된 창덕궁으로 인조가 환궁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경운궁이 정식 법궁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 역시 또다시 외세로 인한 수난이 시작되던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경운궁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현장이었고, 고종은 바로 그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선포해 국가의 위협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한제국 선포 전 1893년 고종은 선조가 임진왜란 피난 후 정동의 행궁(경운궁)으로 환도한지 300주년을 맞이해서, 경운궁 즉조당에서 참배하고 대사령을 반포했다. 그리고 아관파천과 동시에 바로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경운궁의 수리를 지시했다. 이는 고종이 경운궁을 새로운 근대국체의 원 공간으로 삼으려는 정치적 계획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운궁의 석조전 역시 대한제국이 서구를 모델로 하는 근대국가를 표방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대한제국의 첫 건축 프로젝트였다. 다른 건물도 아닌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을 우리의 전통적 집짓기에 잘 사용하지 않았던 돌을 재료로 서구식 신고전주의 건축에 따라 짓는 것은 서구문물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대한제국의 정치적 선언인 것이었다.
경운궁에는 석조전 이외에도 구성헌과 돈덕전 그리고 중명전 등 여러 서양식 전각들이 들어섰다. 경운궁의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을, 동쪽에는 전통 건물을 배치했는데,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이 채택한 동서 문물 결합의 디자인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다. 그리고 이화여대 건축하과 임석재 교수는 경운궁의 정관헌이 하나의 건물에 서양식 건축과 우리 전통 건축을 융합시킨 사례라고 설명한다. 석조기둥, 벽돌조적기술, 철물 신건축 등 서양건축의 여러 기법을 구사하면서도, 돌기둥 열 밖으로 나무 기둥을 한 열 더 둘러서 공간이 대청이나 툇마루 같은 전통 공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한국 전통 건축의 여러 특징을 결합했다는 것이다. 장식 모티브 역시 서양 신전의 돌 장식과 한국 사찰의 목조 단청을 합해놓음으로써, 서양 건축을 자주적으로 수용하려는 대한제국의 방향을 건축적으로 제시했다는 평가다.
정관헌. (사진=이진성 PD)
■ 소공로, 을지로, 태평로, 서소문로 - 도심 도로 개조경운궁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은 것은 단순히 궁궐 이전과 새로운 황궁 건축에 그치는 일이 아니었다. 이는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구조를 중세적 왕조국가의 수도에서 근대적 황제국가의 수도로 재편하는 도시 개조 사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정치적 중심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경제적 중심을 운종가에서 대한문 앞과 소공로로 옮기고, 황궁 앞에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 앞 도로처럼 방사선 도로를 놓음으로써, 근대제국의 수도에 맞는 도시 개조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대한제국 황궁인 경운궁과 행정관아의 육조거리를 연결하기 위해 황토현을 깎고 백운동천 위에 다리를 놓은 뒤 새로운 도로를 개설했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태평로(지금 모습으로의 완성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또한 남별궁 터에 환구단이 건설되면서 그 앞으로 소공로가 신설됐는데, 이 소공로는 남촌을 경운궁 대한문 앞으로 연결시켰을 뿐 아니라 남대문 상권을 대한문과 정동 주변으로 확산시키는 루트가 됐다. 이렇게 재편된 경운궁 중심의 도시구조가 조선 개국 이래 지속됐던 도시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이 현대 서울의 근간이 됐다는 것이 경기대학교 안창모 교수의 설명이다. 경운궁과 대한문 앞 광장이 근대 한국의 원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볼 부분이 황궁 앞 방사선 도로의 건설이다. 방사선 도로는 서구식 도시계획의 일환이면서, 고종이 모델로 삼았던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앞 중심가의 모습이었다. 대한제국은 이를 서울에 적용하기 위해 대한문을 중심으로 방사선 도로 체계를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태평로(일제강점기 완성), 소공로, 을지로, 서소문로 등이 이 시기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칭경기념비 앞의 도로원표 역시 대한제국이 워싱턴DC의 도로 측량 시스템을 도입해 만든 장치다.
현대 서울 도심 중심부의 기본 골격은 조선 개국 당시의 틀을 바꾼 대한제국의 도시 개조 성과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결과다.
■ 전기와 전차고종이 근대적 자주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 5년간, 즉 대한제국 전반기는 자주적 근대화가 힘 있게 추진되던 시기였다. 동양 최초의 ‘전기’ 시설 설치사업을 통해 일본보다도 2년 앞서 궁 안에 발전기를 두고 전등을 켰던 고종은,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한 뒤 1899년 첨단문명의 상징이었던 ‘전차’를 개설했다. 이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도시였던 일본 도쿄보다도 3년이 앞선 것. 그리고 1900년에는 서울의 거리에 600여개의 가로등이 설치됐다.
1902년부터 8개월간 서울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는 “서울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전차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그 전차들이 서울 근교의 성곽 밖에 이르기까지 주요 간선도로를 통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전차로 말미암아 서울은 근대적 교통시설을 갖춘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다”고 술회했다.
