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명진 기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어릴 적 또래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면 술래에게 숨은 곳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있을 법도 하다. 아마도 "못 찾겠다 꾀꼬리"라는 술래의 외침을 들은 뒤에야 안도의 숨을 쉬며 의기양양하게 모습을 드러냈으리라.
숨바꼭질은 찾아야 하는 자와 숨어야 하는 자로 역할이 뚜렷이 구분된 놀이다.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술래에게 들키면 '죽기' 때문이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쫓고 쫓기는 아이들의 표정은 그래서 진지하다.
실제로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숨바꼭질이 있다면 얼마나 섬뜩할까. 14일 개봉하는 스릴러 '숨바꼭질'은 그 원초적인 공포를 다룬다. 그리고 배우 문정희(37)는 그 공포의 한가운데 웅크린 주희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7일 서울 명동에 있는 한 멤버십 클럽에서 만난 문정희는 "숨바꼭질 놀이에서 술래가 무서운 건 그냥 술래이기 때문"이라며 "우리 영화에서도 누군가는 잡히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잡으려고 악착 같이 달려드는 모습이 가장 큰 공포로 다가올 것"이라고 전했다.
영화 숨바꼭질 속 주희는 철거 직전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외동딸과 함께 살아가는 주부다. 그녀는 항상 쫒기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대화할 때도 말을 더듬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남편은 돈을 벌러 해외에 나가 있고, 딸의 교육을 위해 더 나은 집으로 곧 이사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런 주희는 자신과 딸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만 하는 운명이다.
문정희는 주희라는 인물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내놨다.
"촬영 당시에도 감독님과 주희의 성정 과정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어요. 상상력을 동원했죠.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던 주희는 공부를 많이 못했을 테고, 어쩌면 노숙을 했을 수도 있어요. 내가 가진 것을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피해의식과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 주눅든 채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에 익숙한 거예요."
문정희는 이러한 주희의 어떤 점에 끌렸을까.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할이라는 점이었죠. 사실 배우로서 새로운 이미지에 도전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주희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어요. 시나리오를 본 뒤 너무 하고 싶어서 제작사 대표님을 찾아가 설득했죠. (웃음)"
영화 숨바꼭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나름의 소유욕을 지녔다. 이들의 모습은 물질만능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다가온다.
문정희는 "우리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가해자요 피해자"라고 했다.
"영화 속 여러 가정을 위협하는 범인은 욕망과 집착 탓에 죄책감과 도덕성까지 잃었죠. 서로 뺐고 빼앗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사람인데, 좀 알아 줘요'라고 호소하는 듯해요. 저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죠. 이 영화가 지금 우리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을 거예요."
사진=이명진 기자
-강도 높은 액션신 탓에 발톱 세 개가 뽑혔었다고 들었다."발톱이 빠지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 (웃음) 어디가 부러져서 촬영을 못할 정도로 커다란 데미지는 없었다. 아플 때는 붕대 감고 하면 됐다. 큰 사고 없이 잘 마쳤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 역을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컸다. 평소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데 많이 다친다. 2000년대 초반에는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크게 다친 적도 있다. 많이 겪어 봤지만 다치는 것은 언제나 무섭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촬영하다보니 부상이 따라오더라."
-'연가시'(2012년)에 이어 두 작품 연속 아이 엄마를 연기했다."아이들과 연기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저 멀리 아이 엄마들이 지켜 보고 있으니 눈치도 보이고. (웃음) 연가시 때는 고민도 많이 했다. 그러다 이 아이들도 배우라고 생각하니 맘이 편해지더라. '졸지마' '같이 먹고 살자' '열심히 하자'라고 얘기하다 보면 아이들도 수긍하더라. 숨바꼭질 때는 지금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이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조율한 뒤 아이들이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 아역 배우들도 프로다."
-극중 주희만큼이나 인생의 굴곡이 많았다던데.
"여자들에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은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공통된 시기인 듯하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때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 시기에는 많이 아팠지만 일단 버텼다. 다른 배우들은 물론 꿈을 키워간 사람들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잘 넘긴 것 같다. 그때는 외로움도 즐기면서 대놓고 아팠는데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어찌저찌 피해갔다면 그 뒤에 닥쳐올 어려움을 돌파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많이 생각하는 계기였다."
-지금은 삶의 방향이 정해졌나. "예전이랑 많이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일희일비하지는 않게 됐다.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지만 그게 나다. 예전에는 그런 나를 용서 못했는데 지금은 '그래 괜찮아. 또해 볼래?'라고 격려할 때가 많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얘기하다가도 집에 가면 '너 정말 잘 살고 있니?'라고 생각하며 웃는다. 매순간 즐거운 추억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항상 지금 여기에 나를 던지는 사람이고 싶다."
-배우로서 전환점이 된 사건을 꼽는다면."박정우 감독님과의 만남이다. 연가시에 앞서 '바람의 전설(2004년)' '쏜다(2006년)'까지 세 작품을 함께 했다. 나에게 기회를 주신 분이다. 매순간 작업할 때마다 연기와 인생을 배웠다. 마음에 칼도 갈게 했고 의욕도 일으켰고 의리도 배웠다. 올해도 작품 한 편을 함께 하기로 했다. 영화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분이다."
-바람의 전설 때는 춤 잘 추는 사람으로 유명해서 뽑혔다고 들었다."오디션을 봤다. 바람의 전설은 댄스스포츠를 다룬 영화였다. 당시 내가 추던 살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춤이었다. 음악도, 리듬도, 스텝도 모두 틀리다. 그래도 살사를 춰 봤으니 댄스스포츠 배울 때 수월하지 않겠냐는 점은 있었다. 재즈를 좋아하는데 2000년께 라틴 재즈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갔다가 춤까지 배우게 됐다. 춤은 나에게 있어 숨쉬는 것만큼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춤 욕심이 많은데 요즘에도 새로운 동작이나 안무가 나오면 그때 그때 바로 배운다."
-연기에는 왜 끌렸나.
"지금 생각하면 연기는 진짜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어릴 때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내보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에서 하는 역할 놀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면서 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연기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배우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했다. 집과 학교를 통학하면서 인문학 서적에 빠져 '나는 왜 태어났나'에 더 관심이 많았으니까. (웃음) 학교를 졸업한 뒤 오디션을 봐 '의형제'라는 소극장 뮤지컬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왔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관객들이 좋아하는 트렌드가 있으니 연기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1960년대 스타일로 연기하면 다들 오글오글하지 않겠나. 시대와 환상을 반영해서 공감을 얻는 배우가 좋은 배우일 것이다. 그런 배우가 훌륭한 인격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이고. 내 경우 배우를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배우라는 직업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먼저다. 그래야 지금 옆에 있는 사람과 행복할 수 있다고 본다."