‘철도규칙 6개조’ 공시에 이은 ‘한성의 도로 폭 개정의 건’이라는 내부령으로 시작된 도시 개조 사업. 대한제국 시기 진행된 이 사업으로 가가로 가득했던 거리가 정비되고 도로 폭이 넓혀지면서 반듯해진 종로에 전신주와 전등이 늘어섰으며, 이 거리를 전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 탑골 공원근대 도시 개조를 위한 대한제국의 노력은 서울 곳곳에서 펼쳐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근대 도시의 대표 조성물인 공원으로서의 탑골공원이다. 서구에서 공원은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도시환경을 치유하기 위한 도시계획으로 탄생했지만,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서울 사대문안의 공원은 근대국가를 향한 의지를 표출하는 장치였다.
탑골공원. (이진성 PD)
탑골공원 터는 고려시대 흥복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로, 흥복사는 조선 세조 때 원각사로 이름을 바꿔 중건됐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원각사 건물이 해체되면서 사찰은 자취를 감추게 됐고 이곳은 원각사지 10층 석탑만이 자리한 터로 이어져왔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도성 인구 밀집으로 이곳 원각사 터 주변이 완전히 집으로 둘러싸이게 됐는데, 대한제국은 탑골공원 조성을 위해 이곳 주민들에게 보상금과 이주비를 주고 철거한 다음 공원을 만들었다.
기본 개념은 서양의 근대적 도심 공원을 따랐으며, 소속은 황실 공원이었지만 설치한 시설 등의 개념은 민족 공원에 가까웠고 이후 3.1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공원뿐 아니라 원형 국립극장도 서울에 세워졌다. 지금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던 협률사가 그것인데,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 ‘원각사보다 6년 앞선 1902년 설립된 극장이었다. 최초의 반(半)외국식 옥내극장이기도 했다. 대중들을 위한 근대적 오락 시설로서만이 아니라, 당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외교 사절을 초청해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름으로써 국가 위상을 새롭게 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던 극장이었다.
이렇게 공원과 극장을 만든 것은 근대성의 일환인 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의도였다.
■ 환구단조선시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늘 제사는 천자로서 황제만이 올릴 수 있다는 중국의 외압으로, 1465년 세조 10년에 제천단이 폐지된 것이다. 조선에 허락된 것은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었다. 결국 하늘 제사 없는 땅 제사, 제천단 없는 사직단은 중국의 속곡이자 조공국인 조선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에 드디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단으로 ‘환구단’이 만들어진다. 지금 서울광장 옆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자리한 황궁우. 이 황궁우가 고종이 황제로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 ‘환구단(원구단)’의 일부다.
환구단. (이진성 PD)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환구단을 세운 것은 종교적 용도를 넘어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조선이 더 이상 ‘천자’의 나라 중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임을 알리는 동시에, ‘천황’을 주장하는 일본과 대등한 독립국임을 보여주려던 선전물이 바로 환구단이다. 특히 환구단이 자리한 곳은 청국 사신의 숙소인 남별궁 터였는데, 남별궁을 헐고 환구단을 세운 것 역시 중국과의 오랜 주종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경복궁 좌우에 있는 종묘와 사직이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교시설이었다면,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덕수궁) 앞 환구단은 조선의 마지막 힘찬 자주 독립 근대화를 상징하는 정신적 탯줄이었다.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제는 1912년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다. 그리고 이 건물은 1968년에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됐다. 현재 환구단 터에는 황궁우(3층의 팔각정자)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대문만이 남아있다.
환구단은 빌딩 숲 속인 조선호텔 안에 자리하고 있어서 일부러 관심을 갖고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호텔의 정원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역사성을 잃고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직단처럼, 도심의 빌딩 숲 속에 숨어 찾기조차 힘든 환구단. 대한제국의 정신적 뿌리인 환구단은 이렇게 역사도시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그 소중한 의미도 상실한 채 지금 우리 사회의 몰역사적 혼돈을 증거하고 있다.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1897년부터 1904년까지는 러시아를 비롯한 삼국의 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주춤했던 시기, 즉 한반도 내 열강의 세력 균형이 이뤄졌던 시기였다. 고종은 이 시기를 틈타 제국 열강과 동등한 독립자주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라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였다.
짧은 기간 속도감 있게 추진됐던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은 문제점도 물론 적지 않았다. 대한제국 광무대제 즉 고종황제는 황제 중심의 전제적 군주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바탕으로 심복들을 기용해 근대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민중의 정치적 참여는 탄압됐고, 산업화 전략은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일제의 전체 예산 중 국방비 비율과 맞먹는 대한제국의 국방 지출도 너무나 큰 재정적 부담이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근대화의 성과물을 쌓아가기에 대한제국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부족했고, 대한제국을 괴롭힌 열강의 방해와 간섭은 아직 근대화 준비가 덜 된 대한제국이 넘기에 쉬운 벽이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